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전 우리는 이주노동자와 함께 파업했다

[낡은책 13] 북한학계의 1920, 30년대 노농운동 연구

[낡은책] 북한학계의 1920, 30년대 노농운동 연구 (김경일 편, 창비, 1989.9.15, 403쪽)

일제하 노동운동을 읽으려면 ‘경성트로이카’를 읽으면 안 된다. 웬 듣보잡이 이런 책을 냈지만 1930년대 이재유를 읽으려면 김경일 교수의 ‘이재유 연구’를 읽어야 한다. 90년대 초 숨어있던 이재유를 발굴할 만큼 내공 있는 사람이 김경일 교수다.

진짜 일제하 노동운동을 읽으려면 김경일의 ‘북한학계의 1920, 30년대 노농운동 연구’(창비, 1989, 403쪽)와 역시 창비에서 나온 ‘일제하 노동운동사’를 두 권을 읽으시라. 이 책은 북한 거시기철학이 완벽하게 완성되기 전 1950-60년대 북한학계의 <력사과학>에 실린 일제하 노동, 농민운동에 관한 연구논문을 모은 것이다. 김 교수가 굳이 ‘1950-60년대’ 논문에 주목한 이유는 거시기철학으로 모조리 정리되기 전이라 다소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객관적 연구결과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 7.7선언 이후 북한 원전이 남한에 소개됐지만 일반인은 물론이고 연구자조차 자료 이용에 많은 규제와 제약을 받아야 했다. 김 교수는 그 와중에도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을 다룬 ‘1921년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과 ‘1929년 원산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교훈’, ‘1930년 신흥 탄광노동자들의 전투적 폭동’ 등을 읽고 분석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역사적 단절 속에서 비연속적으로 진행돼 실패를 통한 경험과 교훈의 축적이 전혀 없다. 80년전 개마고원 골짜기에서 벌어진 탄광파업에 프랑스 노동자가 연대메시지를 보내고, 부산과 원산에서 이주노동자(중국, 일본)와 공동으로 파업하고, 인근 농민들이 파업 노동자에게 밥을 해 먹이는 연대의 장면을 보면 지금의 우리는 80년 전보다 못하다.

지금의 우리를 만든 역사를 모르니 늘 그 수준에서 서로 헐뜯고 말다가 다시 적들에게 포위돼 사멸하고 만다. 우리 역사에서 노동운동의 사멸은 1929년, 1937년, 1949년, 1961년, 1972년, 1980년 등 수없이 많다. 그 때마다 우리는 늘 바닥에서 다시 시작했다. 경험과 교훈은 커녕 종이 한 장 자료로 남은 게 없으니 늘 일본,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북유럽 노동운동을 기웃거린다. 요새는 남아공, 브라질, 베네수엘라까지 금지옥엽으로 떠받들고 산다. 답은 우리 안에 있다. 그것도 벌써부터 있었다.

노동자 투쟁에서 우익 기회주의가 문제라면 ‘원산 파업’을, 좌익 모험주의가 문제라면 ‘신흥 탄광’을 읽으면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정파의 폐해가 문제라면 북한 역사학계의 기관지 <력사과학> 1958년 1호에 실린 최웅철의 ‘1920년 조선에서 노동계급의 상부구조 형성에 끼친 종파분자들의 해독성에 대하여’라는 연구논문을 읽어 보시라. 지금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음에 놀랄 것이다.

이번 낡은 책은 김경일 교수가 소개한 순서대로 9편의 논문을 요약해 소개한 뒤, 김 교수가 ‘해설논문’이란 이름으로 총정리한 별도의 글을 맨 뒤에 요약했다.


1. 우리나라에서 노동계급 형성 과정과 그 시기 - 권의식 1966년

필자(권의식)는 이 논문에서 우리나라 노동계급 형성의 역사적 과정과 그 시기문제 해명을 시도했다. 우리나라 노동계급 형성에 관한 맑스-레닌주의 창시자들의 사상과 필자는 차이가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경제적 제조건은 우선 인민대중을 노동자로 전화시켰다”고 말했다. 레닌은 “개별적인 주인들이 아니라 전체 자본가계급과 이 계급을 지지하는 정부를 반대해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는 그때에 비로소 계급투쟁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맑스-레닌주의 창시자들은 계급투쟁을 첫째 노동자 투쟁을 전국 규모에서 연결했을 때만이 계급투쟁이 된다. 둘째 노동계급의 선진분자들의 자각과 그에 기초한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셋째 노동자들의 전국 규모의 조직에 고착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생 : 1880-1890년대 개항과 관련 경제생활에선 새 변화가 생겼다. 부두노동자는 세 부류로 나뉜다. 1) 선박에 짐을 싣거나 부리는 하역꾼, 2) 육지에서 짐을 운반하는 지게꾼, 3) 계량과 재포장에 고용된 두량꾼이었다.

1903년 목포 부두노동자 총파업에 3400명이 참가했다. 주요 도시의 부두노동자 총수는 만 명을 훨씬 넘었다. 광산업 활기는 덕대제 같은 자본주의 경영방식이 지배했다. 광부 수가 4-5천 명에 달하는 광산이 존재했다. 1890년대 외국인 탐사자는 219개 광산을 밝혔다. 전국 광부 수는 모두 8만 명이었다.

초기운동 대부분은 폭동이었다. 1888년 6월 함경도(현재 강원도) 고산군 초산역에서 광점꾼이 봉기해 찰방 아사를 들이치고 65동 가옥을 소각하고 9명을 죽였다. 정부는 영흥부사를 안핵사로 파견, 진압했다.

1890년대 광산 이권이 외래 독점자본가들에게 점탈되자 광점꾼들은 이에 반대했다. 1895년 미국인 자본가는 운산금광의 이권을 점탈했으나 그 지방 노동자가 고용되기를 반대해 채광을 못했다. 목포에선 1898년 2월부터 해마다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부두노동자 파업이 일어났다. 1920년대 들어서면서 지방 노조를 전국 규모에서 결합하려는 시도와 맑스-레닌주의와 노동운동을 직접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

1923년 7월 경성 고무공장 여공 파업은 4개 공장 120여 명이 망라된 파업으로 처음부터 조선노동연맹회의 지도로 진행했다. 30여 시간의 아사 연좌데모를 진행했다. 서울서는 사상단체가 파업 동정단을 조직하고 원호운동을 전개했다. 파업노동자들은 2주일간 완강한 투쟁으로 자기요구를 관철시켰다. 이 파업에서 맑스주의 소조들은 파업의 조직적 지도를 담당한 노동단체와 그를 사회적으로 후원한 ‘동정단’을 통해 군중 속에서 사회주의적 선동을 전개했다.

1920-1923년 동안 노동운동이 맑스-레닌주의와 결합되며 운동의 전국적 연대성이 실현되는 시기였다. 우리나라에서 1923년 하반기부터 1924년 상반기에 이르는 시기에 노동계급 형성의 제반 징표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졌다. 1925년 조선공산당의 창건도 있었다.


2. 일제 강점하(1920년대) 조선 노동계급의 생활상태 - 리종현 1961년


<표2> 직업별 임금통계(일일 임금) (단위:원)
  통계기준 1922년 7월말 현재 [출처: <회사 및 공장에서의 노동자 조사>, 10-11쪽, 조선총독부, 1923년]


이 자료는 다소 뻥튀기가 있다. 이를 감안할 때 1920년대 초 조선인 노동자 1일 평균인금은 50전이 타당하다. 그 돈이면 한 달 동안 하루도 안 쉬고 일해도 15원을 고작 번다. 또 1920년대 초 조선에서의 의식주와 관련된 생계비는 아래 표와 같다.

<표6> 1개월간 생계비 (하류층) (단위:원)
  통계기준 1921년말 현재 *(중류층)의 합계는 108.16원 [출처: <선만의 경영> 중편, 43쪽, 호소이 하지무]


조선 노동자들의 1개월 수입 15원은 보통사람들의 1개월간 생계비 108원의 1/7에 불과했고 최하층 생계비의 1/4에 불과했다. 이 역시 허위 숫자다. ‘처대인부(부인과 아이가 있는)’의 생계비는 날마다 32전의 잔액이 아니라 30전8리씩 적자를 보고 있다.

