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 환멸과 열정의 쇼

[배고프다! 영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더 레슬러, The Wrestler, 2008>

  더 레슬러, The Wrestler, 2008

<<글쓴이 고프 (Ghope)는 2006년 경향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했다. 최근 2년간 관악 공동체 라디오에 영화평을 연재했다. 앞으로 본지를 통해 영화에 대한 글을 써 나갈 예정이다. - 편집자 주>>


시인 허수경은 어느 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제 몸보다 더 큰 배터리를 동여맨 라디오”에 비유한 바 있다. <혼자 가는 먼 집>에 실려 있는 시의 일부이다. 같은 시집에서 평론가는 허수경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를 초경과 폐경을 동시에 치른 여성으로 묘사한 바 있다. 비슷한 맥락이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혼자 가는 먼 집>에서의 허수경을 ‘술에 취한 판도라’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삶의 밑바닥을 열어 보았고 삶이라는 상자 속에서 튀어 나오는 천변만화한 것들을 쓰다듬으며 빈 속에 술을 쏟아 부었던 것 같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가 그러했듯 삶에도 마지막에 무언가 건질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혼자 가는 먼 집>의 마지막 시는 (아마 기억이 맞다면) “무망 속으로 환하게”라는 구절로 끝맺는다. ‘바라는 것 없는 환함’은 <더 레슬러>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정확한 주석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더 레슬러, The Wrestler, 2008>는 인생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 상자를 닫기 전, 마지막으로 질문한다. 무엇이 우리를 환하게 만드는가?
인생의 절정에 올라 모든 명예를 누렸던 퇴물 레슬러의 비상, 심장부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랜디잼이라는 필살기는 그의 일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두드려도 대답이 나오지 않는 생을 향해 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왔다. 가능한 높이 뛰어올라 가장 높은 곳에서 추락하기를 반복했다. 일생을 관통하는 바닥과 심장의 충돌, 결국 심장이 터져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한 인생의 말엽에 랜디가 얻은 것은 작고 초라한 자신의 세계이다. 과다한 약물 복용으로 지쳐버린 몸, 노쇠한 신체, 마트에서의 단순 작업 이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무능력, 사랑하는 딸에게 제대로 사랑조차 표현해보지 못한 못남, 어긋나는 사랑. 영화 속의 랜디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환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삶 어디에도 생을 사랑했던 구석이나 생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구석을 찾기 힘들다. 이렇듯 가혹한 삶은 캐시디가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소개하면서 사용했던 문장을 통해 다시 확인된다.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박해를 당해요.” 과거의 영광이라는 가시관을 두른 랜디는 지금 인생에 의해 박해를 당하는 중이다. 돈은 없고 딸은 아버지의 심장병에도 동정심을 느끼지 않으며 사랑하는 여인은 손님과 종업원의 관계 이상을 원하지 않는다.


랜디가 보여주는 레슬링은 진정 캐시디의 언급처럼 쉬지 않고 스스로를 박해하는 육체들의 향연이다. 레슬링이 쇼라고 하나 레슬러들의 고통은 쇼가 아니다. 극적 긴장감을 위해 준비했던 면도칼로 스스로의 이마에 상처를 내고 서로의 머리를 의자로 내리치고, 상대방을 쇠철망에 내던지면서도 무대의 뒤에서는 서로에게 최고의 플레이였다며 칭찬을 해주는 향연. 자신과 파트너의 고통을 향해 열광하는 관중들을 위해 더 큰 고통을 준비하는 환멸의 쇼. 이러한 랜디의 레슬링은 캐시디의 스티립쇼와 평행교차한다. 젊은 남자들로부터 야유를 받는 늙은 여인의 몸이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흐물흐물 녹아내릴 때 슬픈 육체들의 향연은 환멸의 통로를 통과한다. 그러나 설혹 그것이 환멸에 이르는 길이라 해도, 랜디는 이 터널을 벗어나지 않는다. 비유적으로 묘사된 바, 랜디가 링에 오르기 위해 통과하는 좁은 통로와 문은 그가 자신의 내부로부터 벗어나 세계로 향해 나가는 통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알 수 없는 람진스키가 랜디가 되는 순간, 관객들의 함성을 수혈 받아 다시 태어나기 위해 통과하는 기나긴 자궁.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나의 세계”, 사각의 링. 그것은 오직 자신의 세계를 가진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열정의 시간이기도 하다. 만약 랜디의 삶이 환멸이었다면 그것은 과다한 약물 복용과 노쇠, 무능력, 못남 때문이다. 그러나 랜디가 과다하게 약물을 복용하고 노쇠를 견디며 마트에서의 돈벌이를 외면하고서라도 매달리고 딸과의 사랑을 돌볼 겨를조차 없었을 정도로 레슬링은 랜디에게 소중했다. 비록 전투게임에 밀려 그 흥미로움을 잃어가는 레슬링 게임이지만 랜디는 레슬링 게임을 사랑한다. 변해버린 세상, 이종격투기 같은 세상에서 레슬링을 사랑하는 것은 때로 시대착오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착오는 동시에 자기 시대에 대한 깊은 사랑이기도 하다. 커트 코베인을 비롯한 모든 뮤지션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건즈 앤 로우지즈의 음악과 80년대를 최고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중요한 것은 레슬링과 세계가 랜디에게 남겨 놓은 환멸이 아니라, 랜디로 하여금 그러한 환멸조차 사랑하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이냐일 것이다. 레슬러로서의 열정, 신체가 파괴되어도 지키고 싶은 레슬러의 정신. 서로의 부상을 걱정하며 서로의 몸에 상처를 새겨 고통을 교환하는 동료들. 랜디를 랜디이게 만드는 랜디의 전설, 몸의 상처.


그러니 인생은 열정과 환멸의 쇼이다. 심장부터 떨어지는 고통을 참고 필살기를 날려 완성시켜야 하는 환멸의 쇼. 몸보다 큰 배터리를 매야 하는 라디오는 힘들지만 쉬지 않고 음악을 토해낸다. 라디오를 라디오로 만드는 것은 배터리의 크기가 아니라 음악을 내보낸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이라는 것에 숨어 있는 본질을 발견한 사람에게 배터리의 크기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에게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의 크기가 문제였다면 그는 예수가 아니었을 것이다. 랜디는 일생 동안 삶의 의미조차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그저 영리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결코 닮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주는 영광은 이제 없어졌지만 아직 그는 레슬링이라고 하는 언덕을 오르는 중이다. 그러나 이런 삶이 결국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무망의 환함, 슬플 것도 분노할 것도 없는 담담함으로 사소한 것들을 향해 옮겨가며 새겨지는 발자욱. 랜디와 캐시디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라는 쇼를 치르고 얻어내는 것은 사소한 것들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아들, 앞서가는 아빠를 향해 달려들어 팔짱을 끼는 딸, 소중한 사람의 옷을 사기 위해 동행할 수 있는 연인.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는 노력들이 모이는 목적들의 왕국. 그러나 인생은 이 사소한 것들이라고 해서 언젠가 얻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 또한 없는 잔혹한 매치이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중단하지는 않는다. 삶이 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삶에게 답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영화는 랜디의 비상을 보여주었지만, 이것이 ‘마지막’ 비상이 될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영화가 보여주는 그 너머에 삶이 있다. 언제나 그랬다.


by(e) Gho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