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부단한 먹물들의 현실 탈각”

[새책] 근대성의 역설

근대성의 역설 (헨리 임, 곽준혁 등, 후마니타스, 2009.12.15, 352쪽)

  근대성의 역설 표지
‘한국학과 일본학의 경계를 넘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합리적 보수주의자 최장집 사단이 만들어낸 사상적 유희로 새롭긴 하지만 현실과 어떤 접점도 찾지 못했다. 이 책은 서문의 끝에 “이 기획을 마련할 기회를 준 전 아세아문제연구소장 최장집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며 집단의 우두머리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책은 거창한 제목과 화려한 편집으로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지만 내용은 설익은 게 너무 많아 위험하기까지 하다. 자꾸 새로운 것에만 집착해 기존 연구를 뒤집을 생각만 하는 결코 젊지 않은 역사학자들이 이리저리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좌우 어디에도 서기 싫어하는 지식인의 우유부단함이 이념의 탈각이란 미명하에 현실을 탈각하고 중간지대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인다.

기존 연구에 대한 제대로 된 공부조차 부족한 먹물들의 혼돈스런 사유를 엿보는 듯하다. 이 부분은 다음 ‘낡은 책’으로 소개할 김경일 교수의 <1920년대, 30년대 조선 노농운동>이란 책을 통해 여실히 폭로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전체적으로 함량미달이다. 그럼에도 요즘 젊은이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언어의 유희를 늘어놓고 있다. 전적인 책임은 출판사에 있다. 출판사의 편집의도도 불순하다. 어디 하나 현실에 써먹을 만한 확장된 사고의 단초조차 없다.

대표 저자 헨리 임과 곽준혁은 이 책 서문에서 “이 책의 발단은 2007년 여름 <인문학의 새로운 흐름 : 한국학과 일본학의 국가 간·학제 간 경계를 넘어>라는 국제학술회의에서 시작했다. 학술회의 내용과 취지에 상당부분 공감한 <아세아연구> 편집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나온 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어 “식민지-피식민자, 가해자-피해자라는 이분법을 넘어 식민지 근대성 속에 내재한 ‘뒤얽힌 관계들’에 주목한다”고 밝혔다. 넘기는 뭘 넘는다는 말인지.... 언제 이들이 이분법이라도 제대로 해 봤는지 묻고 싶다. 그래야 이분법을 뛰어넘지. 이들이 그렇게 관념 속에서 줄넘기나 하고 있을 때 현실은 추락하고 있다. 현실과 무관하게 문학적 상상력만으로 사유를 즐기는 이런 류의 먹물들이 즐비하다보니 인문학의 위기는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들에게 “제발 땅으로 내려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을 한번 쳐다보라”고 권한다.

서문의 첫 문장은 “지난 20년 동안 미국 학계에서는 ‘유로-아메리칸 식민주의와 제국’에 관한 연구가 새롭게 주목받아 왔다. 이런 경향은 미국 내 좌파 학자들의 지속적인 연구대상이었다”고 시작한다. 미국엔 좌파 학자는 없다. 좌파 학자로 스스로를 착각하는 학자가 있을 뿐이다.

서문은 다시 루이스 영(Louise Young)이 <일본의 총력 제국>(1998)이란 책에서 일본의 만주 침공과 제국주의 프로젝트를 위한 대중 동원이 일본 내 대중문화를 바꾸고, 어떻게 일본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을 만주제국 건설에 자신들의 사회적 비전 추구의 기회로 여기도록 했는지 추적했다고 밝혔다. 한 마디만 묻자. 만주제국 건설에 참여했던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인가. 이 책 8장에서 저자 곽준혁 스스로도 이광수를 논하면서 그의 “민족주의적 담론들이 반제국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제국주의의 바탕에 깔린 지배의 논리를 수용했다”고 지적하지 않았는가. 이광수가 언제 한 번이라도 ‘반제국주의’를 표방했던가.

서론에 해당하는 1-3장을 빼고 4장부터 요약해 소개한다. (괄호) 안은 책을 읽다가 떠오른 비판적 생각들이다.

4장 죽일 권리와 살릴 권리 - 다카시 후지타니 캘리포니아대 역사학과 교수

이 장에선 젊은 조선 남자들이 일본 제국군에 입대를 허락하고, 젊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미군 입대를 허락한 것을 다루었다. 미국이 일본계 미국인들을 서해 연안에서 쫓아내 무장군인이 있는 수용소에 감금했다. 서해안에서 일본인을 퇴거시키려고 결정한 전날 는 “독사는 알이 어디서 부화되었든지 간에 독사일 뿐이다. 일본인 부모가 낳은 일본계 미국인들도 미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으로 자란다”는 유명한 주장을 내놓았다.

