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권을 기각당한 우리들에게

[인권오름] 제약회사에 생명을 저당잡힐 이유는 없다

지난 6월 19일, 특허청은 에이즈치료제 푸제온에 대한 강제실시 청구를 기각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한 장짜리 문서에 담긴 문구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도 없고 실감도 나지 않았습니다. 퇴근을 하고 집에 오는 길에 몇몇 분들과 전화를 하면서 그게 무슨 소리인지 실감이 나더군요. 그리고는 전화기너머로 들리는 여러분들의 목소리에 켜켜이 담긴 분노와 강제실시 청구를 하면서 낳은 긍정적인 면을 부여잡고자 하는 마음을 전해 듣고 울다 잠이 들었습니다.

로슈가 짓밟은 생명들과 약값

2003년에 미국에서 에이즈 신약 ‘푸제온’이 출시되었을 때도 비싼 약값 때문에 사회단체의 항의가 있었지만, 비싼 약값이 에이즈환자의 치료와 지원에 장벽으로 작용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그렇게 빨리 이 땅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2004년 11월에 푸제온이 한국에서 보험등재가 되었지만 초국적 제약회사 로슈는 약값이 마음에 안 든다며 아예 약을 공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대표인 윤가브리엘이 기존의 에이즈치료제에 내성을 보였습니다. 한국에 공급되고 있는 약으로는 더 이상 치료의 진전이 없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그러고도 그는 대견하게 2년을 버텼습니다. 2006년 8월에 캐나다에서 열린 국제에이즈회의를 참가하고 돌아오자 그는 바로 입원을 했고,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부랴부랴 울며불며 푸제온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았고, 다행히 미국에 있는 Aid for AIDS란 단체로부터 무상으로 푸제온을 받게 되었습니다.

로슈는 2005년에 약가인상을 해달라고 복지부에 요구했다가 약값을 올려줄 이유가 없어 기각당하고도 다시 2007년에 약가인상신청을 냈습니다. 치료에 필수적인 약이지만 2008년 1월에 약가협상이 결렬되어 공급여부가 여전히 불투명했지요. 가브리엘은 다행히 푸제온을 구해 건강이 나아졌지만 ‘생명에 요행을 바랄 수는 없다’고 말했지요. 그래서 요행이 아니라 보장받아야 할 권리로써 의약품을 이용하기 위해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약은 사기업의 상품이라는 복지부의 답

로슈가 또다시 약가인상 신청을 한 걸 받아들인 복지부에 찾아갔습니다. 복지부는 ‘보험등재 고시에도 불구하고 업체의 상업적 이유로 계속 공급을 하지 않은 채, 수년간 몇 차례에 걸친 가격 인상 시도를 수용할 경우 바람직하지 않은 선례가 될 수 있으므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였다’고 약가협상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푸제온이 다른 에이즈치료제와 비교하여 고가이고, 혁신성을 인정할 근거가 없는 바, 약가 인상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했답니다. 즉, 근거도 없이 약가를 인상해줄 경우 건강보험재정의 낭비를 초래하고 약가제도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것이지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뿐이었습니다.

복지부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사기업의 ‘상품’을 강제로 공급시키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복지부는 로슈가 원하는 대로 약값을 올려주든지, 강제실시를 발동하든지 2가지 방법밖에 없다며 의약품, 의료보험제도와 관련된 법상에 의약품의 공급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 없음을 시인했습니다.

특허의약품에 대한 강제실시는 특허권자의 사익과 공공의 이익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특허제도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조치로 특허권자만 독점 생산할 수 있는 약을 제3자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권리입니다. 특허남용으로 사람이 죽어갈 때 그 폐해를 막기 위해 있는 제도입니다. 로슈에게 로열티를 주는 대신 우리에게도 푸제온과 똑같은 약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태국이나 브라질정부가 에이즈치료제를 비롯한 필수약제를 건강보험체계 속에서 공급하기위해 강제실시를 발동했던 것처럼, 복지부가 책임을 다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그렇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푸제온은 어떻게 되는 거냐, 에이즈환자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기자들이 묻자 복지부에서는 이렇게 답을 했다지요. ‘푸제온이 필요한 환자는 1명밖에 없더라’고. ‘나 여기 있소’, ‘내가 왜 죽어가나요?’라는 말도 못한 채 꺼져가는 생명을 부여잡고 있던 100여명의 환자들을 두고 말입니다. 우는 아이 젖 준다고 했던가요? 그럴거면 헌법에 왜 건강할 권리와 국가의 책임이라고 명시해둔건가요? 우리가슴에는 큰 멍이 들었습니다.

환자가 죽더라도 약값은 내릴 수 없다는 특허독점의 위력

그래서 왜 푸제온이 그다지도 비싸야하는지 듣기위해 로슈사장을 만나러 갔습니다. 작년 7월 4일이었습니다. 로슈는 모언론에 “의약품 공급에 관한 문제는 해당 국가 국민이 해당 의약품을 구매할 능력이 되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연간 2200만원으로 푸제온을 구매할 능력이 없는 환자들은 푸제온을 사용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냐고, 우리가 왜 1년에 2천200만 원을 내야만 하는지 우리를 납득시켜보라고 했습니다. 로슈 사장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2가지 자료를 던져주었습니다. 하나는 세계은행에서 전 세계 국가를 고소득, 중간소득, 저소득 국가로 분류한 자료와 2008년도 건강보험 재정현황표였습니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같은 고소득국가로 분류되어있고, 건강보험재정이 바닥나지 않았으니 선진 7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 일본)의 가격을 기준삼아 약값을 정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200만원 미만으로는 절대 공급 못 한다는 말을 던지고는 나가버렸습니다. 특허로 보장된 독점의 위력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왜 2200만원인지는 따지지도 묻지도 않아도 되는 것, 구매력이 없는 환자는 푸제온을 이용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이 특허권이었습니다. 그 날은 뇌가 없어진 것만 같았습니다. 국가도 국민의 생명을 버린 마당에 빽도 없고, 돈도 없고, 말도 안 통하니 어찌해야할지 막막했습니다.