이런 사정에 대해 <동아일보>는 1924년 5월16일자에서 “경성부내 재봉직공 모(某 38세)는 31살 아내와 68살 노모와 12살의 아들이 한 가정을 이루어 지난 삼동을 무사히 지내고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하는데 이 가정 전가족의 수입은 한 달에 겨우 12원으로 조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지 아니할 수 없게 했다. 욕망과 구매 욕구를 모두 죽여 버리고 자못 목숨을 이어감에 전력을 다할 뿐이다. (중략) 이들의 생활비를 보면 쌀 1원54전, 잡곡 5월85전, 신탄 60전, 담배 30전, 성냥 3전, 고기 75전, 야채 26전, 선어 10전, 두부 5전, 떡 30전, 전차비 15전으로 합계 10원16전. (중략) 얼굴 씻는 것이 ‘산다’는 것과 하등 관계가 없으므로 땀과 기름에 젖인 얼굴로 예사롭게 몇해 동안이고 지나간다. (중략) 일가 4인의 가족 저들은 참으로 ‘배를 채운다’는 그것이 천부(天賦)한 인생의 목적이라고 그 이외에 더 생각할 수 없으리만치 피곤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1921년 9월 23일에도 부산 부두노동자들의 생활을 그리는 기사에서 “아침 밥, 저녁 죽을 끓여먹을 것을 벌어야 비로소 생활을 계속해 갈 터인데 요사이 같이 벌이가 없어서는 도저히 살아 갈 수가 없음”이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1926년 11월 13일에는 탄광노동자의 생활을 그리면서 “회령 계림탄광에서는 (중략) 약 3년 전부터 이익이 박하다는 구실로 고부(雇用人夫)의 임금지불을 태만하여 일상 고부측에 불평이 극심할 뿐만 아니라 고부의 생활상 지장이 막심하였고 근일에 이르러서는 1일 조석반도 먹을 수 없음”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사실상 전혀 입쌀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노동자들은 불경기때는 기아선상에서 헤맸다.

동아일보 1922년 12월 10일에는 서울시내 노동자 생활을 그리며 “서울시내 양화공들은 (중략) 임금을 40전씩이나 내리면 어찌 먹고 살 수가 있으리오. 세창 양화점 직공 정룡식 군은 말하되 ‘요사이 일이 없어 우리는 2-3일에 구두 한 켤레씩을 만드는 터라 하루 수입이 겨우 60-70전 밖에 되지 아니합니다. 겨우 먹으며 굶으며 살아가는데 여기에 삯전을 더 내리면 어찌 살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보도했다.

토건 및 광산부문 노동자들의 의복상태는 극히 비참해 여름철에는 짧은 바지 하나만 입고 상반신은 나체로, 겨울이면 좁쌀포대를 둘러쓰고 사는 노동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 포대조차 없어 종이로 만든 시멘트포대를 두르고 겨울을 지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59년 9월 3일 당시 황해제철소 동력직장으로 일하던 원기호 동지는 1920년대 노동환경을 말하면서 “일제시기에 제철소에선 1년 혹은 2년에 한번씩 작업복을 내주었는데, 고열 앞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마대로 만든 작업복, 기타 노동자는 면직(무명)으로 만든 작업복을 내주었다. 노임에서 월부로 제했다. 1920년대 가격은 7월 내지 8월씩 했다. 당시 무명 한필에 2원50전 혹은 3원한 것을 생각하면 작업복은 사실상 시가보다 2배 이상 더 비쌌다”고 회상했다.

노동자들은 1개월에 집세를 6-10원씩 냈다. 1칸방에 7-8명 혹은 10여 명이 끼어 살았다. 봉건유습에 따라 일제시기에 도시에서 가옥을 소유한 주인 ‘양반’들은 자기 행랑방을 노동자들에게 빌려주고 방세 대신 노동자 가족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일제 어용학자인 경성제국대 사꾸라이 교수는 <노선에서의 룸펜>이란 논문에서 서울 근방의 토막민 부락에는 전형적 룸펜들만이 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기만술책이었다. 토막민들의 절대다수는 방직노동자, 제지노동자들을 위시한 공장노동자들과 자유노동자들이었다. 러시아에 보관된 <식민지 민족문제에 관한 자료>(318권, 1933년 모스크바, 50쪽)에는 ‘토막민의 직업통계’가 나온다. 여기엔 1928년 서울 근교 토막민 1143명 가운데 날삯꾼이 361명, 지게꾼 91명, 점원 28명, 목수 28명, 인력거꾼 25, 채석공 20, 손달구지꾼 16, 공장노동자 15, 야채장사 15, 과일장사 11, 방직공 11, 운송부 7, 기름장사 4, 미장이 1명 등으로 나타나 대부분 실업과 고용을 반복하는 노동자였다.

이들 노동자는 토굴에서나마 마음 놓고 살 수 없었다. 항상 일제 식민당국의 추적을 받았다. 서울 외곽 신당리 촌락은 내쫓기거나 고용주들에게 해고당한 전염병 환자들이 1928년부터 토막집을 짓기 시작했다. 일제의 갖은 탄압에도 토막민 부락은 계속 늘어났다. <식민지 민족문제에 관한 자료>(318권, 1933년 모스크바, 49쪽)에는 토막민 가구 수와 인구수가 나온다. 1928년 1143가구에 4802명이 토막집에서 살았고 1931년엔 더 늘어 1538가구 5098명이 살았다.

노동자 숙소 가운데 가장 가혹한 곳이 ‘함바’였다. 함바는 숙소가 아니라 ‘강제수용소’였다. 고용주는 함바에 각종 테러단을 배치했따. 이들은 ‘도리시마리’(취체)라는 직명을 걸고 항상 노동자들을 뒤따르며 괴롭혔다. 함바 노동자들은 자기 노임을 직접 받지 못했다. 고용주는 노동자의 임금을 함바의 밥장사에게 주었다. 밥장사는 간식을 강매했는데 대부분 탁주와 떡이었다. 십장 감독들과 결탁해 도박을 강요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노임을 사실상 받지 못했다.

공장합숙소는 보통 좁은 마루방 아니면 다다미방이었다. 동아일보는 1928년 9월 27일 공장합숙소 관련 기사에서 “이다미야 세포소(洗布所) 직공 숙실(숙직실) 육조에 11명을 자게 하며 숙실 옆에다가 변소를 만들고 숙실과 변소 사이에는 종이 한 장만 발라놓아 차마 사람이 견딜 수 없는 형편이므로” 노동자들이 항의했다. 여공들을 다수 수용하는 방직부문 공장들의 합숙조건들도 이와 같았다. 엄동설한에도 이불이 없이 지냈다. 일제시기 조선의 방직 여공중에는 월경분순, 불임증 등 각종 ‘냉병’에 걸리지 않은 여공이 거의 없었다. 기관지염과 폐병도 달고 살았다. 조선 방직여공들의 기숙사 생활은 감금생활이었다.

한지에서나 마음놓고 잠 자는 것도 아니었다. 일제경찰들은 거처가 없이 거리에서 방황하는 노동자들을 밤새도록 추적해 다녔다. 동아일보는 1925년 8월 4일 이런 광경을 “1925년 8월 3일 오전 1시반 한강 인도교 공사 청부자 ‘오데라구미’ 감독 일본인 냐나기 센이찌(35세)는 오데라구미 사무소 구내에서 자는 조선인 노동자 10여 명을 큰 몽둥이로 함부로 때려 그 중 김영배는 정신을 잃고 혼돈하여 사람을 살리라고 신음하는 소리를 질렀음...” 일본인 감독 야나기 센이찌는 한강 노래터에서 잠자는 무고한 노동자를 도둑이란 누명을 씌워 함부로 때렸다. 동아일보 1924년 3월18일 <노상에 아사체>란 기사를 썼고, 동아일보 1927년 1월4일 <원산에 나체 강시>란 기사에선 “지난 1월2일 원산부 남산동 원산리 파출소 앞에서 나이 삼십2,3세 가량된 옷 벗은 남자의 얼어죽은 시체가 있었다더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 1927년 1월4일엔 <인천에 강시 속출>이란 기사에서 “18일 밤에 두 명이 얼어죽었다”고 보도했다. 조선총독부 자료 <조선에서의 범죄와 환경>엔 행려사망자 수가 1915년엔 1740명에서 1920년 2147명, 1925년 3441명으로 늘어가고 있다.

자살자 수도 해마다 늘어가고 있었다. 동아일보 1924년 9월 20일자엔 “서울시내 연건동 273번지 김우식의 둘째아들 김주룡(24)은 어제 오전 3시경 집안사람이 없는 틈을 타 자살하려고 ‘모르히네’를 먹고 고민 (중략) 자살하려던 원인은 늙은 어버이 아래 형도 있고 동생도 있으되 다 같이 노는 몸으로 요사이같이 돈이 귀할 때 살아갈 수 없으므로 세상을 비관해 이같이 죽으려 하던 것이다. 서울 창신동 61번지 호주 한필용(37)도 수일 전 새벽 3시경 고용한 틈을 타 양잿물을 먹은 걸 같이 자던 사람이 발견 (중략) 그 원인도 역시 생활난으로 가족이 7명이 있으되 벌이할 곳이 없어서 끼니를 굶는 지경인데 철없는 아디들은 무심히 밥 재촉만 하므로 모든 쓰라린 것을 차라리 죽어서 잊어버리는 편이 낫겠다고 이같이 죽으려던 것이라더라”고 보도했다.

조선총독부 자료 <조선에서의 범죄와 환경>엔 기아 수도 해마다 늘고 있었다. 기아는 1920년 96명에서 1925년 155명으로 늘었다.


