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여전히 냉동고에

[이득재의 줌인 줌아웃] 용산은 끝나지 않았다

용산 4구역 건물에 설치된 600개의 등에 불이 들어왔다. 2010년 1월 1일 용산 학살에 따른 협상 일부 타결로 구천을 헤매던 망자들의 몸과 영혼이 천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말이 1년이지 유가족들은 국가가 공권력으로 헤집어 놓은 마음 추스르며 국가의 회유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백 번이고 수천 번이고 밤길을 달려 왔다.

12월 31일 '2009년 12월 32일' 추모문화제 행사가 끝나고 어두웠던 1년 막바지에 점등을 시키던 날 유가족들과 행사장에 참석한 사람들은 서로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서로의 눈물을 훔쳐 주며 모질게도 차가운 용산 4구역 행사장을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드럼통에 담긴 장작불도 장작 위의 얼음을 쉬 녹이지 못할 만큼 영하 12도이지만 체감온도 20도였던 추위는 너무도 매서웠다.

그러나 1년 동안 냉동고에서 얼어버린 망자들의 몸을 따라가기야 하겠는가. 이런 생각으로 추위에 강하다고 믿던 필자도 잔뜩 몸을 움츠린 채 잔인한, 너무나도 잔혹한2009년을 훠이훠이 보내고 있었다. 가라고, 더 이상 뒤돌아보지도 말고, 부자들을 위해 가난한 민중들을 불길로 밀어내는 더러운 세상, 다시는 오지 말라고. 또 다시 국가 폭력이 민중의 삶 속에 들이닥치면 그 때에는 경인년답게 장작불보다 더 뜨겁게 투쟁하겠노라고.

뒷골이 서늘하고 한시라도 장작불과 멀어지면 혹한이 온 몸을 휘 감던 용산 4구역에서, 망자들의 목소리가 칼바람에 실려 장작불을 더 키우던 2009년 마지막 날, 유가족들은 '어떻게 죽었는데' 라고 외마디를 지르며 복받쳐 올라오는 눈물 속에 슬픔을 담갔다. 하지만 하염없이 슬픔을 차고 올라오는 눈물은 2010년에도 그칠 줄 몰랐다.

‘어떻게 죽었는데.’

용산은 끝나지 않았다. 민중들의 투쟁도 끝나지 않았다. 결코 끝나지 않았다. 아니, 끝낼 수가 없다, ‘어떻게 죽었는데.’ 용산 학살 책임자는 아직도 이 나라를 활보하고 있고 사람들은 철창에 갇혀 있는데, 장례식과 보상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렇게 해서 철거민이 그들의 인생을 묻었던 곳에서 쫓겨나가면 바로 용산 4구역 자리에 시티 파크 같은 주상복합 건물이 다시 올라갈 것이고 서울 시청, 개발업자, 투기꾼들은 그 알량한 보상비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것이 아닌가. 한 세대 건물 값이 40억 이상 하는 용산 4구역에서 몇 푼 보상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용산 유가족과 노동자 민중들이 요구한 것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죽었는데'. 진상 규명을, 구속자 석방을, 책임자 처벌을 돈으로 뭉개버리자는 속셈 아닌가. <조선일보>가 2009년 12월 30일자 사설에서 얘기했듯이 과연 그런 보상으로 2010년을 개운하게 맞이할 수 있는가. '전철연'이 폭력 조직이라는 사설 내용을 보면 더 기가 차다. 개발이 정의에 부합하지 않으면 폭력 조직에 의지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앞 구절과 뒤 구절 사이에 논리의 비약이 있는 교묘한 논리를 이용하여 망자들을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이려는 유혹에 스스로 빠지지 않고 있는가.

개발이 꼭 필요하다는 부당전제 위에서 권리금 운운하며 노동자 민중들을 위하는 척 하는 그 더러운 문장을 꼭 휘갈겨 써야, 그래서 졸지에 가장을 잃고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떠맡게 된 유가족들의 마음을 갈갈이 찢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겠는가.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 짐승의 마음이다.

용산 학살의 핵심은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이다. 그것이 이루어져야 용산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명명백백하게 진실이 밝혀질 것 아닌가. 유가족들의 한은 돈으로 풀리지 않는다. 오로지 진실만이 1년 내내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일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일체 언급하지 않은 채 <조선일보>가 정의로운 개발을 운운하다니. 한국 사회에서 개발은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리만 강화시키는 것이지 '정의'하고는 애시 당초부터 무관한 더러운 돈지랄이다.

용산은 승리했다. 그래 맞다. 하지만 용산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실은 냉동고에 여전히 갇혀 있고 용산 4구역 남일당 공간 같은 곳은 한국 사회에 민들레처럼 지천에 널려 있다. 이 나라 발길 닿는 곳마다 지옥을 개발해 떼돈을 챙기려는 욕망이 꿈틀대는 한 용산은 끝나지 않는다. 지옥개발이든 한반도 대운하든 노동권이든 없는 사람은 아예 삶의 뿌리마저 통째로 뽑아버리고 돈 있는 놈들에게는 떼돈을 더 팍팍 밀어주는 강부자 정권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한 용산의 슬픔은 눈물을 거둬들일 수 없다. 결코. 2009년 12월 31일이 2009년 12월 32일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