특허제도와 약가제도의 폭력에 맞선 노력들

특허로 보장된 독점을 악용하여 근거도 없이 비싼 약값을 요구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공급을 거부하는 일이 글리벡, 푸제온, 스프라이셀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점은 한국의 특허제도와 약가 제도 때문이므로 우리는 망연자실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하였습니다. 태국복지부 산하 연구기관에서 오신 분들을 만나 미국정부와 초국적 제약회사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7가지 치료제에 대해 강제실시를 실행했던 태국의 경험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의 에이즈환자와 활동가들에게 건강할 ’권리‘를 구매력에 따른 ’자격‘으로 취급하는 로슈의 횡포에 대해 알렸습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로슈규탄 국제공동행동‘에 동참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로슈 창립일인 10월 1일부터 각국에서 로슈에 항의전화 캠페인, 로슈앞 시위 등을 벌이고, 프랑스, 영국, 벨기에, 미국, 러시아, 프랑스, 카메룬, 남아프리카공화국, 잠비아, 말라위,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 호주, 스리랑카, 베트남 등 세계 각지의 단체 및 개인들이 ’살인을 중단하고 푸제온 공급(Stop Killing and Give Us Fuzeon!)‘을 촉구하는 국제공동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오히려 강제실시 청구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글리벡 강제실시 청구가 기각된 경험이 있는 우리로서는 참 많은 고민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미FTA협상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지적재산권하면 껌뻑 죽는 한국정부입니다. 몇 년 전 액트업파리(ACT UP-Paris)의 한 활동가가 그랬었지요. 한국정부는 맹목적으로 친미적이라 환자의 생명을 위해 강제실시를 제대로 활용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요. 복지부에 팽 당하고 로슈가 버린 생명이었기에 우리는 유일하게 남은 방법인 강제실시를 작년 12월 23일에 청구하였습니다.

로슈마음대로 프로그램, 무상공급

강제실시를 청구한지 2달이 지날 무렵 로슈 본사는 한국에서 ‘동정적 접근 프로그램(compassionate access programme)’을 시작한다고 통보했습니다. 푸제온을 무상으로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네들은 참 쉽습니다. 4년이 넘도록 공급안하더니 강제실시를 청구하니까 이름도 근사하게 ‘동정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약을 줍니다. 전 세계적 독점가격을 유지하기위한 임시방편일 뿐이지만 ‘특허에 의한 살인’에 맞설 수 있는 합법적 방법인 강제실시를 막는 그네들의 참 손쉬운 방법일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비참했습니다. 그네들은 우리의 생명을 쥐락펴락 하는 게 그렇게 손쉽다는 사실에 원통해서 술인지 눈물인지 모르고 마셨습니다.

강제실시의 필요성을 인정한 인권위의 의견도 무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푸제온 강제실시를 허용하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국민의 건강권과 생명권 보호를 위한 국가적 의무에도 부합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특허청은 강제실시를 기각했습니다. 특허청은 ‘푸제온은 일부 후천성면역결핍증환자치료에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 환자의 생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므로 푸제온의 공급을 위한 조치는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입장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푸제온을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강제실시를 기각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푸제온을 공급할 수 있는지 답을 해야 앞뒤 말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로슈가 현재 무상공급 하고 있어 일단 환자의 의약품 접근권 문제가 해소되었다는 점, 청구인이 푸제온과 똑같은 약을 어떻게 생산, 공급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을 기각사유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상공급은 로슈가 스스로 밝혔듯이 ‘임시적 조치’에 불과하며 로슈의 이익을 위해 언제 끊길지 모르는 그야말로 ‘로슈마음대로 프로그램’입니다. 그러나 글리벡 강제실시 청구 당시에도 인도 모 제약사의 모 의약품을 얼마에 공급할 수 있다는 구체적 계획이 제시되었을 때조차도 강제실시는 기각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특허청은 ‘기각을 시키기 위해’ 갖가지 사유를 갖다 붙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에서 ‘생명권’이란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다 결국 쓰레기통으로 버려진 바람 빠진 공 같습니다. 하지만 건강보험료만 내면, 좋은 약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처럼 말하던 한국정부의 겉모습은 우리들의 싸움으로 양파껍질 벗겨지듯 속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약가협상이 결렬된 것은 약가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로슈 때문입니다. ‘묻지마 근거’가 통했던 것은 유일하게 푸제온을 공급할 수 있도록 독점권을 보장한 특허제도 때문입니다. 복지부와 특허청은 ‘사람 죽이는’ 제도를 만들었고, ‘사람 죽이는’ 로슈를 옹호한 것입니다. 길다면 긴 과정을 되돌아보며 곁에 있는 여러분들을 봅니다. 가브리엘이 그리고 우리들의 생명이 제약회사에게 저당잡혀야 할 이유가 없음을 다시금 되새겨봅니다.
덧붙이는 말

권미란 님은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