3. 1930년대 조선 노동계급의 구성에 대하여 - 리국순 1963년

노동계급의 수효가 1930년대 급속히 성장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연감> 1936년판에는 조선의 노동자 총수가 1934년 10월10일 현재 102만3191명이었다. 공장과 광산, 토건노동자를 집계한 <조선의 경제>(259쪽)에는 1933년 이들 노동자가 21만3729명에서 1937년 49만4776명, 1938명 59만9798명으로 늘었다. 조선총독부 국세조사에 따르면 도시에 진출한 농촌인구도 1930-1935년 동안 약 30만명에 달했다. 1932년도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실업자는 141만9970명이었다.(<태평양> 제3호, 18쪽) 이 숫자엔 농촌의 과잉인구는 빠졌다.

일용노동제는 직공제보다 적은 임금을 지불하면서 더 많은 노동력을 짜낼 수 있어 각종 교묘한 방법으로 착취의 도를 강화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연감> 1936년판에 따르면 1934년 10월10일 현재 조선의 일용노동자 수는 89만1402명이었다. 일용 인부와 기타 노동자를 합친 수는 당시 전체 노동자의 87%를 차지했다. 자본가들은 토모 건축 운수 광산 농업부문 등에서 거의 일용노동제를 적용했고 공장에서도 많은 경우 일용노동제를 실시했다.

1932년 현재 조선인 남성 직공노동자들은 일급 94전, 여성 직공노동자는 57전을 받을 때 건설부문 ‘막벌이꾼’ 남성노동자는 16시간 노동에 일급 25전, 여성노동자는 일급 15전을 받았다. (<태평양> 3호, 47쪽) 혹심한 착취형태로는 건설 토목공사, 운수부문 등에 적용한 청부업체나 광산의 덕대제 등도 있었다. 이런 제도는 2중3중의 중간착취와 횡령을 낳았다.

‘징용’에 의한 강제징발은 일제통치 말기에 와서 격증했다. 1944년 현재 조선인 징용자는 117만6109명에 달았다. 당시 전체 노동자 수 200만 명과 비교하면 절반 이상이 강제징용자였다.

노동계급의 민족별 구성

1939년 현재 전체 공장노동자의 15.3%가 일본인 노동자였다. 일본인 노동자도 일본 독점자본에 착취당했다. 이들 중 선진 노동자들 일부는 조선 노동자의 혁명적 조직에도 참가했고 파업투쟁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일본인 노동자 중에는 조선 노동자들의 골혈에서 나온 이윤의 일부로 부양받는 노동귀족도 적지 않았다. 일본인 노동자 임금은 기술 기능수준과 노동생산능률에 관계 없이 보통 조선인 노동자 임금의 2배를 주었다.

<조선경제연보>(조선총독부, 1940년판)에 따르면 1937년 조선인이 공장주인 공장 수는 2504개로 전체 공자 수의 40%였지만, 종업원 5-50명 이하의 공장이 90%였고 200명 이상 노동자를 가진 조선인 소유의 대공장은 불과 30개 밖에 없었다. 1939년 4월 현재 서울 시내 공업기업가 1029명 가운데 543명은 휴업 또는 실업상태였다. 이 543명 가운데 절대다수가 조선인이었다.

조선인 노동자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와 동일 노동조건에서도 그들의 반액도 안됐다. <조선경제연감> 1934년판에 따르면 남자 성인의 하루 임금에서 조선인은 90전, 일본인은 1원94전이었다. 여자 성인의 하루 임금에서 조선인은 55전, 일본인은 94전이었다.

광산과 탄광 등에서 노동재해는 극심했다. 동아일보는 1931년 12월11일자에서 “1931년 1년 동안 산재 사상자 수가 전체 광산과 탄광 노동자 수의 약 10%인 3052명을 차지했다”고 보도했다. 일제는 군사적 기밀이 누설된다며 ‘특수공사’ 끝에는 계획적으로 공사에 동원한 많은 노동자들을 집단 생매장했다.
파산 몰락 위기에 직면한 조선인 자본가들은 이윤추구의 방도와 현상유지의 탈출구를 노동강도 강화, 노동시간 연장, 임금 삭감 등에서 찾았다.

노동계급의 성별, 연력별, 기술기능 정도

공장부문 미성년 노동자들의 성장을 보면 1928년 현재 16세 미만 노동자가 8567명이었는데 1940년에는 3만163명으로 늘었다. 1930년대 조선인 노동자들의 평균적 기술기능 수준은 1920년대에 비해 더 떨어졌다.


4. ‘조선노동공제회’와 ‘조선노동연맹회’가 수행한 역할 - 권의식 1961년

1920년으로부터 1924년에 이르는 기간에 우리나라 노동조합운동은 조선노동공제회와 조선노동연맹회를 중심으로 자기 발전의 첫 단계에 처해 있었다. 1919년 조선엔 20여 개의 노동자 조직이 있었다. 조선노동공제회와 조선노동연맹회는 한계가 있지만 자기 활동으로 노동운동과 노조의 전국 규모 연결을 촉진시켰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1926년판에 따른 ‘공장 및 노동자 수 통계’는 1910년 252개 공장 수에 노동자 수 1만4575명이었다가 1914년 654개 공장에 2만963명으로 늘었다. 1920년엔 2087개 공장에 5만5279명, 1923년엔 3499개 공장에 6만9412명으로 늘었다.

1919년 3.1운동 가운데 84건의 파업이 일어나 8천여 노동자가 참가했다. 인텔리들은 1920년 4월11일 서울에서 차금봉 등 286명의 발기인과 678명의회원으로 ‘조선노동공제회’를 결성했다. 발기인 중에는 차금봉 같은 노동자 출신도 있었지만 일부 영리가, 민족개량주의자가 적지 않았고 ‘유지 신사’라 불리우던 인텔리도 다수를 차지했다. 회원은 직업별로 대다수가 서울시내 지게꾼, 인력거꾼, 물장사, 나무장사, 엿장사, 신물배달 등과 일부 정미공, 연초직공, 인쇄직공들이었다.

정처 없이 유동하는 실업자와 일용노동자 문제가 당시 가장 절박한 사회문제였다. 조선노동공제회는 자유노동자와 농민 속에서 사업했다. 공제회는 1920년 9월 평양 대구 인천 등 9개 지회를 두고 1921년 3월엔 15개 지회에 1만7259명의 회원을 거느렸다. 공제회는 노동자 계몽과 공제를 과업으로 삼았다. 1920년 9월에 나온 조선노동공제회 기관지 <공제> 창간호는 “노동사회의 조직과 제도를 개선함이 최후의 이상”이라고 했으나 이는 장래의 문제고 당면하게는 “노동자 교육, 경제, 위생 등 3문제” 해결을 과제로 했다. 공제 창간호는 아직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지는 않았다. 무정부주의적인 경향, 소부르조아 개량주의, 기독교 경향을 반영했다. <공제> 2호 ‘노동운동의 사회주의적 고찰’에서 “현재의 노동문제는 노동자 해방의 문제”라고 밝혔다. 동시에 이 해방은 “재능대로 생산하고 수용(需用)대로 소비하기까지” 이르러야만 완전하다고 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1921년 4월의 <공제> 7호가 겨우 나왔다. 드디어 <공제> 7호에 맑스의 ‘유물사관 개요’를 소개하면서 ‘노동가치설 연구’도 실었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앙양하는 노동운동을 반대해 소위 ‘노동문제 상조론’을 유포했다. 잡지 <공제>는 민족개량주의에 반대하는 글도 실었다. 잡지 <공제>는 이 반동적 ‘노동문제 상조론’을 비판하면서 조선사회가 식민지 반봉건적 제특성을 지녔지만 자본주의의 본질이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노동문제는 가장 절박한 사회문제라고 논증했다. <공제> 8호의 ‘노동문제 통속 강좌’는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일련의 문제를 제기한다.

노동야학회 강사들은 직접 노동운동을 지도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1921년 9월 부산 부도노동자 파업 때 노동야학회 강사들이 고용주측에 제출할 선언서를 작성했고 파업 노동자들을 도왔다. 일본경찰이 파업 주모자로 체포한 30여 명 중에서 다만 노동야학 강사 4명만을 선동혐의로 공판에 회부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었다.

1921년 7월 조선노동공제회 시설부는 서울 외곽 성동에 성동소비조합을 열고 쌀과 일용잡화를 도매가격으로 팔았다. 이는 회원들을 소매상인의 중간착취로부터 보호했다. 공제회는 산업노동자들을 자기 대열에 결속하지 못하고 실제 2년 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제회는 노동계급의 각성과 맑스주의 보급을 촉진했고 조직적 활동으로 노동자들의 연대성을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조선 노동조합운동 발전의 길을 개척한 선구자였다.

1921년 9월 부산 부두에서 일하던 운송노동자 등 5천여 명의 노동자가 4-5할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선언서를 고용주에게 제출하고 고용주 연합세력과 경찰의 탄압에 맞서 완강히 투쟁했다. 공제회 경성본회는 자기 대표를 현지 부산에 파견해 관여했다. 파업자들은 요구를 관철하지는 못했으나 부분적으로 승리를 따냈다.