일본은 조선일 여성을 성적 노예로 삼고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을 강제 동원했다. 반면에 두 국가는 소수민족들의 집단적 삶과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애쓰기도 했다. 이 글은 일본계 미군과 조선인 일본군에 초점을 맞춘다. 이유는 전시에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국인으로 살았던 일본인과 일본인으로 살았던 조선인들

일본이 조선을 통치한 ‘30년간의 역사’에 따르면 1937년 중일전쟁 후 국가가 인구를 이해하는 방식에 근본 전환이 있었다. (30년이 아니라, 40년이 맞다. 아무리 소극적으로 잡아도 35년이다. 이런 자가 학자라니)

이전 인구정책의 중심은 과잉해결이었다. 그러나 전시의 필요에 따라 바뀌었다. 푸코가 생명권력이라 칭한 이 새로운 권력은 생산적 논리에 의해 목숨을 살리는 방식으로 실행되었다. 생명 권력과 통치성에 대한 푸코의 이런 포괄적인 주장이 전시 일본의 통치체제가 인구집단을 이해한 방식을 분석하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먼저 생명권력과 근대 통치성이 인구 집단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주장은 1930년대 이전 조선의 경우에는 부분적으로만 정합성을 갖는다. 1945년 전쟁 마지막 해에도 식민지 당국은 조선인 호적등본을 서둘러 정리하려고 애썼다. 최근 많은 학자들이 일본의 식문통치의 ‘발전된’ 혹은 푸코의 표현으로 ‘통치적’ 면모를 지적한다. 이는 일본 식민주의가 단지 야만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의 전근대적 방식을 통해 작동되었다는 이전의 지배적 관점에 비해 환영받을 만한 새로운 관점이다. (푸코가 참 고생이 많다. 이런 말장난에 동원되다니)

조선총독부는 1937년 이후 많은 공식 문서와 정책에서 조선인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새로운 노력을 기울였다. 식민당국의 의도가 순수하거나 진실했는가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참 편리하다. 이렇게 말해 버리면 ‘의도’의 진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수 있으니)

지배계급은 점차 조선인들을 일본인구의 일부분으로 생존하고 번영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전쟁기는 조선인이 일본 인구의 외부자에서 내부자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일본과 조선이 공동의 조상을 갖고 있다는 주장과 ‘내선일체’ 논리를 강조했다. 조선인에 대한 인종차별 방식이 뻔뻔하고 배제적인 ‘노골적 인종차별’에서 포괄적이고 ‘점잖은 인종차별’, 심지어 인종차별이 있었던 것조차 부정하는 방식으로 변했다. (논리적 비약이 끝이 없다.)

일본 제국이 조선인 출신 육군과 해군에 더 많이 의존할수록 그들을 배제하는 것이 힘들었다. 1937년 중과 전면전이 격화되면서 일본정부는 1938년부터 조선인 지원자들에게 군대를 개방했고 1943년 8월1일 조선인을 징집대상으로 삼았다. 히구치 유이치(1991, 2001)는 1938-1945년 일본군에 복무한 조선인 숫자가 총 213,723명이라고 추정했다. 약 19만명이 징집자이고 16,830명의 육군 지원자, 3,893명의 학도병, 3천명의 해군 지원자가 있었다.

1945년 4월1일 공표한 두 법으로 조선과 대만인이 25세 이상, 최소 15엔의 직접세를 낸 모든 남성 신민들은 중의원 대표자 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었다.(법률 제34호) 조선의 중의원 의석은 23석, 대만은 5석이었다. 그러나 법 시행 전에 전쟁이 끝났다. 전쟁 마지막 해에 식민 당국과 밀접히 연관된 준정부 조직들이 점차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사회서비스와 복지를 확대 시행했다. 전시 동안 여성 노동력 동원을 위해 수만 개의 탁아소를 설립했다. 이 과정을 ‘국민화를 통한 탈식민지화’라고 부르는 것이 무리한 해석은 아닐 것이다. (좀 더 나가다가는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조선에 선진 사회복지제도를 심었다고 쓰겠다.)

‘포용적 인종주의’, 즉 엄격한 배제나 몰살 등의 ‘배타적 인종주의’가 아니라 위계질서 내로 편입시키는 방식이다. 신식민 정책의 한계와 무관하게 조선인을 전시에 동원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조선인 인구 전체의 삶, 복지, 번영, 행복, 그리고 심지어는 정치적 권리를 향상시키는 조치들이 제도화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전시동안 조선인들의 행복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했던 노력을 전면적으로 부인함으로써 이런 변명에 대응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적인 기록을 적절히 설명해 낼 수 없다는 한계를 갖는다. (“조선총독부가 전시동안 조선인들의 행복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했다”고 직설적으로 써라. 말 돌리지 말고. 아무리 조선인 일본군이 필요하다고 총독부의 정책이 조선인들의 행복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까지 나갈 순 없다.)

