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르푸에서의 변신

디아스포라 이경옥 이야기③

올해로 쉰둘인 이경옥. 그가 미혼인지 기혼인지, 기혼이라면 자식이 있는지 없는지, 지금 홀로 사는지 아니면 친구나 가족과 사는지, 묻지도 않았고 물을 용기도 없었다. 그저 지금 눈앞에 있는 그대로의 이경옥을 바라보는 일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진짜로 저의 꿈은 현모양처였어요. 결혼해서 애 낳고 시부모님이랑 알콩달콩 사는 게 목표였는데, 그게 한순간에 무너졌어요. 저희 남편과 갑작스럽게 사별을 하고…….”

이경옥의 현모양처 꿈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남편과 사별하기 전까지는. 이경옥은 스물다섯에 중매로 남편을 만났다. 선을 본지 40일 만에 결혼을 했다. 자신의 소망처럼 시부모를 모시며 ‘알콩달콩’ 결혼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아이엠에프 때 직장을 정리하고 조그마한 식당을 운영하던 남편이 갑작스레 뇌출혈로 쓰러졌다.

  참세상 자료사진

“석 달 동안 중환자실에 있었어요. 집에서 티브이 보다 쓰러졌거든요. 우황청심환 가져와라. 좀 이상하다 생각하며 약을 갖다 줬는데 벌써 사지가 뒤틀려서……. 119 불러서 병원으로 갔죠. 산소 호흡기를 끼었는데 이미 늦었어요. 식물인간이 되었죠.”

그렇게 석 달 동안 남편은 말 한마디 않은 채 무심히 누워만 있었다. 의사마저 잘못하면 재산을 다 탕진한다고, 알거지가 된다고, 빨리 포기하지 않으면 가족도 다 죽는다고 했지만 이경옥은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꿈꾸는 줄 알았어요. 드라마 찍는 줄 알았어요. 현실이 아니라 생각했죠. 너무 기가 막혀 가지고……. 주위에서 포기해라 그러면 난 포기 못한다, 너 같으면 포기하겠냐! 하여튼 해보는 데까지는 해보려고 했어요. 그렇게 석 달을 살았어요. 석 달 살면서 우리가 마음에 정리를 한 거지요. 그 석 달의 시간이 없이 남편이 떠났으면 아마 제가 미쳤을 텐데……. 서로 이별의 인사를 나눈 거죠. 어느 날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나는 남편 상태가 좋아져서, 사람이 깨어난 줄 알고 뛰어갔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 기간이 저한테도 그렇고 우리 애들한테도 그렇고, 아무튼 가족들이 편안히 남편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죠. 그래서 제가 아직 살아있는 거예요. 겉으론 멀쩡하게 보이지만.”

이경옥의 얼굴에서 이제껏 찾아볼 수 없었던 과거가 흘러 나왔다. 지난 오백일 동안 이랜드 집회에서 스치듯 봐온 이경옥은 집회장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여유 있고, 평온하였다. 그는 참 행복해보였고 구김 없이 살아온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의 눈물도 예외였듯이 그의 지난 세월도 뜻밖이었다.

남편과 사별하자 이경옥은 눈물을 흘릴 여유조차 없었는지 모른다. 한참 커가는 딸과 아들, 그리고 시부모, 자신까지 다섯 명의 생계가 그의 어깨에 한순간 툭 하니 떨어졌다. 1년 가까이 남편이 하던 식당을 친정어머니의 손을 빌려 운영을 해보았지만 신통치가 않았다. 설날 추석날 이틀 말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가게 문을 열었지만 손에 쥐어지는 것은 없었다. 이경옥은 영세자영업자는 돈을 못 번다는 결론을 당시에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식당을 접고 찾아간 곳이 까르푸다. 생활정보지에 난 구인광고를 보고.

“2000년 1월 17일 날 까르푸에 입사했어요. 까르푸 중계점이 만들어질 때요. 대부분이 비정규직으로 채용되었는데, 저는 몇 안 되는 정규직으로 채용되었어요. 직접식품 신선코너에서 일했고 제가 샐러드 샌드위치 담당 조장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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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옥은 지난 시절을 이야기할 때 연도뿐만 아니라 날짜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한다. 세세한 시간까지 말하기도 한다.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이 이경옥의 가슴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거다. 아니 밤마다 지울 수 없는 순간을 자신의 마음속 서랍에서 꺼내 뒤적이는지 모른다. 일기장에 숱하게 되풀이하여 적고 있는 걸까.

우연찮게 노사협의회 빈자리가 생겨 ‘땜방’으로 노동자 측 위원이 된 이경옥은 첫 회의에 들어가서 ‘이건 뭐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다. ‘땜방’으로 참여한 그날의 회의가 자신의 인생에 ‘화근’이었다고 회상했다.

