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민·정 합의문에 담지 못한 것들

일자리 있는 사람조차 삶의 질 떨어뜨려

비정규직들은 계약해지 당하는데

노동자, 사용자, 민간단체, 정부(노·사·민·정)가 모여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합의문을 23일 내 놨다. 노·사·민·정은 지난 20여 일간 합숙도 하고, 의견이 맞지 않아 퇴장도 하고, 막판 조율에 조율을 거쳤다. 그러나 합의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대타협을 통한 합의문이기 때문에 박수소리가 나와야 하지만 노동계의 한 축인 민주노총은 강력하게 비난했다.

이번 합의문의 핵심은 노와 사가 공정한 고통분담을 하고 정부의 지원을 통해 일자리를 지키거나 나누자는 것이다. 그러나 합의문에는 빠진 것이 많다. 무엇보다 경제위기로 말미암아 가장 위기에 처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 보장에 대한 방안은 전혀 합의문에 담겨있지 않다. 물론 비상대책 회의 발족 때부터 비정규직, 최저임금 등의 문제는 논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최종 합의문에는 비정규직 법이 가진 문제점은 비켜나간 채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에 대한 고용안정에 대한 부분이 추상적으로 담겨 있다.

  지난 23일 열린 노사민정 합의문 발표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김혜진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집행위원장은 “현재 경제 위기 국면에서 비정규직의 해고는 불법이 아니라 합법이라는 상황에서 그런 합의는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임금 삭감이나 정리해고가 아닌 모두 합법적으로 계약해지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합의문에는 “노사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임금 동결·반납·절감 등을 통해 비정규직, 하청·협력업체 근로자의 고용안정 지원을 위해 노력한다”라는 조항과 “대기업은 사내 하청업체 및 협력 업체의 고용안정 및 상생협력을 위하여 적극 지원한다”는 사내하청 관련 조항이 있다. 그러나 사내하청 노동자나 계약직 노동자를 합법적으로 계약 해지할 경우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특히 이수영 경총 회장도 밝혔다시피 이번 합의문은 노력한다는 것이지 강제 사항이 아니다. 단위 사업장 차원에서 사내하청, 계약직에 대한 계약해지를 막을 구속력은 전혀 없다. 김혜진 집행위원장은 “노·사·민·정 구조가 사실상 일방적인 이데올로기 전파 수준이라 결국 정규직과 비규직을 압박하는 효과만 있다”고 주장했다.

“노·사·민이 모였지만 사실상 정부 정책의 들러리”

민주노총도 이번 합의문에 대해 “재벌의 곳간을 여는 고통분담 없는 희대의 사기적 합의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2008년 9월 10대 그룹의 유보율은 787.13%, 총 194조에 이르며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성 자산만도 42조에 이른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노동자의 임금동결·반납·절감이라는 고통분담만 있고 사측은 임금삭감에 덧붙여 세제지원을 받고 각종 정책자금 지원 등 경영, 금융상 각종 지원사업의 우대를 받게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심지어 법정 기준 미만의 휴업수당 지급도 허용돼 정부가 나서서 탈법을 조장하고 있는 셈”이라고 비난했다.

이번 합의안은 노·사·민·정이 모여 많은 언론사 카메라 앞에서 자축 했지만 그 합의 내용은 사실상 정부가 주도 했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이번 협의 절차를 보면 이미 정부가 답을 내리고 사후적으로 들러리나 서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식이었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정부가 이미 1월 초부터 임금 삭감 중심의 일자리 나누기를 주장해 온 것을 이번 합의를 통해 추인하는 방식이 됐다”고 규정했다.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 추진을 감추는 모양새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고통분담 역시 공정한 고통분담이 아니”라고 밝혔다. 절감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상 노동계의 양보교섭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임금을 삭감한 후에도 일자리 나누기의 실효성은 없고 이번 기회에 근로조건 개악을 동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교수는 또 “노동계만 일방적 양보를 강조하는 식으로 되다 보니 한국노총 내부에서도 사업장 별로 삭감을 요구받았을 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병훈 교수는 이러한 정부 주도의 합의에 맞서 지난 12일 고용연대를 제안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정부중심의 반쪽짜리 내용이 나온 만큼 다른 반쪽의 연대에 대한 대응 논의를 본격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병훈 교수의 지적처럼 한국노총 내부에서도 이번 합의에 대해 상당한 불만이 쌓이고 있다. 한국노총의 한 관계자는 “이번 합의가 산하 노조에 대해서는 권고수준의 구속력 정도”라며 산하 노조의 반발을 의식했다. 단위사업장의 형편을 반영 한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합의 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산별노조에서는 금속이나 자동차, 화학 등 제조업은 찬성할 것이고 공공이나 금융 쪽은 반발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실제 합의문을 발표하던 23일 오전 조찬 산별대표자 회의에서는 격론이 있었다. 한국노총의 한 산별 위원장은 “산별 대표자 회의에서 격론 끝에 가기로 했다. 결국엔 산별의 몫이 됐다”고 토로했다.

산업평화를 위한 패러다임의 실패 인정해야

한편 이번 합의가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식의 패러다임에만 갇혀 있기에 진정한 사회적 합의라고 보기 어렵다는 인식도 있다. 사회적 합의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 것이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경영대)는 “이번 합의는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조차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는 이어 “사회적으로 실업자 통계 관리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청년실업이나 전제 사회의 고용불안 자체를 해소하는 방침은 못 된다”고 이번 합의안의 문제점을 바라봤다.

강 교수는 “진정으로 필요한 사회적 합의는 산업평화를 위해 기존의 돈과 권력에 기반한 패러다임의 실패를 인정하고 삶의 패러다임을 이루어야 가능하다”고 제시했다. 실패를 거듭한 사회, 경제위기의 본질을 돌아보고 돈 벌기 중심의 패러다임이 아닌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을 모두 바꾸는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어울려 사는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민주노총이든 진보세력이든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