미국은 1943년 1월부터 일본계 미국인 대부분이 미국에 충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키려고 했다. 일본계 미국인들의 생명과 복지를 보살피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점잖은” 인종차별로 전환해 일본계 미국인들을 미국 인구의 외부자에서 내부자로 만든 두 개의 주요한 동력이 있다. 하나는 민간과 군의 노동력 수요고 다른 하나는 미국이 인종적 평등에 헌신하는 나라임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려는 선전적 의도였다.

1942년 9월까지 일본계 미국인들은 군대 내에서 배제됐다. 1943년 1월 미국 전쟁성은 이전의 결정은 바꿔 일본계 미국인을 받아들였다. 당시 미국은 징집 대상 연령대에 약 3만6천명의 남성 일본계 미국인이 존재하고, 약 1만4천명이 잠재적으로 복무가능하다고 보았다.

“백인으로부터 자유를 찾으려는 확인종의 성전”으로 만들려는 일본 제국의 전략을 뒤엎어야 했다. 미국 리더십의 전시 및 전후 전략에서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1943년 2월 미국 정부는 수만명의 일본인 수용자들을 풀어 주었다. 1944년 12월에는 서부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일본인 추방을 폐지했다.

전쟁 직후 일본은 일본에 살던 조선인들의 일본 국적 등 법적 지위를 일방으로 박탈했다. 반대로 일본계 미국인들은 계속해서 미국 인구의 주류에 포함되었고 1960년 이후로 이들은 언론에서 미국의 “모범적인 소수 인종”이라는 칭송도 받았다.

5장 상품화, 불확정성, 중간착취 - 켄 카와시마 토론토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인종, 계급은 고정이 아니라 복잡하다. 1920년대 중반 수십만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으로 건너왔다. 이는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을 토지에서 분리된 소작농 때문이었다. 전간기 일본 경제침체로 이들 조선인 노동자 다수는 공장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대부분 막노동시장에서 돌았다.

전간기 일본 내 조선인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역사를 살폈다. 조선인 노동력이 일본의 막노동시장에서 어떻게 상품화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착취 과정은 공장 체제 외부에 존재했다. 조신인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내쫓아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막노동시장으로 내보내는 사회적 매개체들과 연결돼 있었다. 전간기 일본의 조선인 노동자 다수는 조선 농업의 피폐화와 일본 대도시 중심부의 산업경기 침체라는 두 난관에 부딪치면서 공장에서 쫓겨나 막노동시장을 떠돌았다.

전간기 일본의 막노동시장에서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투쟁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은 강에 둑을 쌓고 철로를 놓았고 터널을 팠다. 조선인 건설노동자가 없었다면 전간기 일본의 근대적 인프라가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막노동시장의 중간착취문제는 심각했다. 1차 대전 후 현대적 도시 위생의 발전 덕분에 공공사업은 중공업이나 경공업과 달리 호황이었다.


<표 5-1> 실업등록 이전 막노동자들의 직업 (1928년 동경) (단위 : 명, %)
[출처: 동경시 사회국(1929, 92-3)]


지진으로 폐허가 된 동경에서 1923-27년까지 4개년 재건계획이 실시됐다. 1928년 동경에 등록한 막노동자들의 54.7%가 조선인이었다.

함바 그리고 오야카타 제도에 기반을 둔 내부적 위게질서는 근대 전반에 거쳐 광산과 건설산업 내 노동조직의 기본단위였다. 함바의 기원은 닌소쿠 요세바로 알려진 중세 막노동시장에서 일했던 뜨내기 노동자들과 중죄인뿐만 아니라 1600-1868년까지 도쿠가와 시대의 수공업 조합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함바는 작업과 생산의 장소인 동시에 건설 현장에서 떨어져 있지 않은 생활과 소비의 장소였다. 함바 관리인들은 생필품 가격을 10-30%까지 올려 팔았다. 함바 매점은 거의 영국의 트럭체제나 토미체제(Tommy System)와 동일한 원리로 작동했다. 영국의 트럭체제는 웨일즈 남부와 스코틀랜드 서부지역의 석탄 광산에서 두드러졌는데 15세기 후반에 시작해 19세기까지 지속됐고 1831년 트럭법이 이를 불법화한 뒤 사라졌다. 함바 제도가 노동자들을 반 노예 계약의 상태로 묶어두는 역할을 했다. 1937년 동경시 사회과 자료를 보면 함바에 사는 308명 전원이 조선인이었고 일본인은 한 명도 없었다.

“노동자들은 두 번 착취당한다. 한번은 핀하네 제도의 임금에서, 또 한번은 음식값과 함바료의 형태로.” 핀하네는 원래 임금에서 고정 비율만큼 “머리가 잘려 나가는” 즉 선취로 떼어졌다. 1924년 오사카 시가 막노동을 조사한 결과 핀하네 비율이 숙련노동자는 5-7%였고 비숙련노동자는 20-30%로 높았다. 대공황기 때 노동력의 가격이 함바료의 가격보다 더 빠르게 내려갔다.


