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책7] 한국언론과 언론문화 (유재천, 나남, 1988.9.5, 462쪽)

‘미디어 공공성’ 큰 목소리 냈던 언론학자 유재천

유재천은 1938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네소타대 대학원을 나와 한국신문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서강대 신방과 교수를 지냈다. 유재천은 1970-90년대까지 언론의 공공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미디어비평 글을 자주 발표했다. 2000년대 초까지 대표적인 공영방송론자였다. 지금은 이명박 정부 하에 KBS 이사장을 지내고 있다.

이 책 <한국언론과 언론문화>는 1986년 9월초에 나온 초판을 1988년 9월에 다시 개정했다. 그 사이 87년 6월 항쟁의 힘으로 전두환 신군부가 만든 언론기본법을 폐지하고 종이신문 전체를 관장하는 정기간행물법(정간법)과 방송법 제정이란 큰 분기점이 있었다.

유재천은 개정판에서 새 정간법과 방송법 분석의 글을 새로 넣었다. 새로 넣은 글에는 ‘언론노조와 편집권’이란 제목의 글도 있다. 전체 목차는 1.언론의 자유와 갈등 2.언론의 윤리와 통제 3.언론의 기능과 역기능 4.언론과 대중문화 순으로 돼 있다.

누구보다 더 크게 ‘언론 공공성’ 외쳤던 유재천

1부 <언론의 자유와 갈등>에는 지나간 한국언론사를 나름의 시각으로 기술했다. 유재천은 ‘70년대 한국언론’을 일컬어 ‘매체의 복합기업 형태’라고 분석했다. 그는 “재벌이 언론기업을 경영하거나 재벌그룹은 아닐지라도 몇 개의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매체를 소유하는 점이 문제”라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또 다른 70년대 한국언론의 특성을 “친정부적 성격을 가진 재단이 경영하는 매체가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언론의 통합 소유라 부르는 매체의 독점화 경향은 그것 자체가 이미 언론통제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재벌그룹이 소유한 언론사를 직접 사례로 들었다.

유재천은 재벌이 수많은 언론을 소유한 사실을 “매우 중대한 의미”이라면서 그 해악을 다음의 세 가지로 나열했다.

첫째 재벌의 이익이나 재벌과 이해를 같이 하는 집단이나 세력의 이익을 옹호할 가능성이 크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70년대에 이런 부정적 측면의 위험성이 개연성으로만 남지 않고 현재화되었다. 재벌기업이 경영하는 언론이 신문기사나 방송내용에서 같은 기업그룹에 속한 특정업체의 상품을 광고하거나 기업 PR을 일삼았다. 신문기사에서 자기네 발행의 월간지, 주간지, 단행본의 선전은 물론 방송프로를 광고하는 사례는 너무 흔했다.

재벌의 언론 독점 비판했던 유재천

둘째 재벌이나 재벌 그룹이 경영하는 언론사는 이윤추구를 일차 목적으로 추구하기 쉽다. 70년대 언론의 상업주의는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언론기업의 상업주의는 상승작용을 했다. 셋째 재벌이나 재벌그룹이 경영하는 언론이 경영주를 통한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측면이다.

재벌의 언론소유를 죽기보다 싫어했던 언론학자 유재천이다. 유재천은 재벌의 품으로 점점 숨어드는 한국 언론의 추악한 모습을 70년대 초 한국신문협회의 공식발표 몇 건으로 간추려 정리했다.

1970년 제14회 ‘신문의 날’ 기념식에서 당시 신문협회 장태화 회장은 “민족과 조국의 앞날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지 그 향도적 소임을 스스로 져야하며 그러기 위해”라고 언급했다. 신문협회는 1971년 12월8일 정부가 선언한 ‘국가비상사태선언’에 즈음 “언론은 앞으로 국가안보의 차원에서 향도적 사명을 수행, 자유언론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등 4개항의 성명을 냈다. 다시 신문협회는 1972년 10월18일 정부의 ‘10.17 특별선언’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고 “10월 27일 공고된 헌법 개정안은 우리 국민이 국가의 진운과 시대적 사명을 다 같이 걸머지고 전진해야 할 길임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신문발행인들이 정부 정책에 동반자가 됐다.