조선노동공제회 본회와 지회 지도부에 소부르조아 인텔리, 민족개량주의자, 고용주들이 들어와 조직발전을 가로막았다. 공제회 평양지회는 약방과 병원을 경영하는 한방의와 의사로 구성됐고 개성지회는 전 군수 경력자와 합자회사 전무, 병원 경영주 등 지방유지가 중심인물이었다. 경성 본회의 지도부안에도 사태는 극히 좋지 않았다. 지도부 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소부르조아 인텔리들은 대중을 제도로 제도할 수 없었다. 이들은 오직 자기 그룹의 세력확장을 위해 예외 없이 다른 그룹을 배척했다. 이런 분열 파괴행위로 말미암아 대중운동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공제회 지도층도 이런 종파-분열주의자들의 책동으로 크게 2개 그룹으로 분열했다. 1922년 가을부터는 조선노동연맹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1922년 여름과 가을에 조선노동공제회 지도부의 분열은 더욱 수습하기 어려워졌다. 지도부를 구성하는 한 개 그룹은 1922년 10월 15일에 소집한 모임에서 조선노동공제회의 해산을 일방 선언하고 지방지회를 모두 독립시켜 새로 조선노동연맹회를 창립할 것을 결의했다.

다른 한 개 그룹은 해산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조선노동공제회의 사무실을 옮기고 계속 간판을 붙여두었다. 조선노동연맹회의 활동에서 종파주의적 분열, 수공업주의적 협애성, 아전인수하는 이기주의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조선노동연맹회가 이미 존재하던 단체들에 비해 현저히 앞선 강령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동아일보 1922년 10월21일자에 실린 “조선노동연맹회 강령은 1) 신사회건설, 2) 생활을 개초키 위해 지식의 계발, 기술의 진보 3) 현사회의 계급적 의식으로 일치단결”을 담고 만국의 노동자와 단결해 분투코자 한다고 밝혔다.

1923년 5월1일 조선노동연맹회는 ‘메이데이 기념강연 선전’를 배포하고 2천여 명의 군중을 모아놓고 강연회를 열었다. 연맹회는 당시 서울서 일어났던 주요 파업에 직접 관여해 지도했다. 1923년 7월 서울의 3개 양말공장 노동자들이 임금삭감에 반대해 파업할 때 연맹회는 자체 주선으로 서울시내 10개 양말공장 노동자 200여 명을 모아 ‘경성 양말직공조합’을 조직했다.

경성 고무공장 여자직공들의 파업 때 연맹회는 파업초기부터 지도했다. 연맹회는 광화문 밖 4개 고무공장 여공 100여 명의 집회를 조직하고 요구조건과 대표를 결정해 고용주들과 단판케 했다. 1922년 46건의 파업에 1799명이 참가했는데 1923년엔 72건의 파업에 6041명이 참가했다.

종파분자들은 대중조직뿐만 아니라 추악한 종파적 목적을 위해 사기와 테러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일제경찰에 다른 정파의 체포 구금을 소송하기까지 했다. 연맹회는 이후 1924년 4월 전국의 노동단체들을 연합한 조선노농총동맹에 연합했다.


5. 1921년 부산 부두노동자들의 총파업 - 리종현 1961년

부산 부두노동자들의 총파업은 우리나라에서 노동계급이 반일 민족해방운동을 영도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역사무대에 진출하기 시작한 첫 시기에 전개된 가장 큰 총파업이었다.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은 높은 계급의식과 조직성을 보여주었다.

조선을 감정한 뒤 식민통치의 경제적 체계를 확립한 일제는 1920년대에 와서 백방으로 식민지 약탈을 강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막대한 전시 초과이윤을 획득한 일본 독점자본가들은 상품수출과 함께 자본 수출에 대한 요구도 컸다.

1921년도 부산항을 통과한 수출입총액은 6400만원으로 전 조선항만을 통고하는 수출입 화물총액의 30-40%를 차지했다. 이처럼 부산엔 화물운송에 종사하는 부두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었다. 1921년 부산에는 약 4만3천명의 조선인 주민이 살았다. 이 가운데 3만여 명이 노동자와 그 가족이었다. 운수노동에 종사하는 부두노동자 수는 약 5천명이었다. 그 가족까지 합치면 약 2만5천명에 달했다. 이는 부산 전체 노동차 총수의 80% 이상이 부두노동자였다는 것이다.

1921년 9월 총파업 당시 취업상태를 보면 한 달에 15일간 노동을 하면 행운이고 일감이 적을 때는 10일 정도만 취업했다. 부두노동자들은 밤을 새워 기다리다가 새벽에 인부감독이 내주는 만보(인부에게 일을 시킨다는 뜻의 순 우리말)를 타야만 했다. 첫 새벽부터 어두운 밤까지 하루 15-16시간 노동을 해도 겨우 1원 미만의 임금만 받았다. 동아일보는 당시 부산 부두노동자의 생활을 1921년 9월 29일자에 “하루 1원을 번다 할지라도 평균으로 계산하면 한 달에 15일 동안 벌이가 있는 달이야 겨우 15원 밖에 못되고 적은 달은 불과 10원이 못 되는 실지에 그와같이 약소한 임금으로는 도저히 자기 몸 하나도 구제할 수 없는 터인데 어느 하가에 처자를 먹여살릴 수가 있으리오”라고 보도했다.

일제의 어용학자 호소이는 <선만의 경영> 중편 39쪽에서 “부산에는 약 3천명의 짐꾼들이 있는데 약 1500명은 집도 없고 부엌도 없어 주포에서 음식을 먹고 밤에는 주포에서 잠을 잤다”고 말했다. 1912년부터 1917년까지만 해도 해마다 파업투쟁이 1건 내지 9건 미만이었다. 1918년엔 50건으로 급증했다. 1919년엔 84건, 1920년엔 81건으로 각각 성장했다. 1918년부터 파업은 양적으로만 성장한 게 아니라 투쟁의 성격도 적지 않은 발전을 보였다.

1919년 10월12일 경성 동아연초회사 노동자 175명은 1)임금 20전 인상 2) 수당 50% 인상 3) 8시간 노동제 실시 4) 상여금 지불회수의 증가 등 요구를 내걸고 파업했다. 이들은 파업을 17일간 계속해 요구를 기본적으로 관철했다. 서울 동아연초공장 노동자 파업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8시간 노동제’요구를 내건 파업이었다.

1919년 11월14일 겸이포(송림) 제철소 용해공 파업은 더욱 과감했다. 이 파업은 선진인텔리와 혁명적 노동자가 지도했다. 11월14일 새벽 작업교대시간에 주야교대 직공 250명이 1)임금 50% 인상 2)8시간노동제 실시 3)상여금 증액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공장은 헌병대에 연락해 노동자 대표를 체포했다. 격분한 파업노동자들은 용광로 후풍을 멈추었다. 전투적 용해공들은 헌병의 탄압을 무찌르며 용광로를 점령했다. 이 파업엔 조선인 노동자를 선두로 중국인과 일본인 노동자가 공동으로 투쟁했다. 1920-1921년 전후 경제공황, 1923년 일본 관동 대지진으로 경제위기 등등은 실업자 속출과 노동임금의 부단한 삭감을 초래해 노동자 형편은 더 나빠졌다. 1921년 9월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은 이런 환경에서 나왔다.

운수업자는 전후 경제공황의 손실을 노동자에게 전가시키려고 부두노동자들의 임금을 계속 삭감했다. 1921년 1월 임금을 30% 삭감하고 4월에 다시 20%나 삭감했다. 동아일보 1921년 9월30일자는 “9월 들어 다시 임금 삭감 소식이 전파돼 당장 밥거리가 없어서 처자들은 기갈에 울고 있는 이때 또 이런 청천벽력같은 공포의 소리가 들리는 까닭에 인부들은 다시 놀래고 다시 새로운 공황을 일으키게 하였다”고 보도했다. 부산 부두노동자들은 사회주의 10월 혁명의 경험과 각국 노동운동과 혁명운동의 경험을 섭취할 유리한 조건이었다. 선진노동자들과 부산 노동야학교 강사들은 노동자들을 총파업투쟁으로 조직했다. 1921년 9월12일 부산부두의 석탄운반부 2천명 명의로 고용주에게 보내는 파업선언서를 제출하면서 파업을 시작했다. 이들은 임금 40% 인상을 요구했다. 석탄운반부 2천명은 9월 16-17일 2일간 파업했다. 부산시내 전체 부두노동자 5천명 대열은 굳게 결속해 투쟁 기세는 더욱 높았다. 고용주들에게 강력한 타격을 주는 총파업의 태세와 준비를 갖추었다. 임금 40-50% 인상요구는 지난 1월과 4월에 부당하게 삭감한 임금의 원상회복이었다.