<표 5-4>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과 함바료 비교(교토) (단위 : %)
[출처: 동경시 교육부 사회과(1931, 50-1)]


1925년엔 임금문제로 조선인 노동자가 일으킨 사건이 단지 18건이었지만, 1929년 79건, 1930년엔 153건으로 늘었다. 체불임금이 조선인 시위의 핵심이었다.

산신(三信) 철도 건설현장 파업

아이치 현의 1930년 산신 철도 파업은 막노동시장의 중간착취문제를 잘 드러낸다. 역사가이자 활동가인 박경식은 “재일 조선에게 산신 쟁의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파업위원회를 만든 것도 산신이 처음이었다. (인근) 농민들도 이 파업에서 얻은 것이 많았다. (중략) 이 쟁의 이후 각지에 흩어진 동지들이 그쫏에서 다부지게 활동을 전개했다. (박경식 1979, p238-239)

신신 철도회사는 도쿄에 본사가 있었다. 산이 많은 황야를 건너는 80km 공사였다. 원청에서 하청으로 넘어올수록 4만8900엔의 공사비가 4만2천엔으로, 3만8천엔으로 점점 줄었다. 여성 명의 조선인 함바 관리인들이 600명의 조선인 막노동자들을 관리했다. 파업은 1930년 5월 조선인 노동자들이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하면서 부터다. 함바에서 파는 간장, 된장과 야채의 가격이 시중보다 30% 비쌌다. 노동자들은 대개 개인당 30-50엔 정도 체불임금을 즉각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5월 말 파업위원회가 구성되고 300명이 집단 행동했다. 공산주의 노조단체 젠쿄 내 금속노조 지도자가 이들 건설노동자를 도왔다. 특히 함바 관리인들이 파업을 지지하도록 유도해 결국 함바 관리인들은 파업기간 노동자에게 음식과 다른 식료품을 제공하면서 파업을 지지했다. 젠쿄는 인근 농부들에게 파업 지지를 당부하는 전단을 배포했다.

1930년 7월25일 산신 건설현장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조선인이 이끄는 파업위원회가 신신과 사오토미에 대한 파업을 선언했다. 6명의 조선인 함바 관리인도 파업에 동참했고 노동자들도 함바 관리인들을 표적으로 삼지 않았다. 젠쿄의 중앙 막노동자 노조, 토요하시시 합동노조, 니가타 조선인 노동자 노조가 파업에 합류하면서 “조선인과 일본인 동지들 간의 혁명적 연대 반세!, 중간착취를 멈춰라!”고 외쳤다. 지역의 소작인들은 의식주를 제공하며 파업을 지원했다. 파업을 깨는 깡패들도 제압했다. 노동자들은 돌, 막대, 곤봉으로 경찰관에게 맞서면서 점거한 사무실을 지켜냈다.

한달 뒤 노동자와 경찰, 파업깨기 폭력배들과 다툼이 여러 번 생긴 뒤, 도요하시 시법원은 파업 노동자들에게 오호적인 판결을 내렸고 즉시 파업 노동자에게 2만엔을 지불하라고 산신과 사오토미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법원 판결 전 조선인 파업노동자 반 이상이 체포되고 감옥에 들어가 힘겨운 승리였다. 협상 중에도 경찰은 파업노동자들 공격했다. 경찰 폭력은 악명 높았다. 공산주의 조선인 활동가를 납치하려고 경찰의 지원을 받은 조선인이 이끄는 ‘동화’조직인 ‘상애회’가 특히 악랄했다. 많은 노동자가 부상입고 젠쿄 금속노조 일본인 대표는 부상을 입고 체포돼 결국 감옥에서 사망했다. 체포된 인원은 314명이었고 죄목은 보안법 위반이었다.

1927년 4월20일 일본 내 가장 큰 조선인 공산주의 노조인 재일조선노동총동맹이 3번째 연례회의를 열고 조직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정리했다. 1927년 초까지 동맹은 기본 투쟁전략으로 1927년 2월까지 조선 내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연합노선인 신간회 설립에 주력했다. 1927년 일본 내 조선인 총인구는 30만명을 넘었지만 동맹 회원은 3만312명에 그쳤다. 이렇게 조직화가 안 되는 이유는 재일조선인 노동자 대부분이 공장이란 근거지 대신에 끊임없이 변하는 ‘자유노동자’였기 때문이었다.

1929년까지 여러 억압을 겪으면서 동맹의 지도부는 동맹을 해체하고 일본 공산당의 주요 노조인 젠쿄에 힘을 보태겠다고 선언했다. 젠쿄가 산신 파업처럼 조선인 막노동자들과 건설노동자 투쟁을 지지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조선인 막노동자들의 투쟁은 공장에 기반한 노조 운동이 우세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투쟁 공산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6장 유로-아메리칸 헤게모니와 한국 역사학의 기원 - 헨리 임 뉴욕대 교수

국제법과 민족-국가 체제의 중심인 ‘주권’과 같은 개념들이 또한 다른 식민지 통제와 지배 기술들처럼 역사화되고 비판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권과 진보라는 유럽 중심적 개념 자체를 비판하고자 한다.

