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기로 본 미당의 머릿속

[낡은책14] 미당 세계방랑기

미당 세계방랑기 (서정주, 동화출판공사, 1980.3, 261쪽)

이 책은 80년대 상하권 두 권으로 출판됐다가 1994년에 3권까지 모두 세 권으로 나왔다. 첫 권은 ‘떠돌며 머흘며 무엇을 보려느뇨’라는 부제와 함께 1980년 3월에 나왔다. 미당은 박정희 정권이 극악으로 치닫던 1977-1978년을 세계여행으로 소일하면서 경향신문에 그 내용을 137회 연재했다. 그 연재를 묶어 낸 책이 이것이다. 미당은 서문에 “자화자찬 같아서 미안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전 세계에 걸친 계속적인 이런 방랑의 기록은 세계문학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내가 아마 맨 처음이 아니었던가”라고 썼다. 미안할 것도 없이 자화자찬이다.

1944년 가미카제 특공대를 칭송한 미당의 시 ‘오장 마쓰이 히데오 송가’를 읽고 누구나 친일파 서정주에 치를 떤다. 그러나 아직도 살아있는 친일세력은 그 시절 깨끗한 사람이 누가 있냐고 되묻는다. 제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쓴 글을 지워지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은 1970년대 서정주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중절모를 쓴 환갑 넘은 동양 최고의 시인이 미국에서 고작 찾아간 곳은 ‘디즈니랜드’(사진)와 미드 ‘6백만불의 사나이’ 세트장이다. 미당은 “월트 디즈니의 돈이 세상의 어느 곳보다 순수한 돈”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한다.

부끄러운 인종차별과 편견

고작 300쪽도 안 되는 작은 책 속에 학연 지연으로 얽힌 재외국민 백여 명이 등장한다. 가는 곳마다 대사관 직원은 기본이요, 영사까지 나와 길 안내를 한다. 대사의 여비서가 시내관광을 시켜주는 장면도 나온다. 국제상사와 대한항공 등 당시 재벌회사의 현지 주재원들도 마중 나온다. 국제회의차 출국한 한 현직 장관은 현지에서 미당에게 명품 버버리코트 한 벌을 살만한 돈을 촌지로 집어준다. 이렇게 공과 사를 구분 못하던 70년대를 애교로 넘길 수만은 없다.

퇴역한 유람선 퀸 메리호 칵테일 바에서 젊은 외국 여자에게 ‘작업’ 걸다가 단칼에 거절당한다. 추하다. 헐리우드의 밤거리엔 깜둥이 사내들이 빈둥빈둥 놀면서 자기 아내를 창녀로 보내고 편히 먹고 산다고 썼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인종차별로 당장 국제외교가 될 만한 글이다. 멕시코에선 대취해서 마신 술 다 토하고 병원에 실려가 몇 달을 앓았다. 그러고도 멕시코 사람들은 “너무 게으르고 향락적”이라고 단정한다. 무식한 건지, 용감한 건지.

로스앤젤레스의 ‘우정의 종’을 보고선 “우리를 해방시켜 준 미국 사람들”을 보고 “미국의 은혜를 잊거나 저버려서는 안될 것”이라고 다짐한다. 케네디 기념관에선 “암살범 오즈월드란 놈”이라고 단정하더니 “케네디는 검둥이의 은인”이라고 쉽게 토한다. 미당의 눈엔 파나마 운하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파나마 정부의 주장이 “미국에 대한 배은망덕”이다.

각국의 군사독재정권에 경의

아헨데 정권 붕괴 이후 칠레를 보고선 “아헨데가 어지럽혀 놓았던 일을 현 피노체트 대통령이 회복해 지금은 모든 것이 향상돼 가고 있다”고 평한다. 미당은 스페인 내전의 격전장 알카사르 성을 방문해서는 “스페인의 혼란을 프랑코 총통이 이끄는 군인들이 나서 수습하지 않았더라면 스페인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권을 ‘민족주의파’라고 명명했다.

한국에선 시인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단에 올라 잡지 ‘사상계’ 편집위원까지 지냈던 시인 박남수는 영화배우 율 브린너를 단골로 둔 뉴욕의 과일가게 주인으로 살고 있다. 예나지금이나 한국에서 목에 힘깨나 주었던 자유당 의원, 의사, 신문기자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소일하고 있다.