경찰과 상업회의소는 온갖 어용단체를 총동원했다. 노동자 대표와 고용주는 25일까지 담판했지만 원만한 해결을 보지 못했다. 9월26일 부산 부두노동자 5천명은 무조건 총파업을 선언하고 작업을 중단했다. 부산항은 완전 마비됐다. 동아일보는 1921년 9월28일자에 이 총파업을 “25일 도착한 연락선과 지난날 아침 입항한 연락선은 짐을 부리지 못하고 그대로 하관으로 돌아가고 다른 상선도 모두 짐을 풀지 못하고 있으매....”라고 전했다. 부산 부두에 산적한 화물은 하나도 풀지 못했다. 파업자들은 “해안통과 부근 산진에 20명 혹은 30명씩 모여 의논을 계속”(동아일보 1921년 9월28일자)하면서 투쟁 기세를 더 높였다. 고용주들은 파업을 깨기 위해 부산 부근 농촌 농민들을 꾀어 하루에 2-3원이라는 높은 임금을 약속하고 화물운반작업을 계속해보려고 시도했으나 파업파괴를 위한 이런 수치스러운 노동에 농민들이 근본적으로 참가하려고 하지 않아 실패했다.

부두노동자 총파업의 타격은 비단 운송회사만이 아니라 전조선 나아가 일본경제까지 영향을 주었다. 일제경찰은 파업지도자를 검거했다. 동아일보는 1921년 9월28일자에 “경찰은 선동자라고 본 영주동 김경직과 노동야학 교사 손명표와 최태열 등 3명을 잡아 취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파업을 조직 지도하던 비밀지도부는 노동자들의 적극 옹호로 세상에 폭로되지도 않았다. 투쟁하는 부두노동자들의 투쟁 앞에 고용주들은 굴복했다. 9월29일 밤 노동자 대표 13명과 고용주 대표 7명이 부산에서 가장 큰 운송회사 ‘택산상회’에 모여 담판했다. 그러나 고용주들은 이 자리에서도 흥정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10-15% 임금인상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파업은 9월16일부터 30일까지 15일간 완강한 투쟁 끝에 노동자 승리로 끝났다.

부산 총파업의 의의는 첫째 한 개 도시의 동일한 부문의 전체 노동자가 전체 고용주를 반대해 총파업을 단행한 것이다. 둘째 부두노동자들은 자기의 굳은 단결력과 조직적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셋째 이 파업으로 노동자는 자체 조직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요구했다.

노동자들은 1922년 1월 부산에 부산노동연맹회와 부산노동회를 결성했다. 이 파업에 고무된 부산 영도의 각 공장 노동자 800여명은 1921년 10월 상순 임금인상과 대우개선을 위해 궐기했고, 라이징 썬 석유회사 지점 노동자들도 투쟁에 합류했다. 11월엔 부산 목도 경질도기주식회사 제형노동자들이 임금인상과 직공감독 배척을 요구하고 동맹파업을 벌였다.


6. 1929년 원산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교훈 - 윤형빈 1964년

일제경찰의 문서 <최근에 있어서의 조선의 치안상황>(143쪽)에 따르면 조선의 파업 규모는 1921년 36건에 참가자 3403명에서 1925년 55건 5700명, 1928년 119건 7759명으로 늘었다.

1928년 말 공산당 해산에서 교훈을 찾고 대중 속에 들어간 공산주의자들의 지도하에 파업투쟁이나 소작쟁의에만 머물지 않고 보다 적극 전투적 진출을 대중적으로 지향하면서 해방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원산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이런 1920년대말-1930년대초의 노동자 농민의 대중적 혁명적 진출의 신호탄이 되었다.

1921년 3월15일 부두노동자들은 7개 노동조의 지도기관으로서 원산노동회를 만들었다. 1921년 4월 산하 900명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위한 파업투쟁을 벌였다. 1925년 11월 28개 세포단체에 1350명의 노동자가 가입해 직업별 노조연맹으로 개편하고 ‘원산노동연합회’로 확대했다. 1927년 6월 임금인상과 통일(연대)을 위한 파업을 벌여 원산 전체 운수업자를 상대로 승리해 산하 노조는 ‘통일된 임금표’로 전면적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원산 자본가들과 일제는 전투적 운수노동자들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할 기회를 노렸다.

총파업의 발단은 영국계 ‘라이징 썬’ 석유회사 문평유조소 노동자 파업이었다. 문평유조소 현장 총감독 고다마는 대단히 포악했다. 노동자 투쟁에 겁먹은 회사는 1928년 9월28일 고다마를 축출했다. 노동연합회는 고다마 축출과 약간의 양보에 성공하고 9월28일 복업했다. 그러나 회사는 3개월이 지나도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1929년 1월 14일 오전 10시를 기해 문평유조소 250여 전체 유조공들이 다시 파업했다. 영국인 관리자의 요리사도, 그의 승용차 운전수도, 조선인 정문 수위도, 일본인 개인집 고용자들도 파업했다. 1월16일 문평운송노조의 50여명이 동정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영국회사의 한 개 분공장을 상대로 임금인상과 대우개선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부분적이고 경제적인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 투쟁은 원산총파업으로, 정치투쟁으로 발전할 일련의 요인을 내포했다.

자본가들은 해고전술로 노동자와 가족을 기아로 몰아넣었다. 1월19일 벌써 부두노조의450여 명 전체 노동자가 항의파업에 들어갔다. 원산부두의 한산노동자 70여명은 일제 자본가들의 집요한 파업깨기꾼 모집 책동을 견결히 배격하고 노련의 지도하에 자유노조를 결성한 뒤 동정파업했다.(동아일보 1929년 2월8일자) 일본인 하층 노동자인 약 40여명의 토건노동자들도 2월2일부터 자진파업에 들어갔다.(동아일보 1929년 2월4일)

지도부는 노동자규찰대를 부산 인천 함흥 청진에 파견해 그곳 노동단체와 연계해 자본가들의 인부모집을 파탄시켰다. 중국인 노동자들이 파업깨기꾼으로 응모하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했다. 그러나 노련의 개량주의 지도부는 합법 수단에만 매달렸다. 서울 조선인변호사협회와 연락해 인천 노동자들의 강제노동 진상을 폭로하고 사회적 여론을 환기시키는 방법으로 대체근로자를 철수시켜보려고 어리석게 시도했다.

일본 노동계급도 연대했다. 고베의 ‘라이징 썬’ 석유회사 노동자와 오다루 운수노동자가 동정파업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중국 노동자들의 지원도 받았다.(동아일보 1929년 1월27일자) 프랑스 노동계급에게도 일정한 지원을 받았다.

경찰은 42명의 노조 간부와 핵심일꾼을 검거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1929년 2월22일 노련 집행위원회에서 굴욕적인 시민협회의 ‘조정안’을 부결시키고 파업투쟁을 더 강화하기 위해 혁명적 규율을 일층 강화해 금주 금연 등은 물론 하루 2식 단행을 결의하고 전체 가족과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고 눈물겨운 절약투쟁을 벌였다. 일제 자본가들은 난산 중에 있던 어용단체의 조작을 다급히 서둘러 1929년 3월8일 반동적 ‘함남노동회’를 만들었다. 노련 지도부의 개량주의 편향의 해독은 명백해졌다. 서울의 재산 있는 변호사 김태영의 잠입과 더불어 더욱 개량화됐다. 김태영을 파업 지도부에 끌어들인 것은 경솔하고도 만회할 수 없는 실책이었다. 개량주의적 기회주의 분자들은 노동자들의 폭력적 진출 기도를 경찰에 밀고하고 3월7일에는 노련 지도부를 완전히 자기들 편으로 탈취해 강령과 규약을 개악해 함남도 당국자들에게 비준 받는 배신을 감행했다.

결사대원들은 1929년 4월1일 오후 6시 아직 저녁 햇발이 높은 백주에 광범한 시민의 엄호를 받으면서 ‘함남노동회’ 사무실을 비롯한 그의 노동조합과 작업장을 연이어 습격하고 주구를 까눕혔다. 배신적 지도자들의 변절 투항으로 더는 파업을 계속할 수 없어 노동자들은 4월9일부터 비통한 심정으로 일터를 찾았다. 그러나 간악한 일제 자본가들은 노련 소속이라고 파업자들에게 일감을 주지 않았다. (동아일보 1929년 4월12일자)

노동자들은 영용하게 투쟁했지만 일제 자본가들의 야수적 해고를 취소시키지 못했고 반동적 ‘함남노동회’의 성립을 좌절시키지 못했다. 총파업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1920년 신흥탄광 노동자들의 폭동적 투쟁에 뒤이어 평양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1930년 단천 농민폭동 등 폭동 시위 소작쟁의가 전국을 휩쓸었다.