1895년 1월7일 고종은 종묘제례를 올렸다. 503년간 지속해온 조선왕조를 지켜내겠다고 명세했다. 이 자주독립의 서언은 메이지 특명전권공사인 이노우에 가오루의 강요해서 이루어졌다. 이노우에 가오루 같은 메이지 정치인들은 조선에 ‘완전한 주권과 독립’을 부여한 것을 목표로 삼았다. 중국과 제후관계 해체는 곧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성립한 ‘주권 평등’ 이론과 실천을 의미했다. 이는 한반도에서 일본의 지배를 촉진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주권 평등의 이론과 실천은 국제조약과 공법으로 권한을 부여받아, 질제로는 지배와 불평등을 조장했다.

메이지 원로원 의관 중에서 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사람은 이노우에 가오루는 조선에 가는 것을 자원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북쪽에서는 청국군의, 남쪽에서는 동학군의 협력을 얻어 일본군을 축출하려는 대원군의 계획은 물론 대원군까지 쉽게 퇴진시켰다. 이노우에의 전략적 목표는 수세기 동안 지속해온 중국과 조선의 제후관계를 끊은 다음 서구 열강들의 반발 없이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1894년 9월 평양 전투와 해전에서 모두 중국을 대파한 뒤 이노우에가 고종의 ‘자주독립 선언’을 위한 각본을 껐고 고종과 개혁성향의 관료들 대다수가 종묘에서 거행한 독립선언의 공동 저자였다. (개혁 성향의 관료가 아니라 친일 성향의 관료가 정확한 표현이다.)

유럽에서 국가 주권에 관한 개념과 원리는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서 성립하면서 신성로마제국에 관한 전통적 관념은 영구히 퇴출됐다. 베스트팔렌식의 주권 개념은 19세기 동아시아에서 서구 제국주의가 힘을 확장할 하나의 ‘인식틀’로 기능했다. (저자 헨리 임이 굳이 250년 전 유럽 헤게모니를 빌려온 이유는 ‘주권’ 때문이다. 그런데 헨리 임은 모르겠지만 한반도에도 이와 비슷한 ‘주권’ 개념은 수천 년 동안 여러 번 있었다. 제 이름조차 서구적으로 써야 하는 저자의 머릿속에는 유럽 헤게모니 밖의 세상은 없다.)

1884년 쿠데타 실패한 뒤 서재필이 일본으로 달아났을 때 나이는 스무살이었다. 서재필은 이노우에 가오루의 냉대에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892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서재필은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시자이모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의 사촌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 대령의 딸인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했다. 한국에 돌아온 1896년 서재필은 미국 시민권자였다. 서재필의 미국 이름 Dr. Philip Jaisohn(필재서)에서 Jaisohn은 그 자체가 이름의 첫 번째 글자인 재와 서를 결합시킨 번역물이었다. 이름의 두 번째 글자인 필은 Philip이 되었다. 다소 억지스럽고 기계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저자의 이름 헨리 임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19세기 후반 한국의 반식민지 맥락에서 서재필과 같은 지식인들이 조선 글로 독립신문을 만들었다. 이런 한문을 배제한 동일화가 가능했던 건 서구식 합리성이 중심이 된 민족-국가 체제와 상당한 관련성이 있다. 왜냐하면 조선이 민족-국가일 때만 조선 글이 국문이 되기 때문이다.

조동걸은 한국의 역사학자와 역사학에 관한 저서에서 민족주의 역사학의 선구자 신채호를 극찬했다. 신채호는 1908년에 발표한 <독사신론>에서 한국사를 한국 민족사와 등치시킨 최초의 인물이다. 완조의 역사보다 종족적 민족의 역사를 기술하기 위해 신채호는 한민족의 기원을 찾아 신화적 인물인 단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신채호는 1925년 이후 아나키스트로 전환해 민족이라는 포괄적 정체성 대신 ‘민중’이라는 좀 더 파당적 범주를 사용한다. <독사신론>에 담긴 자신의 이전 입장에 대한 자아비판격인 <조선상고사> 서문은 민족을 개념화하는 데 아와 타의 대립관계에서 변화의 계기를 발견한다. 신채호는 5.4운동 전후 무렵 쇼비니스트적 역사기술이 아닌 개방적인 목적성을 지닌 역사 기술을 위해 헤겔의 변증법을 빌려왔다.

단선적인 뉴턴식 시간 속에서 근대화를 따라잡는 국가들은 자연스럽게 과거의 뒤쳐진 시간에 위치한다. 주권 개념은 한국의 지식인과 역사학자들이 유로-아메리카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시간 개념에 한국사를 편입시키기 위한 정치적 개념이다. 식민성은 주체성이 자신과 한국사를 서양에 의해 정의된 세계 시간 속으로 편입시키는 것을 의미했던 순간에 주체성이라는 개념 자체에 내재되어 있었다. 따라서 나는 이제 뉴턴식 시간 개념을 넘어, 아인슈타인이 그러했듯이 시간과 역사는 상대적인 것임을 인식하고 이제껏 우리가 한국사에서 주권과 주체성을 통해 의미해왔던 바를 근본적으로 재고찰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장난 속에 저자 자신은 서구식 역사관에 포로가 되어 있다.)

