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일 파업보다 경찰조사가 더 힘들었다”

[미디어충청] 갖은 수모 겪었다는 쌍용자동차 조합원

쌍용자동차 77일 파업이 끝난 지 100일이 넘었다. 그러나 파업과 관련한 경찰조사는 끝나지 않았고, 이와 관련된 질문만 하면 말을 아끼는 파업참가자들이 많다. 대개 경찰조사 과정이 상처로 남았거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파업에 끝까지 참여했던 이씨(가명) 역시 그 중 한 사람이다. 이씨는 경찰관에게 77일 파업보다 조사 과정이 더 힘들다고 말했단다. 또한 기억을 되짚으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단전, 단수, 가스 차단, 소화전 차단, 경찰-임직원-용역의 투입… 사람이 없었던 전쟁터와 같았던 평택공장안에서의 삶보다 경찰조사가 더 힘들었다는 이씨.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첫 술을 건넬 때 받아라. 세 번까지 가면 벌주가 된다”

“조사 전에 조사실 밖에서 차를 마셨다. 경찰관은 ‘첫 술을 건넬 때 그때 받아라. 세 번까지 가면 벌주가 된다’고 말하며 조사가 아닌데도 차차 말을 시켰다. 조사받는 내용이 아니니까 나는 듣고만 있었다. 대화 중간 중간에 ‘관여하지 않았냐?’ ‘혹시 했냐?’고 하다가 결국 ‘너 거기서 한 거 아니냐’고 끼워 맞췄다. 안 했다고 했는데도… 처음에는 컴퓨터로 치면서 조사 받은 것도 아니고 A4 백지 한 장 놓고 했다. 또 유성으로 찍은 공장도면 사진 보여주면서 있었던 위치를 표시하라고 했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거짓말 탐지기도 사용한다고 했다.”

이씨는 조사 전부터 경찰관의 태도에 기가 질렸다. 5번 넘게 조사를 받았고, 심야조사를 받기도 했다. 심야조사 동의서를 요구하는 경찰관의 말도 인상적이다. 경찰관은 “인권에 안 좋으니까 동의서에 사인을 해야 한다”고 말했단다. 경찰서 안에서의 인권의 문제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던 것이다. 경찰관은 매번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고, 이씨와 관계되지 않은 것들도 물었다. 때론 친한 동료의 사진을 보여주며 행적을 묻기도 했다.

“모른다고 해도 반복적으로 물었다. 조사를 받다 보면 너무 위축된다. 매일 일만 하던 사람이 경찰서 간 것이 처음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죄인도 아닌데 처음부터 죄인으로 몰아가고 위협적인 말을 하니까. 어쨌든 이 싸움이 100%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남기진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생존을 위해서 투쟁했다. 그런 우리가 자랑스럽다. 동료들 간의 끈끈한 동지애와 정을 느꼈고… 그런데 죄인 취급하고 욕설을 퍼붓다니”

죄인 취급하고, 욕설을 퍼부은 것은 기본이었다. 유치장으로 넣겠다거나, 무급휴직 대상자에 넣어주지 않겠다는 협박도 일삼았단다. 쌍용차 파업이 끝난 뒤 무급휴직에 넣어준다는 경찰의 감언이설에 속아 거짓 진술을 한 노동자는 자살 시도를 해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기도 했다.

“처음엔 좋게 말하다가 제가 모른다고 하면 유치장으로 보내겠다고 겁을 줬다. 무급휴직으로 협박한 것은 물론이고… 경찰관은 ‘77일 동안 공장안에서 있었던 게 더 힘드냐? 수사 받는 게 더 힘느냐?’고 물었다. 나는 수사 받는 게 더 힘들다고 했죠. 그게 더 힘들었으니까. 목욕탕에 갔는데 스트레스를 받아 몸무게가 2킬로그램이 줄었더라. 그렇게 시달림을 당하니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희망퇴직 쓸 걸, 파업 중간에 나올 걸, 내가 왜 해고자가 되어서 이렇게까지 힘들어야 하나. 차라리 죽어버릴까… 조사 받는 꿈도 많이 꿨다.”

“부모님 앞에서 조사받자. 핸드폰 비밀번호 풀어라”

이씨가 인터뷰를 하며 눈물을 글썽였던 대목은 경찰관이 부모님 앞에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며 협박했던 일이다. 경찰관은 이씨를 차에 태우고 내비게이션으로 이씨의 주소까지 찍었다. 그렇게 차에 태운 채 경찰관은 계속 조사를 감행했다.