1968년 신문편집인협회장 최석채는 ‘신동아 필화’와 관련 언론의 권익을 효과적으로 옹호하지 못했음을 자책하면서 회장직 사의를 표명한 뒤 기협회보와 인터뷰에서 “한국의 언론은 우리가 의시기하고 있는 이상으로 경영주의 손에 의해서만 움직여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전까지 한국 언론이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향상의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지금은 경영자 편집인 기자가 각가 흩어져서 싸우고 있으니 우리로서는 경험하지 못한 바요, 외국에도 이런 경험은 없다”고 토로했다. 유재천은 최 회장의 발언에 주목하면서 최 회장이 내놓은 한국언론의 위기극복 방안 두 가지도 소개했다. 첫째 기자노조의 결성과 둘째 신문사의 사원주주제 도입이 그 방안이다.

유재천은 70년대 ‘언론인의 투쟁과 좌절’이란 소제목으로 “70년대 언론인들은 우리나라 언론사상 어느 시기의 언론인들 못지않게 집단적인 힘으로 상황적 여건에 도전했다. 그러나 도전은 언론 내외의 강력한 반작용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유재천은 언론인들의 투쟁 좌절을 두고 “70년대의 경험은 한국 언론에 큰 교훈으로 남을 것임에 틀림없으리라”고 예견했다. 한국기자협회는 70년 4월 권력에 빌붙는 신문협회를 비판하는 <우리의 주장>을 통해 “신문이 관권을 두려워하여 비판정신을 잃는다면 그것은 곧 구제될 수 없는 자살행위”라고 비판했다. 유재천은 기협의 <우리의 주장>도 주목했다. 그러면서 70년 4월22일 기협의 권익분과위가 노조결성을 위한 특별기구를 구성하고 74년 3월6일 동아일보 기자 33명이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지부 창립총회를 열고 조학래(전 한겨레신문 사장) 기자를 지부장으로 임원진을 구성한 사실 등 70년대 언론노조 운동의 태동과 좌절을 소개했다.

“민중의 소리 외면한 죄 무엇으로 갚을 텐가”

유재천은 언론 내부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독자의 언론 통제’에도 주목했다.
1971년 3월26일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생 30여명은 동아일보 앞에 모여 ‘민중의 소리 외면한 죄 무엇으로 갚을 텐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무력해진 언론을 신랄하게 규탄했다. 70년대 초 보여주었던 독자들의 신문에 대한 채찍질은 긴급조치 9호로 70년대 후반 들면서 차차 사라지면서 거의 무관심의 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독자 광고를 통한 ‘동아일보 돕기 운동’의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던 점은 우리 언론사의 자랑이다.

유재천은 개정판에서 <4장 언론노조와 편집권>을 새로 넣었다. 이 장에선 80년대 다시 살아난 언론노조 운동을 소개한다. 유재천은 1987년 10월 한국일보 노조가 결성된 이래 언론노조 운동이 ‘활기차다’고 해석했다. 개정판을 낼 1988년 7월말 현재 전국 27개 신문사와 방송사의 단위노조가 결성된 사실까지 조사했다. 당시 막 결성된 부산일보와 경남신문 노동조합이 단협 체결 과정에서 ‘편집권 독립’을 놓고 많은 진통을 겪은 것도 소개했다.

유재천은 한국에서 언론노조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12일 산별노조인 조선출판노조의 결성과 이 노조가 전평의 46년 9월 총파업 때 대동신문, 동아일보, 서울신문 등 무려 7개 지부가 신문발행을 중단하는 옥새파업을 벌인 것도 지적했다.

기자와 기자 아닌 자로 분절된 시각

여기서 유재천은 지식인의 분절적 사고를 드러낸다.
언론노조 구성원은 60년대까지 인쇄공무부문의 비전문직 블루 컬러가 주도했다. 70년대에는 기자 중심으로 조직됐다. 87년 이후엔 전문직과 비전문직이 공존하는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87년 이후 언론노조 운동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병행한다. (중략) 언론이 지니는 사회적 공기의 성격 때문에 일반노조의 투쟁방식을 언론노조가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 언론노조의 타 노조와의 연대투쟁이나 통일전선의 구축을 통한 투쟁은 한계를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관심이 있는 비전문직과 언론의 본분을 다 하는 데 이해가 일치되는 전문직 사이의 갈등이 언론사 조직의 본질이다. 지금처럼 전문직이 전체 노조 구성원의 40%에 못 미치는 경우 언론노조의 임무가 경제투쟁에 치우칠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다.