7장 총력전 시기 재조선 일본인의 협력 - 쥰 우치다 스탠포드대 교수

1937-45년 총동원 시기에 ‘재조선 일본인’의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협력 양상을 선생연구 성과에 기초해 정리했다. 재조선 일본인은 황민화 정책에 협력하거나 무관심한 자, 정면으로 반대하는 자도 있었다. 조선은 20세기 식민지 중에서 대영제국의 자치령인 미국 캐나다 호주 등 백인 이민국가를 빼면 프랑스령 알제리 다음으로 많은 본국인이 살고 있었다.

1945년 즈음 재조선 일본인은 민간인이 약 70만명, 군인이 30만명으로 약 1백만명에 달했다. 1935년 재조선 일본인은 58만3428명으로 경성 인구의 약 30%인 11만3321명, 부산 인구의 30%인 5만6512명이었고 지방도시인 대구나 군산에서도 해당 도시 인구의 약 25%를 차지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조선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쇠퇴하면서 이를 메우기라도 하듯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혼합 파시즘 단체가 연이어 나왔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전향한 윤치호가 이끄는 조선중앙기독청년회는 일본인 기독교청년단체에 흡수되는 형태로 합병되었다. <경성일보> 사장인 미타라이 다츠오는 조선 반도 내 일간신문 25개 사를 모아 조선춘추회를 조직해 정보통제나 전시 선전에 협력했다. 1939년 경성제국대 교수인 가라시마 다케시와 같은 대학 예과 교수이며 녹기연맹의 주간인 ‘츠다 가타시’ 등이 250명의 조선인과 일본인을 망라하는 조선문인협회를 회장 이광수(후에 윤치호)를 추대해 설립했다. 이 단체는 1943년 조선을 비롯한 대만과 만주의 작가를 망라해 조선문인보국회로 커졌고 일본어 사용과 일본정신 보급을 강조하는 국민문학을 넓히는데 힘썼다.

가시이 겐타로, 사이토 히사타로, 아리가 미츠토요, 가다 나오지 등 재조선 일본인 경제계 유력자들은 조선인 엘리트 한상용 박영철, 김연수 등과 함께 총독 주최인 조선산업경제조사회(1936년), 시국대책조사회(1938년)에 참가했다.
1937년 조선군사후원연맹은 천황에게 하사금을 받아 미나미 총독이 알선해 결선한 관민 단체로 조선내에 존재하는 출절하거나 소집에 응한 군인 유족과 가족의 원조를 목적으로 조선에 225개 지부와 분회를 만들었다. 군사후원연맹은 1년만에 군사원호를 위해 92만3800엔을 지출했다.

녹기연맹

녹기연맹은 내선일체 이데올로기를 조선 사회 일반에 보급하는 사상운동으로 재조선 일본인이 중심이었다. 총력전 시기 영향력을 가장 많이 확대한 단체가 녹기연맹이었다. 녹기연맹은 재조선 일본인 2세인 젊은 일본인 대학생과 그들의 스승으로 구성된 작은 연구회에서 출발했다. 1924년 경성제국대 예과 교수로 조선에 부임한 당시 29살의 약관 ‘츠다 사카에’(律田榮)와 그의 학생을 중심으로 한 일련주의자 연구회에서 시작했다. 1933년 다른 단체와 합동해 녹기연맹으로 발족했다. 녹기연맹은 ‘인류 낙원 건설’ ‘일본 국체 정신에 준한 건국의 이상 실현’ ‘각자의 인격 완성’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츠다 가타시는 1943년 “60년 후 조선의 최상층부는 현재 10살 이하 어린이가 구성할 것이라 그들은 순수한 황국신민으로 생을 누린 부모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예측하고 신반도 건설 30년 계획으로 2세대 60년에 걸친 내선일체의 완벽한 실현설을 제창했다. 녹기연맹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파시즘 단체와 다르고 총독부의 어용단체도 아닌 ‘국가보다 한발 앞서가는 단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 (지금의 뉴라이트와 가깝겠다.)

소설가 장혁주는 기관지 <녹기> 1940년 10월호 14쪽에 “신체제는 실은 조선에서는 수년 전부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도는 내지에 희망을 걸기보다는 오히려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녹기연맹은 조선 반도를 거점으로 하는 청환 중심의 국체운동으로 나치 독일이나 파시스트 이탈리아, 일본의 총동원 운동보다도 뛰어남을 지향했다.