7. 1930년 신흥 탄광노동자들의 전투적 폭동 - 한영해 1956년

1929년부터 시작한 경제공항.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경제연보> 1939년판 72쪽에는 “광공업은 비약적 진흥을 도모하는 동시에 일본 및 만주의 산업과 연락을 긴밀히 함으로써 조선의 지리적 자원적 특질에 비추어 일본제국 전반의 수요 충족에 충분히 기여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며 조선경제 발전의 궁극목적이 일본의 자원수요 조달에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조선에 대한 일제의 자본수출이 1920년대 말부터 급격히 증가했는데 1920년 1억4311만1천원에서 1925년 2얼3462만1천원, 1929년 3억1532만5천원으로 계속 증가했다. 일제는 1929년 발표한 소위 ‘자원조사령’에 따라 우선 군사전략적 의의를 가지는 채취공업을 급속한 템포로 발전, 확대시켰고 1931년 발표한 소위 ‘중요산업 통제령’에 따라 주로 군사전략적 목적에 이용하는 대규모 가공공업 기업소들도 일제 독점재벌의 지배 하에서 급격히 발전시켰다.

1927년 미쯔비시 재벌이 흥남에 만든 조선질소비료회사 흥남공장은 1930년 1월부터 조업을 시작했다. 1929년 노구찌 재벌이 만든 부전강 제1발전소의 완성은 바로 그 직전이었다. 1930년 전후에 우리나라에서 급격히 발전한 근대적 산업은 일제 어용학자들이 장황하게 떠든 바와 같이 ‘조선에 있어서의 산업혁명기’니 ‘조선의 공업화’니 하는 것과 하등의 공통점이 없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자립적 생산력 발전을 저지하고 산업 각개 부분간의 불균형을 조장새 종주국 일본에 조서난업의 예속을 더 강화시켰다.

1930년말 식민지 조선의 경관 수는 1만8811명까지 달했다. 사상범죄자로 잡힌 사람은 1929년에만 3350명에 달했다. 일제 식민지 총독부의 부정확한 통계로도 조선의 완전실업자 수는 1931년 31만5천명까지 올랐다.

이런 속에 1929년 원산총파업은 80여 일 동안 영웅적 투쟁을 전개했다. 같은해 대전 제사공장 노동자 파업, 부산 조선노동자 파업, 평양 고무공장 파업, 인천 정미공장 파업 등 대소 102건의 파업에 8293명이 참가했다. 1930년 들어 부산의 조선방직공장에서 2천여 명의 남녀 노동자가 파업했고 인천정미공장, 댁 정미공장, 용산공작회사 영등포공장 파업 등이 1-4월까지 벌어졌다. 1930년 5월1일 메이데이는 평양 부산 대구 인천 원산 청진 전주 마산 김해 등 각지에서 기념집회를 열었다. 흥남 ‘조선질소주식회사’ 발전소 200여명도 파업으로 메이데이를 기념했다.

메이데이 기념집회와 투쟁이 앙양하는 속에 함경남도 신흥군 장풍탄광 노동자가 파업에 들어갔다. 장풍탄광은 한만에서 가장 큰 탄광으로 약 500-600여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 노동조건은 대단히 불리했다. 동아일보 1930년 3월12일자 ‘탄부 2명 참사, 3월5일과 6일 함남 신흥에서’, 동아일보 1930년 3월22일자 ‘신흥탄광 일부 붕괴, 탄부 6명 매몰’ 등이 있었다.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지하노동하면서 임금은 불과 60-80전을 받았다. 봉건적 이중삼중의 착취제도인 벌금제, 강제저금제, 전표제 임금지불 등으로 다시 약탈해갔다. <신흥탄광 젊은 탄부의 수기>엔 “경무계라는 것을 두어 광산을 출입하는 노동자의 입퇴직을 직접 취급했다. 경무계는 회사의 충견으로 노동자를 감시하고 구타했다. 엄동설한에 강가에 나가 얼음을 깨고 몸을 씻었다”고 적혀있다.

탄광 안에는 공산주의자가 지도하는 선진 노동자가 있었다. 이들은 5월2일 공휴일에 ‘동생놀이’에서 노조결성을 추진했다. 그러나 경무계가 참가예상자 한 명을 구타해 회합을 일단 중단했다. 노동자들은 파업위원회를 만들어 파업 깨기꾼 방지를 위한 노동자 초병을 조직하고 생산시설 완전마비 형태의 파업을 준비했다. 인근 농촌에게 물질적 원조를 받도록 연락했다. 5월3일 아침 6시 작업교대시간에 200여 지주 노동자가 요구조건을 기업주에게 내고 파업을 선언했다. 요구는 1)노조 조직에 불간섭 2)대우개선-구타금지, 불경언사 금지, 3)임금인상-2할 이상 4)노동시간단축-8시간노동제 실시 5)3명의 감독 축출 6)무조건 해고발대 등 12개항이었다. 이들이 가장 앞세운 게 노조조직이었다.

이는 노동자들의 전투적 적극성을 말한다. 파업위원회는 양식을 구입, 저장해 지구전을 준비했다. 기업주는 해고위협으로 맞섰다. 10염 명의 경관과 경방단원을 장풍탄광에 파견해 무력으로 위협했다. 100여 노동자는 경관과 경방단원 앞에서도 전투적 노래를 부르며 시위했다.

양쪽은 5월8일 1차 담판을 열었다. 기업주는 “복귀해도 40명은 해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파업위원회는 항의하는 집회와 가두시위를 조직했다. 일제 경찰은 총검을 들고 “만일 너희가 명령을 들어 해산하지 않으면 비밀결사로 인정하고 총검속하겠다”(조선일보 1930년 5월12일자)고 위협했다. 전투적 노동자와 일제 경관 사이에 충돌과 육박전이 벌어졌다. 파업에 참가했던 이하윤(李夏允)은 “우리 파업의 주요 목적은 임금인상이나 노동시간 단축 등 경제적 이해만 있는 게 아니라 독자적 노조창건이었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기업주들의 회유적 2차 담판도 거절하고 보다 적극적 진출로 나아갔다. 각지에서 투쟁을 지지했다. 함흥 원산 홍원 영흥 등에서 노동자 대표가 와서 격려했다. 신흥군내 농민들은 양곡 신탄 금전을 계속 제공했다. 노동자들의 기본적 승리로 파업은 5월13일로 중단됐다. 선진 노동자 이인섭의 지도하에 노조가 만들어졌다. 기업주는 “노조 가입 서약자 수가 전체 탄광노동자의 과반을 구성하지 못해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인인섭 등 핵심 노동자 10여명을 해고했다.

당시 간도에서 5.30인민폭동이 일어났다. 간도 폭동은 전술적 오류를 가졌지만 인민의 혁명적 궐기였다. 신흥 탄광노동자들도 이에 폭력 투쟁으로 나아갔다. 노동자들은 탄광사무소, 단야공장, 권양장, 발전소, 기관 거부장, 갱내 습격조와 반동분자 처단조 등 7개 조와 3개 감시조를 만들어 6월22일 새벽 1시에 봉기했다. 탄광의 일제 전선과 전신을 자르고 일본인 감독과 기타 중간착취배의 집을, 탄광 보일러, 발전소, 권양기 등을 습격해 파괴했다. 함남 경찰부는 백여 명의 무장경찰을 급파해 봉기한 노동자를 포위했다. 포위 속에도 노동자들의 전투적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폭동은 그 자체로는 중요한 결함을 갖고 있었다.

6월23일에도 흥남 조선질소회사 탄산계 노동자들은 2명의 활동가 해고에 반대해 파업했다. 같은 날 원산에선 인쇄노동자도 파업했다. 안주에선 철도노동자가 파업했다. 7월2일엔 함남 마에시마 잠종제조소에서 100여 노동자가 파업했다. 7월3일엔 이원철산주식회사 노동자의 폭동계획이 비밀리에 조직됐다. 이는 사전에 발각됐다. 투옥과 검거 선풍 속에 노동자들은 7월22일 폭동으로 궐기했다. 9월에는 조선방직 부산공장에서 2천여 남녀 노동자가 파업과 폭동계획, 11월엔 함북도 부령 요네야마광업소에서 300여 광산 노동자가 파업하는 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업이 이어졌다.

1930년 7월21일 함남 단천군에서 2천여 농민이 폭동했다. 7월26일엔 함경북도 나남에서 농촌 청년들과 일제경관이 대규모 충돌했다. 8월8일 경남 김해에선 수천 농민이 대규모 반일 시위를 벌였다. 9월엔 전남 장성군에서 100여 농민이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파괴했다. 1930년 대소 160건의 파업에 1만8972명의 노동자가 참가했고 소작쟁의도 726건이 일어났다. 민족부르조아지 신문 동아일보는 이들을 보도해 1930년 5월부터 8월까지 정간당했다. 함남 현병대장은 1930년 6월 조선 주둔 헌병사령부에 보낸 비밀보고에서 “노동쟁의의 범위를 벗어나 파괴적 행위로 되고 있다”고 했다.