유재천은 신문사 노조를 윤전직 등 비전문직 조합원과 기자로 양분하고서 비전문직에 대한 몰이해와 폄훼를 드러나고 있다. 이후 언론노조의 역사는 유재천의 지적과 정반대로 비전문직이 너무 많아서 경제투쟁에 치우치기 보다는 오히려 지식인으로 구성된 전문직인 기자들이 공공성 확보나 정치투쟁보다는 경제투쟁에 더 치우쳐왔다.

언론운동의 최대 과제 ‘편집권’

언론운동에서 최대 과제는 단연 ‘편집권’을 둘러싼 논쟁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말을 처음 쓴 이는 고 임근수 교수다. 임 교수는 1964년 <편집권의 옹호와 독립>이란 논문에서 이 말을 사용했다.

유재천은 2년 뒤 “1966년 삼성의 한국비료가 사카린을 밀수입한 사건을 계기로 편집권 논의가 확대됐다. 전국의 매스컴이 보도하고 비판하는 속에 삼성재벌이 운영하던 동양방송과 중앙일보가 밀수사건을 합법화시키고, 타 매스컴의 보도를 역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재벌이 소유한 매스컴이 사회적 공기로서의 사명을 망각하고 재벌의 사익을 위해 봉사하는 전형을 보인 것으로, 강력한 여론의 지탄을 불러 일으켰다”고 설명했다.

유재천은 대통령의 말까지 인용해가면서 재벌과 언론의 분리를 통한 언론의 독점화를 우려했다. 유재천은 이 책에서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 직후 박정희가 발표한 담화문을 소개한다.

이번 삼성사건의 경우 밀수 행위가 분명하고 범법이 확실한 데도 불구하고 산하 언론기관을 동원하여 불법과 부정을 비호하는 데 급급한 듯한 인상을 준 것은 사회공기인 언론의 기본사명을 저버리고 이에 역행하는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중략) 이러한 폐단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나라에서 흔히 재벌들이 언론기관을 점유하려고 애쓰는 그 저의를 이해하기 곤란하여 만약 그 목적이 자기 개인의 이익만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언론의 공익성을 전혀 무시한 소치며 이 문제는 언론자유의 보장과는 전혀 별개의 성질의 것이고 또 이러한 규제는 다른 선진국에서도 선례가 있는 것으로 듣고 있다.

이어 정부는 정부는 <언론의 공익보장을 위한 법률안>을 만들어 편집권 독립을 명문화했다. 그러나 그 뒤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유재천은 그 이유를 “법안의 철회에 발행인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편집인협회이나 일부 회원들은 이 법안에 긍정적이었다고 생각된다”고 밝혔다.

‘편집권 독립’ 법제정, 조선일보는 찬성

이 법안에 대한 당시 정치권과 주요 신문사의 입장을 엇갈린다. 당시 야당은 경영과 편집의 분리원칙엔 찬성하나 하나만 경영하게 한 것은 기업의 자유에 대한 부당한 억압이라며 수정을 요구했다. 동아일보는 1966년 11월 12일자 사설에서 “편집권 독립이라 하면 원칙상 이상적인 듯 보이나, 현실에서는 허다한 문제점이 있다. 편집권의 독립이라는 방안은 추상적인 이름 아래 실지에 있어서는 경영과 편집의 불화를 일으킬 소지를 마련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주장하며 법안의 철회를 요구했다.

중앙일보는 1966년 11월14일자 사설에서 “매스컴의 미디어를 동시에 몇 가지 가지는 언론기관의 존재를 불허한다는 것은 기업집중에 의한 효율적 운영의 원리 그 자체를 부정하고 들어가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66년 11월 13일자 사설에서 편집회의 설치, 편집의 독립보장, 편집의 성실의무, 출자자의 공개모집 등 조항은 자유언론의 육성을 희구하는 견지에서 실로 획기적인 내용이라며 찬성을 표했다.