녹기연맹은 총동부의 기밀비 혹은 보조금으로 결성하지 않았다. 녹기연맹은 단순한 어용 단체로 보기 어렵다. 츠다 카타시의 처 츠다 미요코는 “진정한 고도 국방 국가의 건설은 여성을 무시하고는 생각할 수 없다”며 신체제하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했다. 실제 녹기연맹운 동에 동조했던 사람은 재조선 일본인 중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녹기연맹은 ‘현영섭이나 이영근’ 등 단기간에 일본인보다 훨씬 철저하고 급진적인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를 만들어 냈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

1938년 결성한 정동조선연맹은 정무총감 오노 로쿠이치로가 명예총재, 시오바라 도키사부로가 이사장에 동민회와 조선의 상공회의소, 교화단체 등의 임원 이름이 줄지어 있다. 1920년대부터 동화정책을 민간에서 추진하던 재조선 일본인 지도자가 다수 취임했다. 그들이 조선인 정계와 재계 유력자인 윤치호 최린 박흥식 박영철 조병상 김명준이나 신여성을 대표하는 손정규 김활란 등과 함께 총독부의 전시정책 수행을 위한 역할을 담당했다. 재조선 일본인 중에서도 특히 학교 교사는 황민화 정책의 실천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사를 중심으로 한 지원병 제도는 사실상 강제였다. 창씨개명은 재조선 일본인 중에서도 상당히 많은 비판이 있었다.

1941년 3월 경기도 경찰부장은 “국민총력운동에 따른 민정에 관한 건”이라는 보고에서 “총력운동의 진전에 따라 내선일체를 일반 조선인들은 내선 평등으로 잘못 생각해 봉급생활자와 같은 사람은 조선인에게 가봉을 지급하는 것에 대한 희망을 품고 집회에서도 동권을 요구하며 매사에 거수 질문을 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기록했다.

1942년에 발표한 징병령 시행에 대한 재조선 일본인의 반응은 시기상조로 보고 불손함을 더해 가는 조선인의 태도가 더욱 조장되는 것을 우려했다. 재조선 일본인은 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의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들임과 동시에 철저한 반대자였다.

8장 춘원 이광수와 민족주의 - 곽준혁 고려대 정외과 교수

춘원 이광수의 친일 협력이 변절 또는 전략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지배의 논리’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광수의 민족주의적 담론들이 반제국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제국주의의 바탕에 깔린 지배의 논리를 수용했다고 본다. 이광수가 자발적 예속화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한 근거에는 지배에 대한 열망이라는 ‘식민적 주체성’이 작용하고 있었다. (‘식민적 주체성’이라, 이렇게 말장난이나 치고 있으니 인문학이 망하지)

춘원 이광수(1892-1950)의 문화적 민족주의와 황국적 애국심을 지배의 논리로 살펴본다. 이광수의 민족주의적 담론이 반제국주의를 표방하지만 제국주의가 기초한 지배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이광수의 문화 개조론과 황국적 애국심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전자는 니체적 상상력에서 생긴 문명을 통한 지배에 대한 열망으로 후자는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배를 위한 종속이다.

최근 국내외적으로 친일은 반민족, 저항은 민족적이라는 이분법에 대한 반론이 거세다. 친일파 또는 변절자로 낙인찍혀 도외시했던 담론들을 일제하 근대화를 추진했던 민족주의자들의 전략적 선택으로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이다.

이광수는 1910년 후반부터 이미 ‘선실력 양성, 후독립’이 아니라 친일 협력으로 경도돼 있었다. 박찬승은 1910년대 이광수는 독립을 사실상 포기하고 문명개화론에 입각한 동화주의적 실력양성론을 주창했다고 본다. 이광수의 친일파로의 전락은 일본인 주도의 근대화에 대한 동경이 주된 원인이었다. 조관자도 이광수의 친일협력의 원인을 문명화에 대한 욕망, 강자에 대한 동화열망에서 찾는다. 따라서 이광수의 친일은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이광수의 사상에 이미 내재화된 자지 타자화의 당연한 결과다.

필자는 이광수의 황국적 애국심을 파시즘적인 요소와 함께 제국에 대한 열망으로 조명함으로써 그의 친일 행적이 생존을 위한 협력이 아니라 지배을 위한 종속이었다는 점을 밝힌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에서 니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니체 사상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1913년 소설가 나스메 소세키의 친구인 와스지 데스로가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중심으로 <니체 연구>를 출판했다. 1920년 <개벽> 2호에 묘향산인(김기준의 필명)의 <푸리드리히 니체 선생을 소개함>이란 글에는 “윌슨이 파묻히고 로이드 조지가 머리를 들도다. 사탄의 해가 밝았도다. 믿을 것은 무엇이냐. 다만 힘이다. 의지의 자력이다. 니체 선생을 두어 마디로 소개함이니 더불어 큰 느낌이 있었으면 행(복)이라”고 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이광수는 일본의 파시즘을 자발적으로 수용한다. 이광수는 이미 1930년대 초반부터 이탈리아 파시즘에 호감을 보였다. 이광수는 오래 전부터 그의 의식 속에 잠재된 제국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로마 공화국보다 로마제국에 관심이 있었다. 로마제국은 그의 머리 속에서 1940년대엔 일본 제국으로 전환했다.

