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이수호의 잠행詩간](82)

참 좋은 일입니다
이렇게 편안하게 아침을 맞는 일
인터넷 없는 또 다른 천국에서
오랜만에 볼펜을 굴려 편지를 씁니다
햇살 한 줌 비치지 않는 철창 안이지만
싸늘한 새벽 공기는
희미한 불빛 아래서도
너무도 신선합니다

이틀만 곡기를 끊어도
이렇게 속이 편안한 것을
우리는 그동안 너무 복잡하게, 요란하게 산 것 같습니다
좀 덜 먹고 좀 덜 마시고
좀 덜 말하고 좀 덜 뛰어 다닐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세상일이 그런 것 같습니다
하루라도 안보면 미칠 것 같던 연속 드라마도
며칠 뒤에 봐도 줄거리 따라잡는데 아무 문제가 없고
내가 한번 빠지면 돌아가지도 유지되지도 않을 것 같은
조직도 직장도
일주일이나 몇 달 쯤
아니 어쩔 수 없는 일로 내가 아주 못나가도
끄떡없이 잘 돌아가니까요

병인 것 같습니다
아니면 중독이거나
중독도 병이니 결국 그렇군요
우린 뭔가에 중독된 중증 환자들입니다
결국 인류의 진보는
각종 병의 진보인 것 같습니다
그 진보병의 숙주 노릇을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고 불쌍할 따름 입니다

내 속에 병을 키우며 살면서도
그것이 병인지조차 모르고
딴에는 최고로 잘산다고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요

오늘 아침 철창 안에서
아침을 맞으며
오랜만에 또 다른 평안을 맛보는 것은
그 또한 진화된 인류의 또 다른 병 인가요
눈 감으니
자작나무 노란 잎을 흔드는 바람소리
깊은 계곡 물소리도 들립니다

*광진경찰서 유치장에서 맞는 이틀째 아침이다. 우리 잡혀간 다음날 범대위 실무자 여덟 명을 또 잡아가두었다니 오늘은 또 누구를 잡아 가둘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