“노측 위원 자리가 빈 거예요. 사내 총무부장이 저를 지나가다 보면서 너 노사협의회에 좀 들어와라, 이게 화근인 거죠. 그래갖고 제가 노사협의회를 들어갔죠. (회의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보니까 통보야. 맨날 노동자한테 일방적인 통보식이야. 이건 뭔가 잘못됐다. 노사협의회는 들어가 봤자 아무런 해결방법이 없다. 그런 이야기를 직원들한테 계속 했죠. 직원들이 제가 위원이라고 저한테 이걸 해결해 달라 저걸 요구해 달라 해서 (그 제안을 가지고) 들어가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노동조합과 노사협의회가 뭐가 다른가를 계속 고민을 했었고. 4월 달이면 까르푸는 임금인상을 하는데, 막 소문이 나는데 올해 임금인상액이 1만 2천 원인가 얼마래요. 기본급 1만 2천 원 그랬나? 누구 맘대로 결정하나. 지들 맘대로 1만 2천 원이냐. 해주고 싶으면 멋대로 해주는 거야, 열이 받더라고요. 그러면 내 월급이 해마다 1만 2천 원씩 오르면 십년 되도 월급이 얼마냐? 이게 계산이 딱 떠오르니 암담해지더라고요.”

까르푸에는 이경옥이 입사하기 전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져 있었다. 결성한지 6년이 지났건만 단체협약도, 상근자도, 조합 사무실도 없는 노동조합. 남자 직원들로 꾸려졌는데 자신들의 승진승급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말도 있었다.

이름뿐인 노동조합에 이경옥은 가입을 했고, 노동조합다운 조직을 만들기 위해 일을 했다.

“노조 만든 지 5년인가 6년 되었는데 무단협이래. 단협이 없데. (노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야. 말발도 없고. 그래서 그때부터 교육도 받고 했어. 민주노동당 노원지구당 찾아가서 당원 가입하고 (노동조합 하려는데) 도와달라고 부탁도 하고. 그해 겨울에 투쟁기금 마련한다고 주점도 하고 별짓을 다 한 거예요. 그 다음 해에 교섭신청을 하니 회사가 콧방귀도 안 뀌죠.”

이경옥은 근무시간이 끝나면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조합’의 전임 활동가로 화려하게 변신하였다. 이젠 가장으로 살아야 하는 이경옥.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했고, 가족도 자신이 지켜야 했다. 당연히 자신의 일터도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결심했다.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일터가 아닌 희망이 보이고 신나는 일터를 만들려고 열나게 뛰었다.

이경옥은 까르푸 해운대 지부 창립식에 갔다는 이유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기도 했다.

“근무 스케줄을 상사한테 보고 안하고 (해운대 지부 창립식에) 갔다는 거죠. 징계위원회에 들어가서 글쎄 무슨 말이냐? 매장에서 일상적으로 펑크만 안 내면 자율적으로 우리가 다 스케줄을 변경해가지고 일을 했었는데, 왜 나한테만 (보고할 의무가) 적용 되냐? 프랑스 점장이랑 맞대고서 눈 부라리고 싸우고 그랬어요. 저도 놀랬죠. 너무 열 받으니까 프랑스 점장이랑 맞대응하고 눈 똥그랗게 뜨고 막 부장들이 뺑 둘러 앉아있는데도. 안중근의사 같더라고요, 제가. 안중근이 취조 받을 때 그 사진이 언뜻 떠올라요. 한쪽에서 불어로 계속 통역하면서 이야기하는데, 나는 맘대로 하라고, 니가 이러면 부당징계 구제신청 할 거구, 끝까지 싸울 거라고.”

일제강점에 맞선 독립투사의 마음으로 이경옥은 노동조합을 했는지 모른다. 빼앗긴 조국을 찾는 마음으로 빼앗긴 노동자의 권리를 찾으려고 밤낮없이 노동조합을 위해 뛰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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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옥 스스로도 자신의 변화에 깜짝 놀란다.

“제가 되게 온순했거든요, 살아온 게. 진짜 온순하고 편안하게 살아왔어요. 어디 가서 큰 소리를 내거나 그런 적이 없어요. 저희 아버지는 항상 여자가 큰 소리 내면 안 된다, 잇몸을 내놓고 웃어도 안 된다, 사람은 겸손해야 된다, 느긋해야 된다, 이런 걸 주입식으로 교육해서, 저는 항상 그걸 되뇌면서 살았던 사람인데……. 그게 까르푸 들어오면서 바뀐 거예요.”

이경옥은 노동조합을 하며 자신의 몸 안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이경옥을 찾게 되었다. 2002년 5월 조합 간부 10명이 결의하여 파업에 들어갔다. 300일을 싸워 노조가 만들어진지 8년 만에 단체협약을 체결하였다. 파업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이경옥을 포함하여 세 명뿐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해고자였다. 그리고 한 달 뒤에 다시 까르푸 중동점이 파업에 들어간다. 물론 이경옥도 파업에 참여했다. 여기서 이름도 엇비슷한 한 남자를 만난다. 김경욱. 이랜드일반노동조합 위원장을 맡으며 500일 파업을 이끌었던 주역. 이경옥과 함께 ‘아름다운 희생’의 주인공이었던.

이경옥과 김경욱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2007년 이랜드 노동자의 투쟁이 가능했을까? 물론 잘못된 가정인 줄은 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예사롭지 않다. 예사롭지 않는 이들의 만남은 한국노동운동에 ‘비정규직’ 화두를 정면으로, 그리고 처절한 몸부림으로 던졌다.(계속)
덧붙이는 말

오도엽 작가는 구술기록작가로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의 구술기록작업을 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소중한 목소리를 찾고 있습니다. 기록하고 세상에 널리 알려야 될 일이 있는 분은 참세상이나 메일(odol@jinbo.net)로 연락을 하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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