1931년에도 파업과 소작쟁의는 계속 높아갔다. 1월 함흥에서 가다꾸라 제사공장 파업, 대구 운수 총동맹파업, 3월 청진 부두노동자 파업, 5월 경성 조선방직 파업과 공장점거투쟁, 7월 영흥 농업노동자 파업, 제주 해녀 파업 등이 일어나 205건의 파업에 1만7114명이 참가했다. 적극적 전투적 투쟁을 요구했다. 투쟁의 기본적 결함은 비무장 인민의 분산적이고 모험적 폭동이다.


8. 1930년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총파업 - 송지영 1959년

1930년 8월6일부터 9월4일까지 1개월간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가 파업했다. 1929년 원산, 1930년 5-6월 신흥 장풍탄광 투쟁을 뒤이었다. 1919-1929년 노동자 수는 192%, 생산액은 156% 늘었다. 산업은 성장했지만 공업의 기간산업인 ‘금속공업과 기계제작공업’은 총생산액의 각 5.8%와 1.2%를 차지하는데 불과했다.

1930년말 전체 조선 고무공장 노동자는 4314명으로 여성노동자가 2954명(69.5%)이었다. 1929년 평양시내 고무공업은 노동자 1805명(남자 700명, 여자 1105명)이었다. 조선 고무공업에서 평양 고무공업의 비중은 컸다. 평양 고무공업 자본가는 일제와 야합할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밖에는 ‘신간회’ 평양지회와 직접 연계를 가진 자본가도 있었다. 당시 ‘신간회’ 평양지회장은 1930년대 조선독립의 깃발을 땅바닥에 던지고 친일파로 전락한 부르조아 민족주의자의 상층부 조만식이었다. 신간회 평양지회 간부 중엔 평양 고무공장주도 있었다. 그렇다고 조선의 고무공장 기업주가 다 예속부르조아는 아니었다. 부분적인 공장주들은 임금인하를 취소한 사실도 있다. 예로 서울 반도고무공장 등이다.

1929년 총독부가 조사한 조선의 남자 성인 노동자의 임금은 1원, 일본인은 2월32전, 여성 성인 노동자 임금은 조선인이 59전, 일본인이 1원1전이었다. 남자 유년노동자는 44전, 여자 유년 노동자는 32전이었다. 이는 다소 과장된 숫자다.

평양 고무공장 총파업 전 1930년 5월 평양 구전고무공장 파업때 이 공장의 불량품 벌금제는 누진제라서 처음 한 켤레는 5전, 두 번째는 10전, 셋째는 45전이었다. 나중엔 벌금이 임금보다 10전, 12전 많은 예도 있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 같은 사실을 1930년 5월14일자에 상세히 보도했다.

고무공장 기업가들은 1930년 5월23일 전조선고무공업자대회에서 노임 1할 삭감을 결의했다. 평양고무공장동업회도 8월1일 고무신 가격 인하와 동시에 임금 삭감도 결의했다. 이에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총파업이 시작됐다. 1930년 8월4일 노동자들은 임금삭감에 반대하는 항의문을 평양동업자조합에 전달했다. 8월6일 오후 공장주들은 이를 거부했다. 노동자들은 6일 밤부터 대동 평안고무공장을 시작으로 파업에 들어갔다. 7일 낮에는 서경 세창 정창 구전 동양 국제 금강 등의 고무공장 노동자 1800명이 총파업했다. 8월12일 공장주는 다시 노동자 요구를 거절하며 해고를 위협했다. 기계공들도 동맹파업해 평양의 전체 고무공장 2100여 명이 참가했다. 제사공장과 평양연초 양말직공도 동참했다.

신간회 상층부에 앉아 있던 분자들은 대립된 양측 대표 ‘조정’을 표방하고 나섰다. 민족반역자 조만식 등은 임금삭감 10-17%를 평균 10%로 하자고 했다. 일본 경찰도 8월19일엔 조정자로 등장했다. 경찰은 노사 양측을 불러 경찰의 조정안에 조인할 것을 요구했다. 노동자 대표는 7 대 5로 굴복했다. 일본경찰은 노동자의 혁명성을 몰라 배신적 전권위원들의 조인으로 해결된 것으로 알고 파업기간 검속한 노동자를 전부 석방했다. 그러나 8월20일 파업노동자들은 직공대회를 열어 전권위원들의 사업보고를 듣고 굴복한 전권위원들을 불신임하고 경찰의 조정안을 일축해 버렸다. 젊은 노동자 강덕삼은 요구의 절반가량의 승인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연설했다.

일본경찰은 강덕삼을 체포했다. 경찰과 노동자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감덕삼을 석방하라. 파업 만세”를 외치며 경찰서로 향했다.(조선일보는 5천여명이라고 보도했다) 노동자 위력에 위압당한 평양경찰서는 검속했던 노동자 전부를 석방했다. 이후 노동자들은 비밀리에 모란봉이나 양각도 같은 숲속에 모여 대책을 강구했다.

8월20일 이후 평양 고무공장 파업은 새로운 단계로 넘어갔다. 전국 각지의 격려문과 동정금이 답지했다. 평양 고무소매상 대부분도 노동자를 지지했다. 8월23일 공장주들은 어리석게도 또 취업의 사이렌을 울렸다. 단결된 노동자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파업노동자들은 8월23일부터 공장습격과 폭동으로 진출했다. 일제경찰의 야만적 탄압으로 9월4일 노동자들은 해산했다.

이 투쟁 직후 1931년 5-7월까지 한 달 반 동안 벌인 평원고무공장 여공들의 파업도 노동자들의 영웅성을 발휘했다. 이 투쟁에서 강주룡은 을밀대 지붕 올라가 9시간 반이나 투쟁을 선동하다가 일제경찰에 잡혔다. 옥중에서 140여 시간을 단식하고 출옥 뒤 파업을 계속 지도하다가 다시 잡혀 다시 70여 시간을 단식했다.

1930년 평양 고무공장 파업에서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투쟁이 시작된 지 2주일 만에 정체가 폭로돼 노동자들은 그들을 지도부에서 축출하고 독자로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종파분자들은 평양노동연맹 산하에 있는 30여개 노조를 분열시켰다. 신간회 밖에 있던 종파주의자는 신간회 안에 있는 종파주의자를 파업에 소극적이라고 비방하면서 서로 겉으로는 파업에 적극적인 체했다. 그러나 어느 한 종파도 노동자 투쟁을 목적지향성 있는 정치투쟁으로 인도하지 못했고 뚜려한 정치적 구호를 제시할 수도 없었다. 오직 노동자들 자신이 동지적 단결의 구호를 들고 변화하는 정세에 따라 투쟁의 새로운 형태를 선택해 적극 투쟁했다.


9. 항일무장투쟁의 영향 하에 일어난 노동자․농민들의 투쟁(1932-1945) - 고정수 1960년

일제의 불충분한 통계자료라도 조선에서 파업은 1911-1921년 280여 건, 1922-1931년 870여 건, 1932-1936년 830여 건으로 늘었다. 소작쟁의는 1933년 약 2천건에 8천명이 참가했으나 1935년엔 7500여건에 1만600여명, 1936년엔 9370건, 1937년엔 1만700여건, 1938년엔 1만1570건으로 늘었다. 전남 영암과 충남 논산지방 농민들은 적기 시위를 벌였고, 경남 양산과 함안에선 경찰과 유혈 충돌까지 있었다.

1941-1943년간 일본으로 강제 ‘징용’당한 67만5천여명 중에서 도합 24만2천여명이 집단으로 탈주했다.


10. 해설논문 : 북한학계의 1920,30년대 민족해방운동 연구 - 김경일

북한에선 1952년 과학원을 세우고 산하에 력사연구소를 만들었다. <력사과학>은 력사연구소 기관지로 처음엔 <력사제문제>였다가 1955년에 <력사과학>으로 창간해 1967년까지 나왔다. 정간했다가 1970년대 후반에 복간했다. 남한의 <역사비평>(역사문제연구소) 1989년 봄호가 <력사과학>의 총목차를 소개했다.

로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근로자>나 직총 기관지 <로동자>가 정치성이 강하다면 <력사과학>은 상대적으로 학술성이 짙다. 력사과학은 1955년부터 1967년까지 일제하 노동, 농민, 학생운동 연구를 가장 활발히했다. 그러나 이전이나 이후엔 이들 연구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학생운동은 예외다.

1979-1982년에 걸쳐 총 33권으로 나온 방대한 <조선전사>도 이 부문에 많은 비중과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조선전사> 절반이 넘는 16-33권까지 18권이 현대사로 채워져 있다. 항일무장투쟁사가 16-22권까지 무려 7권에 달한다. 이런 변화를 두고 국내 연구자들은 두 가지 평가가 엇갈린다.

첫째는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 <력사과학>의 논문을 긍정평가한다. 이후는 주체사상 때문에 김일성의 교시가 들어가 정치요소가 가미된다고 본다. 주체사상의 정치적 영향 때문에 오염과 파괴로 역사를 날조하고 왜곡한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남한의 반공이데올로기라는 관점을 반영한다.