9장 제국의 딸로서 죽는다는 것 - 헬렌 리 연세대 교수

제국의 딸은 식민지 조선에서 나고 자람 일본인 상류층 여성 ‘아사노 시게코’의 일지 <야마토주주 닛키>를 분석했다. 조선 어린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자 했던 아사노의 영웅적 노력을 담았다.

<야마토주쿠 닛키>는 1942년 1월1일부터 4월29일까지 쓴 ‘아사노 시게코’의 일기다. 아사노 시게코는 1922년 4월 경성 죽첨정(충정로)에서 태어나 평양 야마테 소학교와 전남 광주소학교를 거쳐 광주고등여학교에 들어가 졸업은 경성 제2고등여학교에서 했다. 21세 이던 1942년에 폐결핵으로 죽었다. 아사노 시게코의 아버지 아사노 츠토무는 나가노 태생으로 동경제국대 농학부를 나온 엘리트로 조선총독부 고등관 3급으로 경기도 산업부 산림과장을 역임했다. 그녀의 일기는 1944년 조선 녹기연맹을 통해 추모 헌정물로 출간됐다. 녹기연맹 설립자 츠다 사카에의 부인인 츠다 세츠코가 이 책 서문 “아사노를 기리며”를 썼다.

아사노 시게코는 녹기연맹이 여자 고교 졸업생 양산을 염두에 두고 운영했던 1년제 교육기관 세이와여숙의 학생이었다. 1934년 설립한 세이와여숙은 츠다 가문의 여자들이 태평양전쟁 막바지까지 운영했다. 츠다 사카에의 어머니 츠다 요시에가 교장으로 츠다 사카에의 아내 츠다 세츠코가 부교장으로 있었다. 그의 처제는 강사였다. 1935년 약 22명의 학생이 등록했다. 매년 20-30명을 유지했다. 소수가 등록하고 권위 있는 인사의 추천으로 입학을 허가해 경성 지역 일본 여성 거주자들 가운데 상류층을 대상으로 삼았다.

세이와여숙 학생들의 주요 과외활동 가운데 하나는 경성부 ‘야마토주쿠’에서 자발적인 일본어 교육이었다. 아사노의 일기에 따르면 야마토주쿠는 가난한 반도 아이들에게 무료로 강의를 해주는 곳으로 묘사돼 있다. 공식 명칭은 ‘야마토보호관찰소’인 야마토주쿠는 주로 조선 내 사상 전향자를 관찰하고 감시하며 선도하던 기관이다. 아사노 시게코는 일기에서 야마토주쿠의 소장 나가사키를 “조선반도의 히틀러는 나가사키 씨라고 일컫고 싶다”고 표현해 공경하고 있다.

아사노 시게코는 빈곤층 조선 아이들에게 자원봉사로 일본어를 가르쳐 전시 국가의 황민화 운동에 참여한 조선 거주 일본인 여성으로 제국의 딸로 자신의 위치를 규정하고 협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젊은 일본 여성은 이중속박을 받았다. 좋은 주부와 어머니가 되려는 기술을 배우고 식민지에서 벌어질 문화적 도덕적, 성적인 훼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일본성을 지켜야 했다.

유럽인 식민자 사회를 다룬 책인 스톨러의 <육체 지식과 제국 권력<에서는 인도네시아 거주 네덜란드인의 일상생활 공간에 대한 분석으로 식민지 카테고리의 형성과정을 밝혔다.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유럽인 식민거주자가 제국의 식민자로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 제국 본국의 문화를 고수하고 정서적 수준에서의 문화적 감성을 키워 나갔다.

194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 여자 아이들에 대해 제국의 어머니로서의 잠재적 능력이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이 일었다.

아사노의 일기는 주로 황민화 프로젝트에 동참하고자 하는 그녀의 헌신을 기록했지만 동시에 언어교육의 실패가 어린 아사노에게 매우 큰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아사노는 1942년 5월5일 고열로 경성의전 병원에 입원한 뒤 6월23일 죽어서 청엽정(용산)의 자택으로 돌아온다. 1941년 우생 결혼을 장려하고자 일본은 결혼 위생전람회를 열고 1933년부터 도쿄 시내엔 결혼상당소가 문을 열었다. 1936년 일본 후생성이 결혼 보호법과 함께 발표한 ‘결혼 10훈’으로 당시 일본정부가 추진했던 결혼정책을 엿볼 수 있다. “건강한 상대를 고른다. 나쁜 유전자를 가지지 않은 자를 선택한다. 근친결혼은 가능한 한 피한다. 국가를 위해 낳고 번창하라”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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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류의 사람들 대학에 쎄고쎘는데 그 연원이 참 기구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