시작점을 기억하라

[배고프다! 영화] (2) 미셸 공드리 감독의 <비카인드 리와인드>


<<글쓴이 고프 (Ghope)는 2006년 경향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했다. 최근 2년간 관악 공동체 라디오에 영화평을 연재했다. 앞으로 본지를 통해 영화에 대한 글을 써 나갈 예정이다. - 편집자 주>>


영화엔 FBI가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제리(잭 블랙)의 한탄 속에서다. FBI와 발전소가 전자파를 이용해서 제리의 뇌를 녹이고 있다. 제리는 그들의 의지대로 살아진다. 이렇듯 황당무계한 이유를 들어 FBI를 원망하던 제리에게 두 번째로 FBI가 찾아온다. 제리와 마이크가 만들었던 영화들을 폐기처분하러 온 ‘협회’의 간부는 저작권과 관련한 모든 조항이 테잎과 영화에 적시되어있다고 말한다. 이 조항들의 말미에는 FBI의 경고가 적혀있다. 결과적으로 제리의 피해의식과 환상 속의 존재 FBI는 실재의 세계에서 제리와 마이크의 꿈과 희망을 유린하는 존재가 된다. FBI는 제리의 환상과 실재 양자를 통제하는 권력이다. 제리는 발전소를 파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영화를 만들었으나 폐기처분 당한다. 이렇듯 환상과 현실 세계에서의 권력은 제리를 우롱하고 주저앉힌다. 그러나 제리와 마이크는 다시금 벌떡벌떡 일어선다.


제리는 발전소를 파괴하려다 자기장을 띈 인간 (the magnetized)이 되어 모든 테잎들을 망쳐버리지만, 곧 스웨디드(sweded)한 영화를 만들어낸다. 스웨디드(sweded)라는 신조어 속에 함축되어있는 바, 이것은 국가를 피동형의 동사로 만들어버린다. 국가는 주체가 아니라 ‘되어지는 존재’이고, 제리와 마이크의 영화가 지향하는 바는 이 단어 속에 함축된다. 이른바 (국가)권력은 주체이전에 객체이어야 하며 (국가)권력의 주체는 당연히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즉 권력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에 의해 행사되어지는 것이다. 영화(산업화된 권력의 작품)를 감상하던 동네 사람들에 의해 영화가 만들어진다. 제리의 영화는 동네의 사람들을 결집하고 그들의 신명을 담아내는 놀이의 장이 된다. 물론 이 영화들은 유치하다. 그러나 그 속엔 개인들의 생동감과 생명력이 담겨 있다. 그 영화들은 온전히 ‘그들의 영화’이다. 영화는 빈민가의 사람들에게 일종의 해방구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구는 앞서 밝혔듯 FBI의 권위를 앞세운 권력에 의해 폐기 당한다. 불도저를 닮은 중장비가 동네 사람들의 열정이 담긴 영화들을 박살내는 순간엔 마치 모든 것이 끝날 것 같다. 낙담과 절망에 이른 플레처는 이 자리에서 마이크에게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우상 팻츠가 태어난 곳은 비디오샵 Be kind rewind가 아니다. 플레처는 그저 마이크가 견딜 수 있도록, 빈민가의 삶, 쓰레기 늪 속에서의 삶을 견딜 수 있도록 행복한 동화를 얘기해줬을 뿐이다. 행복한 동화는 차디찬 권력의 그물망에 의해 살해당한다. 꿈은 사라졌고 철거라는 현실이 다가온다.


그러나 달콤한 꿈의 맛을 본 빈민가의 개인들은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실의 권력 논리가 겨냥하지 못하는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구석지고 못난 비디오샵에게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주었던 팻츠의 삶이 이제 그들의 손에 의해 영화로 제작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대목이 여기에서 관찰된다. 앞서 그들의 영화가 폐기되는 순간, 플레처는 마이크에게 팻츠가 이곳(비디오샵)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팻츠의 삶을 다룬 영화를 만들 때 플레처는 바로 이 비디오샵이 팻츠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을 넘어선 ‘진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팻츠의 영화는 팻츠 개인의 삶 그 자체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라 팻츠의 삶과 음악에 대한 열정, 재즈의 출발지로서의 지역에 대한 자긍심이 어우러진 ‘그들 자신의’ 팻츠를 써내려가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우울증을 앓던 페일위즈의 선언처럼 “우리의 과거는 우리의 것이다.” 그들은 그들 각자가 기억하고 있는 팻츠, 그들의 부모들이 기억하던 팻츠의 일화와 이미지들의 조각을 모아 새로운 신화를 써내려간다. 이것은 모든 신화들이 가지고 있는 원형적이며 근본적인 지점이다.