둘째는 주체사상의 궁극적 확립에 주목해 <조선전사>의 역사서술을 완성된 형태로 긍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력사과학>이 60년대까지 한 연구는 불완전하다고 본다. 이 입장은 주체사상의 이념적 수용에 따른 일정한 오류를 안고 있다. 즉 남한의 현실과 변혁전망이 빠진 채 주체사상을 교조적 기계적으로 남한에 적용하려고 하는 경향이다. 북한에서 사상투쟁은 56년 8월 열린 당 전원회의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여기서 ML파 최창익과 소련파와 연안파 주요인물들이 반당 반국자적 종파활동이라는 죄행으로 제거됐다.

노동운동 관련 논문은 노동계급의 형성과 상태, 구성을 다룬 리종현의 글이 있다. 이 시기를 다룬 책은 아래와 같다. 전석담 허종호 홍희유가 1970년에 지은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과 김광진 정영술 손전후가 쓴 논문을 1973년에 엮은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이 북한에서 출판됐다. 이들 책이 결정적 계기로 주목하는 건 1923년 7월 경성 고무공장 여직공 파업이다. 당시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주도하던 조선노동연맹회의 지도로 전국 노동단체와 긴밀한 연대 하에 전개된 파업이라는 거다.

1923년 경성 고무공장 여직공 파업을 노동계급 형성의 결정적 계기로 드는 것도 자의적이고 설득력이 없다. 사상단체가 파업을 지도하고 전국 연대도 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연대는 인도주의적 동정이란 성격이 오히려 더 규정적이다. 권의식의 글은 “노동운동과 맑스-레닌주의의 결합과정이 급속히 촉진”되는 것에만 주목한 나머지 봉건사상의 유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맑스-레닌주의 보급이 봉건사상과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를 단숨에 자동적으로 일소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노동대중의 의식적 노력과 자각으로 비로소 일소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권의식의 역사서술은 기계적이고 형식적이다. 이 부문은 김경일의 ‘일제하 고무노동자의 상태와 노동운동’(일제하의 사회운동, 한국사회사연구회 논문집 제9집, 문학과지성사, 1988, 132-23면과 139면)을 참고하면 된다.

리종현은 1920년대 노동계급의 생활상태를 살핀다. 당시 노동계급의 생계비 분석으로 인간 이하의 동물적 생활을 강요당한 상태를 제시한다. 노동계급의 빈궁화라는 시각에서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1930년대 노동계급의 구성을 다룬 리국순의 논문이 있다. 리국순은 30년대 독점자본에 의한 생산의 집중과 집적의 강화에 따른 중공업 노동자의 급격한 성장과 비중의 증대와 함께 광산이나 토목건설 공사장 등에서 집중화 경향을 설명한다. 당시 전체 노동자에게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던 ‘일용노동제’에 주목한다.

그러나 식민지적 특수성 해명은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 60년대에 북한에서 사회주의 건설에 우호적이었던 일본의 학계에선 동일한 취지에서 비슷한 내용을 다룬 권영욱의 글이 1965년에 <일본제국주의하의 노동운동사정 - 1930년대를 중심으로>(역사학연구, 303호)가 나왔다. 거름출판사는 1984년에 남한에서 펴낸 <1930년대 민족해방운동>에 이 논문을 실었다.

또 안병직이 1988년에 발표한 연구논문 <일본... 조선노동자계급의 성장에 관한 연구>(조선사연구회논문집 제25호)는 북한의 시각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안병직은 이 연구에서 흥남의 일본질소공장 사례연구로 숙련공인 일본인 대 비숙련공인 조선인이라는 식민지적 노동구조를 ‘정상적인 노동구조’를 형성하는 경제과정으로 보고 있다. 이런 노동계급의 성장으로 일제의 식민지배하에서도 한국 민족은 근대민족으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안병직의 연구는 중공업지대인 흥남을 중심으로 조선인 노동자 가운데 노동계급 상층으로 진출한 성장과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했지만 이 층이 민족해방운동에서 지니는 역할과 성격 등은 전혀 해명하지 않았다.

1920년대 초 노동공제회와 노동연맹회를 다룬 권의식의 연구가 있다. 권의식의 전반 기조는 양 조직이 일정 한계에도 노동조합운동의 발전에 긍정적이고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거다. 권의식은 노동공제회가 정식 강령이 없었다지만, 신용하의 ‘조선노동공제회의 창립과 노동운동’(한국의 사회신분과 사회계층, 한국사회사연구회 논문집 제3집, 문학과지성사, 1986, 88쪽)엔 인권의 자유 평등과 민족적 차별의 철폐를 기함 등 4개조 강령이 소개돼 있다. 이 주제에 관한 남한의 대표적 연구는 신용하의 이 연구가 독보적이다.

이후 지역별 사례연구를 검토한다. 1921년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을 다룬 리종현의 글은 당시 노동자들의 먹는 문제와 주택문제의 비참함으로부터 참혹한 상태를 제시한다. 영웅적 투쟁을 강조하는 리종현의 시각은 부산부두 총파업이 지니는 한계나 오류를 지적하지 않는다. 10년 뒤 1971년에 일본의 고바야시는 이 파업과정에서 파업파괴 책동을 막지 못했고 농민과 조직적 결합의 부족, 쟁의의 장기화에 따른 일부 노동자 사이의 동요에 주목하고 쟁의 이후 일제가 노동단체를 매수, 어용화시켜 노동계급을 체제 순응시킨 점을 연구해 발표했다.

나머지 3편의 사례연구는 1929년에서 30년 사이 지역 투쟁이다. 그런데 흥남과 같은 대규모 공장지대의 중화학공업 노동자에 대한 연구가 없는 게 의외다.

한영해가 신흥군 장풍탄광 논문을 발표한 게 1956년이었다. 여기선 첫째 노동계급에 의한 정치투쟁과 아울러 그것의 폭력적 진출을 강조한다. 둘째 노동운동의 지도부를 개량주의로 비판하면서 노동계급은 투쟁적이고 혁명적이었다고 매우 긍정 평가한다. 셋째 이런 국내의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적 투쟁은 궁극적으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무투와 연결된다고 본다.

총평하면 이들 연구는 남한과 비할 바 없이 내용이 자세하고 풍부하다. 남한에선 이들 연구가 한국노총이 발간한 <한국노동조합운동사>나 김윤환의 <한국노동운동사> 등에서 개력경과가 나올 뿐이다.

남한은 주체사상기의 북한 역사서술은 김일성 개인을 중심으로 역사의 왜곡과 날조에 근거한 것으로 객관사실과 동떨어졌다고 지적해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조심스럽게 검토되고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다소 윤색이 가해진 부분이 있어도 사실을 왜곡하거나 날조한 것은 매우 드물다.
태그

총파업 , 노동운동사 , 이재유 , 노동운동역사 , 역사연구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이정호(민주노총 정책국장)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글이 뭐 이 모양입니까? 민주노총의 정책국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듣보잡' 운운하는 건 뭡니까? 오탈자는 난무하고 문장은 말이 안 맞고... 장황하지만 명료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깜깜하네요 민주노총.

  • 참세상

    죄송합니다. 편집진의 실수로 오탈자를 바로 잡지 않은 원고가 올라갔습니다.

  • 역사

    주체철학이 완성된 이후에 역사적 관점이 더욱명확해졌다.
    그전 역사를 주체철학이 무시한것도 아니고.. 그 바탕위에
    더욱혁신 완성되었지...북쪽 역사책을 보면 얼마나 정리가 잘되었는지 모른다. 친일파학자와 종파주의 학자들에 써진 남쪽책과는 비교가 안된다

  • 지나다

    웬님!!민주노총 정책국장이면 '듣보잡'이란 표현을 쓰면 안되나요? 저는 나름 도움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낡은 책 자주 소개해 주셔요.

  • p

    우리에게도 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을 능가하는 책들이 있었군요.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저로선 임경석교수의 책을 읽고는 일제시대 혁명가들에 대한 관심을 가졌었는데 한국노동운동사를 반드시 읽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남아있을까요?

  • 이정호

    웬님과 지나다님, 다른 몇 분의 지적을 보고 들었습니다.

    두 번째 문장의 ‘듣보잡’이란 비과학적 용어를 사용한 점은 과도했습니다. 멀리 있는 적보다 바로 옆 아군의 잘못에 더 크게 화를 내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소설책 ‘경성트로이카’가 적일 순 없지요.

    그러나 제 글 첫 문장을 포기할 순 없습니다. 김경일 선생의 20여 년 된 <이재유 연구>와 최근에 나온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역시 20여년 된 <일제하 노동운동사>와 비교해서도 그렇고, 책 자체만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1921년의 부산부두와 1929년 원산. 1920년 장풍탄광에서 승리와 패배라는 단면 뒤에 숨은 소중한 경험을 배워야 하니까요. 이겼지만 진 부산부두파업과 졌지만 소중했던 원산파업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경성트로이카’로는 그런 이재유의 고민을 읽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