미당은 북미와 중남미, 아프리카를 거쳐 유럽을 도는 1년 넘는 여행길에서 딱 한번 사람 같은 한국인을 만난다. 흑인노예들이 무더기로 잡혀갔던 아프리카 상아해안의 코트디브와르에서 한국 선적의 원양어선 선원들을 만난다. 선장 등 관리자들의 잦은 폭력과 저임금을 호소하는 헐벗은 노동자들에게 미당은 ‘국화 옆에서’ 시 한 구절을 써주었다. 어쩌라고.

아래는 미당의 책을 있는 그대로 요약했다. 소제목들은 미당이 직접 붙인 것을 그대로 사용했기에 요즘 철자법과 맞지 않는 것도 있다.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도쿄의 하네다 공항은 김포보다 크고 깨끗한 줄 알았더니 대합실과 구내 음식점을 보고 환멸을 느꼈다.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방바닥에 지저분하고 불결한 느낌이었다. 점원들의 손님 대하는 태도도 친절하지 못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게 이곳에서도 설익어서 그런 것 같다. 벼락부자가 쓰윽 한번 버티어 보는 것 같다.

하와이 호놀룰루
팬암 비행기. 대한항공이 경영하는 와이키키 리조트 호텔에 갔다. 택시기사왈, “나이 많으신 내 나라 어른께서 타셨는데 값은 무슨 값입니까?”했다. 서울서 시인 구상한테 소개받은 하와이대 몇 한국인 교수가 연락되지 않았다. 27살 한국 청년이 지나가다 말을 걸었다. 우리 동국대 졸업생으로 현재 대한항공의 서울-LA간 스튜어드로 일하는 배명훈 군이었다.

카우아이 섬의 전설의 강
77년 11월28일 배명훈 군과 나는 비행기로 호놀룰루가 있는 오아후 섬에서 잘 가꾼 뜰이란 카우아이섬으로 갔다. 카우아이의 와이루아 밀림을 봤다.

호놀룰루의 밤 뒷골목
한국인이 경영하는 비어홀로 갔다. 베트남에서 패망해 떠돌이가 된 젊은 여자들이 많이 모여 서비스를 했다. ‘언니 언니’하고 억지 아양을 떨었다. 눈치만 늘었다. 우리도 어떻게든 우리 정부와 조국을 지켜내야 할 것이다. 베트남 색시들에겐 오백원이 천원만 팀을 주어도 무척 고마워했다. 서울의 어느 맥주 대폿집보다도 여기는 훨씬 더 쌌다. 서양에서 안 볼 수 없는 스트립쇼를 하는 루비 클럽에 들었는데 우리 한국인이 경영했다.

진주만
하와이대 이동재 교수가 진주만을 보여줬다. 1947년 내가 서울서 이승만 박사의 전기작가로 이 박사를 자주 만나고 지낼 때 그가 들려준 말은 “진주만 폭격을 듣고 나는 일본이 망할 걸 예언했다”는 거였다. 일본인들의 그때의 호언장담에 나도 상당히 속고 있었던 일본 식민지의 어리석은 백성이었다.

네바다 사막
LA공항에 내리니 서라벌예대 전 설립자로 학장이던 김세종 학장이 여비서를 데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세종은 1954년 서울 남산 변두리에 줄행랑 같은 판잣집 가교사를 짓고 나는 거기서 문예창작을 강의했다. 빈주먹으로 손수 벽돌을 날라 서울 미아리 서라벌예대를 세웠다. 확장하려고 서울 교외에 땅을 사들였다가 운 사납게 그린벨트에 묶여 재정파탄을 당해 중앙대에 서라벌예대 운영권까지 넘겼다. 아끼던 큰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LA에 정착해 지금은 사우드 캘리포니아 인터내셔설 유니버시티(남가주 국제대)를 만들었다. 질주 여섯 시간만인 오후 7시 캄캄해진 초저녁에 우리는 라스베가스에 도착했다.

법도 에누리해 사는 라스베가스
매음 행위도 물론 여기서만은 모두 다 합법이다. 1979년 12월 4일 김 총장 대학의 남직원 하나만 데리고 4인승 경비행기로 그랜드 캐년으로 떠났다.

퇴역한 호화여객선 퀸 메리
동국대 출신 제자 시인 황갑주가 연락돼 역시 동국대 제자이고 서울서 내가 결혼식 주례도 한 김병현군과 함께 여행했다. 김병현군은 LA 한국인 마을에서 자동차 수리업소를 2곳에서 벌이고 있었다. 디즈니랜드와 퀸 메리호를 봤다. 퀸 메리호 칵테일 바에서 점잖고 조용한 젊은 이국 여인에게 “같이 앉자”고 하니 “그런 짓은 안하는 것이 좋다”고 거절했다.
태평양 연안의 제일 아름다운 국립공원 요세미티를 거쳐 샌프란시스코까지 여행했다. 막막한 사막도 봤다. 한국의 저질 얌체 족속들이 미국으로 옮겨와 있었다. 출국자의 질도 좀 더 면밀히 살펴야 할 것 같다. 거짓 수표로 동포들에게 사기를 치기도 한단다.