편집권 독립을 놓고 언론학자와 법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유재천은 이렇게 결론 내린다.

편집권의 귀속문제를 두고 논란을 거듭하고 갈등을 자초하는 것은 불필요한 낭비이다. 편집권은 사주나 이사회에 귀속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편집권이 사주나 이사회에 귀속될지라도 그것을 전단적 권리로 행사할 수 없는 것이다. 편집권을 전적으로 전문인들에 위임하는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필요하다. 요컨대 편집권 귀속의 문제가 핵심이 아니라 신문 제작과정에서 노동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 관건이다.

경영방침과 편집방침은 원칙적으로 별개일 수 없다. 그럼에도 경영과 편집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요청하는 까닭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직무수행상 역할분담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경영이 편집업무의 자율성을 침해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80년대 이후 신문산업을 관장하는 법은 80년대초 전두환 신군부가 만든 언론기본법이 시작이다. 언론기본법은 87년 정기국회때 만든 정간법으로 대체됐다. 이후 정간법은 노무현 정부때 지금의 신문법으로 다시 바꿨다. 유재천은 87년 당시 새로 나온 정간법을 이 책 <2부 언론의 윤리와 통제>에 ‘새 언론법과 언론’이란 제목의 글에서 뜯어 살폈다.

유재천은 “새 법(정간법과 방송법)은 언론자유 신장을 위해 한걸음 앞섰다고 본다. 그러나 실효성이 없었지만 언론의 자유를 위해 필요했던 <언론의 정보청구권>조항과 <취재원 보호>조항을 없앤 건 아쉬운 점”이라고 총평한 뒤 “(언론기본법에서) 독립시킨 방송법은 (중략) 몇 가지 제도적 개선이 있었다. 방송위원회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실질 권한을 강화한 점을 들 수 있다. 재벌 등의 방송 경영을 배제한 점도 들 수 있다.(방송법 제6조)”고 약평했다.

재벌의 방송 소유 배제를 주장했던 유재천

유재천은 정간법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면서 제6조의 시설 관련 규정에 대해 “타블로이드 2배판 4면 기준의 신문을 시간당 2만부 이상 인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윤전기와 대통령령이 정하는 부수 인쇄시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등록할 수 없게 한 부분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는 “대자본에 의해 발행되는 기존의 대신문들이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소수자의 의견이나 이익집단의 의견 및 권익을 대변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작은 신문이 등장할 소지가 없어지게 될 것이고 결국 이 조항은 기존신문의 기득권을 보호해 주는 장치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올바로 내다봤다.

유재천은 정간법에서 다음으로 큰 독소조항으로 제12조(등록취소의 심판청구 등)를 들었다. “문공부 장관에게 6개월 이하의 기간을 정해 발행정지를 명하게 한 것은 독소조항”이라고 지적했다. 유재천은 이 조항을 두고 “1947년 9월19일 정부 수립 직전 과도입법의원이 제정했던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법> 6조에 처음 등장한 이래로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는 점도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고 언급했다.

유재천은 당시 정간법에 모호하게 처음 들어왔던 언론 노동자의 편집활동 보장 조항인 제6조 2항에 대해 “발행인은 종사자의 편집 및 제작활동을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보다 명백히 규정했어야 옳았다. 막연한 조문만 보면 무엇을 위한 규정인지 알기 어렵다. 차라리 ‘보호’라는 용어 대신 ‘보장’이라 표현했어야 한다”고 첨언했다.

유재천은 한나라당의 미디어 법안을 놓고 요즘도 말썽이 일고 있는 소유구조에 대해서도 의미있는 해설을 덧붙였다. 유재천은 당시 정간법 제3조(겸영금지 등) 3항에 대해 “대통령령이 정하는 대기업 또는 계열기업은 일간신문이나 통신을 경영하는 법인이 발행한 주식 또는 지분의 1/2이상을 취득할 수 없다고 규정해 대기업이나 그 기업그룹의 신문이나 통신의 겸영을 금하고 있으나 그 실제 효력이 의심된다. 지분을 49%만 소유하고 있어도 실질 지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식이나 지분의 점유율을 더 낮추어야 마땅했다”고 설명한다. 지금은 한나라당 집권 하에 KBS 이사장이 된 유재천도 당시엔 미디어 공공성을 누구보다도 큰 목소리로 주창했다.