“첫 날은 ‘부모님 앞에서 맹세할 수 있냐?’며 자기가 부모님을 데리고 올 테니까 그 앞에서 조사를 받자고 했다. 가뜩이나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쳐서 마음이 안 좋았는데 미치겠더라. 다음번에 주소를 찍고, 차 시동까지 걸며 계속 협박하더라. 그때 ‘가지 말자’고 했는데 눈물이 나더라. 정말 비참했다. 그러자 경찰관은 ‘얘기 똑바로 해라. 안 그러면 감옥에 간다’며 또 조사를 시작했다. 집에는 경찰조사를 받으러 간다고 말도 못했다. 77일 동안 집에서는 (공장밖으로)나오라고 계속 말했는데 나는 끝까지 있었다. 잘 됐으면 해서… 경찰서까지 간 거 알면 부모님의 상심이 너무 클 것 같았다. 조사받고 집에 갔는데 부모들은 표정이 안 좋은 게 티 났나보더라. 둘러서 말했다.”

경찰관은 또한 이씨의 핸드폰을 빼앗아 비밀번호를 풀어 통화기록을 확인하고, 통화 내용을 캐물었다. 이씨는 동료들에게 불이익이 갈까봐 위축되었다고 한다.

“친구한테 전화가 왔었다. 통화 끝나고 조사받는데 주머니에 넣었는데 핸드폰을 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많이 위축됐다. 비밀번호 다 풀라고 하고, 통화기록 확인하고, 통화 내용이 뭐냐고 캐고… 다음날 우리 집에 갈 것처럼 해서 나를 차에 타라고 했다. 같은 날 아침에 또 통화기록 보고, 핸드폰 또 달라고 하고… 경찰관이 내 핸드폰을 계속 들고 다녔다. 수시로 비밀번호 풀라고 해서 일이리 확인하고. 처음에는 경찰관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조사를 받았는데… 동료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그러지 못하겠더라. 아무리 공직자라고 해도 도가 넘은 행동이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나 같은 경우는 경찰조사 받으면서 눈물, 콧물 다 빼고 나왔다(웃음).”

‘빨갱이’로 불린 것은 그나마 양호한 편에 속했다. 조사 당시 지나가던 경찰관은 이씨에게 파업 참가 노동자들을 ‘폭동’과 ‘빨갱이’라고 표현하며, ‘외부세력’의 지시 하에 파업을 한 것이라고 단언했단다.

“‘외부세력’이라고 하기에 저는 경찰관에게 ‘연대세력’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경찰관이 ‘그게 외부세력이다!’고 하더군요. 우리를 상당히 안 좋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때 수사관이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내가 이 위치까지 올 정도면 파출소나 경찰서 위치하고 틀리다. 나는 높은 사람이니 내가 하는 얘기는 거짓이 없다’고…”

"나는 가능성을 가지고 투쟁했다"

그러나 이씨는 77일간의 파업을 후회하지 않는단다. 나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길이었기 때문이란다.

“나는 가능성을 가지고 투쟁했다. 전투경찰 들어온 첫 날인 7월 19일, 협상이 결렬 된 8월 4일 동료들이 공장밖으로 나갔다. 5일 전투경찰이 컨테이너를 들고 진압작전을 펼치며 들어왔을 때는 갈등하기도 했다. 동료들이 나오라고 밖에서 전화했다. 그런데 우리는 부당해고를 당했고, 제대로 된 선정기준에 의해 해고가 당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억울해서 투쟁했다.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잔업 다 하고, 일 있으면 약속 시간도 미루고 잔업 특근 다 하고 해 줄만큼 해 줬다. 남들 소위 말해서 땡땡이 칠 때 그런 것조차 안하고 일했다. 직장이 시키는 거 다 해 왔다. 그랬는데 해고당하니까… 너무 억울한 거다. 나보다 생활, 근태를 개판으로 한 사람들은 살고 나는 죽으니까 화가 나고 억울했다.”



후회하지 않는 77일간의 파업이었지만 경찰조사 과정조차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자존심도 상했고, 같이 싸웠지만 단 한명도 조사받지 않는 사측 임직원-비해고자들을 보면서 억울하고 분했다.

“경찰관이 ‘왜 해고를 당했냐?’고 해서 모른다고 했더니 무능력해서 해고당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생산직에서 일하는데 무능력할 게 뭐가 있겠냐?’고 했더니 다른 얘기로 넘어갔다. 그리고 일반 조합원인 나에게 ‘니가 간부냐? 너 술 먹을 줄 알지?’라고 묻더니 ‘그럼 니가 (노조)위원장 해라’며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사측 사람들과 우리는 새총 자체도 틀렸다. 우리는 방어용이었지만 그들은 공격용이었다. 가스식도 있었고, 골프공 날리는 기계도 있었다. 눈으론 봤지만 어느 순간 천으로 싸서 다니거나 그 상태로 공격을 해서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다. 왜 우리만 조사 받아야 하는가. 그 사람들도 조사 받아야 한다.”

전쟁을 경험한 것과 같은 증상인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보이는 쌍용차 파업 참가자들은 51%였다.
자본의 손실을 사회화 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고립과 폭력에 시달렸던 쌍용차 파업노동자들에게 경찰 조사과정은 또 다른 폭력인 듯 보인다. 물론 피의자의 인권침해는 말할 것도 없다. 이씨뿐만 아니라 경찰조사를 받았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