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로 인해 자살은 누구의 책임인가?

[일터] 어느 산재 노동자의 죽음

노무사라는 업을 하면서 직업적으로 가장 괴로운 점 중 하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개인이 감내하기 힘든 어려운 상황 -해고되었거나 다쳤거나 임금을 받지 못했거나-에서 노무사를 찾는다는 점입니다. 특히나 사용자의 의뢰를 받지 않는 좀 별난(?) 노무사의 입장에서 의뢰인인 노동자들은 개인의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시기를 겪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 중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하여 망인의 사망 원인을 파헤칠 때 괴로움은 배가 되곤 합니다.

최근 한 노동자가 요양 중 자살하였다고 유가족이 찾아왔습니다. 건설 일용노동자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박봉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근무하면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망인은 물이 고여 있는(!!) 지하에서 전기 카터기를 이용하여 철근을 자르는 작업을 하다 약 2분이상의 전기감전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최초 상병명은 전기감전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손상(사고성재해) 이었고 최초 재해이후 8주간의 입원치료와 1주간의 통원치료, 3개월 후 재활전문치료를 지속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며 완치여부에 대한 판단도 섣불리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망인이 감전사고 이후 극심한 두통 및 우울증 등 정신과적 질환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망인은 급격하게 약해진 신체능력과 사고 당시에 대한 공포, 전기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인해 두통, 우울증, 불면증 등이 발병하였으며 불안정한 정신 상태로 인해 충동조절 능력이 급격하게 약화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정신과적 진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당시 망인에 대한 "심리학적 평가 보고서"의 의뢰사유를 보면 ‘작업도중 전기에 감전되는 사고를 당한 후 지속적으로 우울감, 자살사고를 경험하고 있고 지나치게 예민해져서 주변사람(특히 아내)과 자주 다투고 있으며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심각해져서 사람을 해치고 싶은 충동’ 등을 자주 느낀다고 되어있고 자서전적 면접검사에서는 "돈 몇 푼 준다고 일 나갔다가 이렇게 당해서 눈물만 나요" 라며 장시간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했다는 내용이 있는 등 망인이 최초 전기감전재해로 인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겨운 시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망인은 요양 중 "비기질적 불면증, 중증도의 우울성 에피소드, 적응장애" 등 망인이 앓고 있는 정신과적 질환에 대해 산재로 기인한 상병이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추가상병 신청을 제기하지만 공단은 "재해자의 주관적 증상호소"만을 근거한다는 이유로 불승인 처분을 내립니다. 1차 추가상병이 불승인 난 뒤 약 한 달 뒤 망인은 다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질환에 대해 다시 추가상병을 신청하나 근로복지공단은 이번에는 "정신과적 증상이 재해와 객관적 의학적 연관이 있다는 근거가 미흡하다"며 또다시 불승인 처분을 내립니다.

망인이 공단에 추가상병을 신청한 기간은 정신과 치료를 위한 입원기간이었는데 두 차례의 추가상병이 모두 불승인 판정을 받자 추가상병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임시로 퇴원하게 되는데 이미 망인은 최초재해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능력의 약화로 충동억제능력이 현저하게 저하되어있는 상태에서 결국 전농동 인근의 한 건물 옥상에서 수차례 "아버지, 아버지" 라고 외친 뒤 투신하였고 망인의 죽음은 자살로 결론이 났습니다.

하지만 과연 망인의 죽음이 자살인가요?

수사기관과 법은 망인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지었지만 저는 그 결론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망인이 위험요소가 없는 안전한 작업장에서 작업을 하였다면, 아니 안전조치만 충분히 했다면 재해가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는 1차적 이야기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망인은 사망할 때까지 단 한 차례도 정신과적 질환과 관련한 의료기관의 진료, 투약 등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이 최초재해로 인한 망인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재해자의 주관적 증상호소", "정신과적 증상이 재해와 객관적 연관이 미흡하다" 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망인의 추가상병 신청에 대해 불승인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겠지요.

지나간 일에 대하여 만약이라는 가정만큼 부질없는 일이 없다지만 저는 감히 장담컨대 근로복지공단이 망인의 정신과적 질환에 대한 추가상병을 승인하기만 했다 하더라도 망인이 그처럼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성실하던 한 생활인이자 가장이었던 망인은 안전관리의무를 방기한 사업주에 의해 한번, 근로복지공단의 무책임한 결정으로 인하여 또 한번 죽음을 강요당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산재는 업무로 인해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이 위협받는 심각한 문제임에도 사업주의 의무방기와 유명무실한 감독규정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아직까지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남은 물론 지금도 이 땅에서는 3시간에 1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죽어가고 있고 OECD국가 중 10만명당 산재환자비율 1위라는 비참한 수치까지 객관적으로 존재합니다. 또한 망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질병판정위원회의 도입이후 형식적이고 무성의한 심사로 인해 산재 인정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반면 요양 중 강제종결율은 높아지고 재요양 및 요양연기신청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 라는 헌법 32조 3항의 정신에 따라 '선보장 후승인', '산재보험의 보장성 강화', '업무상 행위에 대한 포괄적 산재인정' 등 산재보험의 제도개혁을 위한 단결과 연대가 참으로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입니다.

지면을 통해서나마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덧붙이는 말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관지 [일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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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 산재 , 요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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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목록
  • 혜화동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자본가 개새기들

    돈이라면 사람 목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게 자본가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