대통령과 정치권의 방송위원 선임도 비판했던 유재천

유재천은 1987년 제정된 방송법에 대해 “방송위원회를 설치했지만 독립성에는 크게 모자랐다”고 평가했다. 유재천은 공영방송이 정부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도록 하는 장치가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한 뒤 “새 방송법에는 방송위 구성을 12명의 위원으로 구성하고, 4명은 국회의원이 추천, 4명은 대법원장이 추천하고 나머지는 대통령이 임명한다. 따라서 새 방송법에서도 공공의 참여 기회가 배제됐다. 진정한 공영방송제도를 위해서는 다른 나라들과 같이 다양한 공공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방송위를 구성하는 것이 옳았다”고 더 많은 공공적 참여 보장의 아쉬움을 토로했다.

유재천은 “우리 공영방송의 문제점은 한둘이 아니다”라고 전제한 뒤 “공영방송이지만 시청률 경쟁하는 상업방송의 폐단도 있고 정부를 대변하는 국영방송 구실을 해왔다”고 당시 방송 현실을 개탄했다. 당시 제정한 방송법을 세부적으로 뜯어가면서 여러 문제점과 우려점을 지적했다.

이 점에서 유재천은 “방송위위원회를 최고의사 결정기관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지적한 뒤 위원 구성을 “각계 각층의 이익 대표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 위원 구성에서 국가권력의 영향을 배제하기 위해 대통령이나 정부기관이 지명하지 않도록 하여, 위원을 파견할 이익집단이 자율적으로 대표를 선출하여 추천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유재천의 이 올바른 지적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여전히 대통령과 집권 여당이 위원의 과반 이상을 뽑고, 최근엔 위원회식 의결기관이라기 보단 대통령 직속의 독임제 기관으로 퇴행하고 있다.

유재천은 이 책 <3부 언론의 기능과 역기능>에 ‘한국 신문을 말한다’는 제목의 글에서 “해마다 연말이나 연초가 되면 근로자의 임금 인상폭을 놓고 근로자측과 사용자측이 각각 자신들이 주장하는 적정선을 제시한다. 어떤 신문은 사용자 주장만 보도하고 근로자 의견은 아예 취급조차 않는다. 근로자의 날에 열리는 기념식이나 노총 대의원대회 기사도 정부 기념사는 대대적으로 실으면서 노총 대의원대회의 결의사항은 제외하는 신문도 있다”며 이런 신문의 보도를 ‘공정의 원칙에 충실하지 못한 사례’라고 지적했다.

사회적 약자 위해 누구보다 큰 목소리 냈던 유재천

1981년 1월부터 중앙 일간지들은 기존 8면에서 12면으로 증면했다. 신문은 오랫동안 증면을 요청해왔다. 폭주하는 정보를 8면에 도저히 소화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증면 후 오히려 대중문화 중심의 읽을거리 기사만 대폭 증가했다. 유재천은 이런 선정적인 보도의 남발을 비판하면서 “여대생 박상은 양 살해보도에선 시체에 남은 이빨 자국이 몇분전의 애무의 결과라고 하거나 정액이 어떻고 하는 것까지 실었다”며 신문의 말초적 보도태도를 지적했다.

나아가 유재천은 ‘사설 무용론’까지 주장했다. 천편일률적인 각 신문의 대동소이한 사설 내용을 꼬집은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신문들이 권위주의 정치권력의 억압 등의 이유로 모호한 표현만 늘어놓는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의 사설을 내놓는 경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유재천은 신문이 “안팎의 눈치를 보고 그저 무난한 논제를 다루는 경향도 있다. 나라 안의 시급한 문제는 덮어두고 국제적 분규를 사설의 논제로 선정하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와 거의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문제다. 문제되지 않는 소재를 골라 그저 의례적인 시사 해설 정도로 사설란을 메우려 한다”고 비판했다.
태그

방송 , 언론 , 공공성 , 신문 , 미디어 , 유재천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이정호 기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