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건드리면 부드러운 여자인데

희망을 찍는 사진사, 재능 선생님 유명자(2)

2004년의 일입니다. 학습지 회원을 늘이라는 회사의 강요에 시달리다 1천5백만 원의 빚을 남기고 숨진 이정연 씨. 이정연 씨는 국어, 영어, 수학 등 7개 과목을 맡아 204개의 수업을 진행하여 한 달에 250만 원을 벌었습니다. 이정연 씨가 숨진 뒤 실제 수업을 조사해보니 47개에 불과했습니다. 134개의 수업은 가짜 회원으로 밝혀졌지요. 학습지 회사의 무리한 실적 강요에 이정연 씨는 매달 자신의 돈을 2백만 원씩 회사에 바쳐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현금서비스를 매달 1백만 원씩 받아가며 실적을 유지하였습니다. 나중에는 현금서비스조차 여의치 않자 사채를 빌려 썼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이정연 씨는 왜 미련스럽게 빚까지 내가며 가짜회원을 유지했을까요? 이정연 씨 동료들은 “회원이 줄어들면 면담과 독촉전화를 통해 압박을 하고, 심지어 인신공격을 하며 모멸감을 주거나 가정사까지 들먹이며 실적을 강요하니 어쩔 수없는 현실이다”고 털어놨습니다.

  유명자 선생님

회사는 끊임없이 학습지 선생들에게 목표량을 강요해요. 우리 지국 목표로 신입회원 백 명이 내려와요. 우리 팀이 3개야. 그러면 팀당 30개씩 나눠 해. 그러면 우리 팀에 교사가 5명이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나누다보면 또 1인당 5를 해야 되는 거예요. 플러스 5를 해야 되는 거예요. 5를 다하면 뭐가 문제가 있겠어요. 근데 내가 제로다 못해 마이너스를 하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치고 들어 오냐면, 니가 마이너스를 해서, 너 때문에..... 예를 들면, 이 마이너스에 대한 실적을 딴 사람들이 떠안아야 되잖아요. 그러다보니까 마이너스 한 사람이 어떻게 되냐면 완전히 동료들한테 ‘역적’이 되는 거예요. 동료애도 없는 사람이 되고. 뭐냐면, 니 마음 편하려고 마이너스를 실적대로 다 쓰면 딴 사람이 피 본다. 이걸 입사할 때부터, 계속 몇 년이 되어도, 계속 그 마감 때만 되면...... 딱 그 얘기를 들으면, “아 정말 내가 나쁜 사람이구나!” 이젠 그렇게 자학을 해요. 이러면 도저히 마이너스 쓸 수가 없어.

마감되는 말일 날, 한 1주일 전부터 계속 쪼는 거예요. 월초에는 계속 뭐를 쪼냐면, 입회해라. 새 회원 늘려라. 새 회원 만들어 와라. 그걸 계속 쪼고. 그달 말일이 되는 마감 주에는 뭘 쪼냐면, 이미 그만 두겠다고 밝힌 회원들을 이제 홀딩 시켜야 되는 거야. 교사들이 책임져야 되는 거야. “너 이 회원 그만둔다는 데 서류상에 쓴 거 지워라.” 음, 지워라. 해놓고 나서 계속 1주일 동안 쪼는 거죠. 마지막 날 까지. 그러다보면 결국 지우고. 그 회원, 지운 회원은 회사 전산으로는 살아 있는 거고, 실제로는 그만 두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이 회비를 대납해야 되고. 그러다보니 일하고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빚더미에 앉고. 이정연 선생처럼 결국 목숨까지 끊는 경우도 있고.


첫 달 계장의 요구대로 마이너스를 제로로 썼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안 썼죠.” 유명자는 웃는다. 또렷한 이목구비처럼 목소리도 또렷하다. 그 또렷함이 어떤 절망에도 굴하지 않는 ‘자신만만’함을 내보인다.

저는 안 건드리면 대개 부드러운 여자인데..... (웃음)

유명자는 자신이 당하는 것은 “둘째 치고 딴 사람이 당하니까” 더욱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새로 선생들이 들어오면 집중적으로 ‘부당영업’을 강요하는 현실을 보며, “아, 그게 안 참아 지더”란다. 석 달째 되는 날은 지국장과 대판 싸웠습니다. “학습지 회사라는 게 선생님들 피를 빨아 먹고 크는 회사 같다. 누굴 위해서 교사들이 자기 돈 넣어서 제로로 맞추고 해야 되느냐!”며, “그때 진짜 막 어휴 엄청 싸웠”습니다.

유명자는 부당함이 판치는 회사를 왜 그만 두지 않았을까? 궁금했습니다.

처음엔 그니까, 그만 둬야지, 이런 생각도 막 화가 나서 들었죠. 그런데 그때 당시만 해도 아이들을 만나서 1년은 함께 지도를 해야 되지 않겠냐, 하는 생각이 있었죠. 사교육이라도 학습지 선생들이 그런 마인드는 있었어요. 회사는 영업사원 취급을 했지만요. 최소한 아이를 맡았으면 1년은 책임지고 그 아이를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만났는데 내가 힘들다고 1년도 안 가르치고 그만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사실 “1년은 아이를 위해서 버티자”였어요.

유명자는 자신을 기다리며 공부를 하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만을 생각했습니다. 학습지 회사의 부당함을 꾹 가슴 깊숙이 누르며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지나갈 때쯤, 재능교육에서 노동조합을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유명자는 스스로 노동조합을 준비하는 선생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노동조합과 유명자는 10년의 세월을 함께 했습니다. 서른의 나이는 어느덧 마흔이 되었습니다. 그 시간은 개인 유명자를 사라지게 했습니다.

결혼이요? 나중에는 몰라도 지금은 별로 생각이 없어요. 이 나이에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웃음) 저는 결혼 하겠다, 안 하겠다,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삼십대 초에 노동조합을 만났는데 그냥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냥 이렇게 이렇게 세월이 간 거예요. 내 나이 마흔을 넘긴 거죠.

유명자가 노동조합과 함께 한 10년. 그 역사를 쓰려면 흔한 말로 소설책 10권을 풀어놓고도 남을 만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옵니다. 유명자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아, 엄청 좋았죠”라고 합니다. “노동조합은 향수를 먹고 살면 안되는데.....” 하면서, “파업을 하면 못 나와도 천명 이상”은 나왔다며 그 “조합원들이 서울 도심을 훑고 다녔던”던 시절을 떠올리기며 가슴 벅차합니다. 그 10년 가운데 영광과 환희의 순간은 짧았습니다. 기나긴 탄압의 시간들이 이어졌습니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지자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출산을 앞둔 선생은 쉴 수 있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관리예치금이라고 해서 입사를 하면 회사에 보증금 형식으로 내야했던 제도도 개선이 되었습니다. 학습지 선생이 ‘가짜 회원’을 안고 가며 자신의 돈을 넣어 회원을 유지해야 했던 부당영업에 대해서는 “선생님들이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그만두는 회원에 대한 책임을 회사가 지도록 하였죠. 저희가 그만두는 회원을 ‘휴회’라 하거든요. 휴회 부분을 선생이 몽땅 뒤집어썼는데, 이젠 면제 받는 제도, 회원의 손실분을 회사가 책임지게 하는, 휴회 면제 제도. 그러니 부정영업이 현격히 줄어들었죠. 휴가비라든지 복지나 그런 제도도 생기고. 그러니까 근속년수가 거의 배로 뛰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