신화는 특정한 집단이나 개인에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려준다. 예를 들어 중세의 대장장이들은 자신이 대장장이 신 토르의 자손이라 생각하며 그들이 내리치는 망치질 속에서 신의 몸짓을 반복했다. 이런 노동을 통해 그들은 대장장이신의 보호를 받으며 그들의 소명을 알아간다. 만약 인간에게 아무런 시작점이 없다면, 인간이 상상할 수 있고 스스로를 안착시킬 수 있는 어떠한 원형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 무엇으로부터 자신의 자기성을 발견하고 시작할 수 있을까? 아기가 거울을 보고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 듯, 인간은 신화를 통해 자기성을 시작한다. 스스로를 일치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 등장하는 시점부터 인간은 인간성을 구축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성의 구축 후에 인간은 자신의 토대를 뛰어 넘는 인격체가 되기 위한 자유의 투쟁을 시작한다. 이러한 신화는 누군가가 만들어서 유포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강제로 주입한 것도 아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말과 말을 통해 상호간의 교류와 유대를 통해 신화는 형성된다. 인간은 개체적 한계를 넘어 집단성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신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분열시키고 종합하며 다시 분열시켜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공동체는 특정한 유대를 가지게 된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신화를 알고 똑같이 기억하지 않는다. 신약성서의 4대 복음서마저도 예수의 행적에 대한 디테일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 개인들이 기억하고 체득한 신화적 차이에 대해 그것을 병리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화는 모두에게서 시작해 모두에게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열과 종합의 변증법은 이들 빈민가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록하는 팻츠의 영화를 만들며 자신들의 신화를 써내려간다. 이러한 신화는 권력에 의해 가로막히지 않는다. 그것은 권력의 너머에 있다. 권력이 발버둥 쳐도 도착할 수 없는 곳에서 신화는 진행형으로서의 운동을 지속한다. 그리고 이 신화는 영화를 보기 위해 좁은 비디오샵에 모인 사람들을 초월해 좀 더 포월적인 보편성을 확보한다. 경찰도, 건물을 철거하기 위해 기다리던 노동자들도 시청의 공무원도 신화적 보편성 속에서 초월적인 일체감을 확인한다. 그것은 인간의 어딘가에 있는 본원적인 선함을 진동시킨다. 팻츠와 뮤지션들이 파티를 열 때 자율적인 기부금을 받았던 것처럼 그들의 영화를 틀 때도 자율적인 기부금을 받는다. 이 기부금은 그들의 현실을 바꾸기에 적절한 액수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는 신화의 한 순간을 기억해내며 현실을 ‘견딘다.’ 플레처가 마이크에게 신화를 알려줘서 마이크를 견디게 했던 것처럼, 한 편의 영화를 보며 사람들은 견딘다. 빔 프로젝터의 반짝이는 빛 속에서 기대에 찬 사람들의 얼굴을 비춰주던 장면은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이다. 이 순간은 그 지역에서 영원한 신화가 될 것이다.

미셸 공드리는 현실에 대해 현실로 싸우는 투사가 아니다. 그의 영화는 한 편의 신화를 완성하고 그것의 다음 편은 열어두었다. 중국산 대나무를 붙잡고 있다 쓰레기 더미에 떨어진 러시아워의 형사들처럼, 그들은 추락하더라도 다시 털고 일어나 악당을 막기 위해 질주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기 직전 마지막 화면처럼 미셸 공드리의 질주는 계속될 것이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2007년작 <비카인드 리와인드 Be kind Rewind>는 이런 의미를 지닌다. 미셸 공드리 영화의 주인공들은 달린다. <이터널 선샤인>에서도 그렇고 <비카인드 리와인드>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그들은 되돌려(rewind)본다. 되돌려보기는 중요하다. 그것은 모든 것의 시작점을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올 즈음, 용산의 한 건물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이 목숨을 잃었다. 영화 속의 철거 공무원을 보고 용산에서의 사건이 떠올랐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영화 속의 공무원은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한 시간을 기다려주었다. 용산에서 벌어진 일들이 어떤 경제적이며 법적인 논쟁거리를 남겨두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진압작전의 수뇌부가 한 시간만 더 참고 생각을 했더라면 희생자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목숨을 걸고 그 자리에 오른 사람들을 향해 기동대가 고공 진압장비까지 이용해서 공격을 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 정도로 필연적인 일이었을까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어쩌다 국가권력이 국민을 보호하지 않고 공격하게 되었을까. 국가권력이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국민은 자기 방어를 위한 사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2008년의 촛불은 그렇게 시작되었었다. 다시, 권력은 객체다. 권력은 행사되어져야 하고, 따라서 모든 행사되고 있는 권력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누가’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가에 의해, 즉 누구에 의해 권력이 행사되어지고 있는가에 의해 그리고 그 누군가가 얼마나 책임 있는 사람인간에 의해 권력은 꿈과 악몽을 만들어낸다. 12개월을 12번은 더 살았던 정도의 피로감을 주었던 현 정부의 일거수일투족은 새해에도 악몽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국민은 악몽 속에서 안주하지 않는다. 촛불의 신화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촛불은 공화국의 시작점을 되돌려(rewind)보았기 때문이다.

by(e) Gho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