샌프란시스코
77년 12월 8일 샌프란시스코 힐틴호텔에서 여류시인 주정애 양에게 전화했다. 주정애와 같이 파시를 봤다. 주정애양은 천식으로 고생하다 여기와서 많이 좋아졌다. 여류시인 강옥구 여사가 버클리대 교수인 남편과 함께 왔다. 금문교를 봤다. 외딴 섬, 알 카포네 등 중죄수 감옥이었단다. 샌프란시스코 로댕박물관에 갔다. 미국의 여류 독지가의 헌금을 만들었다. 나는 로댕의 <입맞춤>을 봤다. 버클리대에서 ‘국화 옆에서’ ‘푸르른 날’ ‘동천’ ‘선운사 골짜기’등을 낭독했다.

미주리 함상에 올라
새이틀 공항에서 총영사 부인인 여류시인 박명성 여사가 비서와 함께 마중 왔다. 부임 한 달도 안돼 올림픽 호텔에 묵고 있다고 했다. 히로히또가 맥아더 장군 앞에서 항복서명했던 미주리 호가 영주하고 있었다. 안내 청년인 김정일 군이 “우리 교포들이 서로 대립만 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바늘탑에 갔다. 우리 교포들은 단합력이 아직도 모자란다.

캐나다 밴쿠버를 다녀오며
차로 세 시간쯤 달려 캐나다 밴쿠버에 닿았다. 중공과 무역이 근년 왕성해 한약재가 많았다. 한약국이나 침놓는 직업이 많았다. 조지 밴쿠버(1758-1798)라는 쾌나 옛날 영국 뱃사람이 발견된 곳이다. 유명한 중국인 거리도 봤다.

우정의 종과 한국인 마을
LA 김병현군과 미국 독립2백주년 기념으로 우리가 만들어 보낸 LA 우정의 종을 보러갔다. 우리를 해방시켜 준 미국 사람들의 B29 모습을 한동한 돌이켜 생각해 봤다. 어느 경우에도 우리는 미국의 은혜를 잊거나 저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우정에도 변덕이 생겨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한양대를 나와 미국 온지 4년째인 한 청년은 페인트칠로 먹고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두 눈에 눈물 흔적까지 보였다. 늙어가는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웃음보다 눈물이 더 많은 것이 걱정이다.

디즈니랜드
김병현 군과 디즈니랜드엘 갔다. 인사동 입구의 디즈니 다방을 기억했다. 거의 날마다 그 다방에 오는 아동문학가이자 관악산 밑 예술인마을의 내 이웃사촌 시인 이원수가 생각났다. 노스캐롤라이나의 롤리에 사는 단 하나의 내 손자 서거인과 함께였다면 좋았을 걸.
63살의 나이도 잊었다. 서인도제도의 옛날 해적무대, 아프리카 위험한 정글, 유령의 집, 무형 우주탐험 등이 있었다. 월트 디즈니의 돈은 세상의 어떤 사람이 쓴 돈보다도 동기는 잡념 없이 순수했다. 순수도 번성하면 드디어 한 영리사업도 될 수 있다. 미국의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 구경하려면 먼 곳에서 몇 해는 저축을 해야 가능하다.

헐리우드의 밤
헐리우드는 LA에서도 가장 타락하고 난잡하고 무력한 사람들이 많다. 숨어서 매음하는 창녀들이 보였다. 깜둥이 사내들은 빈둥빈둥 놀면서 해만 지면 그의 아내들에게 매음을 시켜 편히 먹고 살려고 한단다. 마리화나도 많았다. 미성년은 못 들어가는 조그만 영화관엘 갔다. 남녀 사이의 성교의 장면과 많은 여자를 동시에 윤간하는 장면도 있었다.

유니버셜 스튜디오
서라벌예대 제자였던 시인 이세방 군의 안내로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구경했다. 유니버설 시 이름이었다. 영화도 꽤나 좋아하는 나는 호기심이었다. 유명한 <6백만불의 사나이> 한 장면의 실연이었다. 스티브 오스틴 대령의 눈속임수도 봤다.

케네디 기념관
케네디 참변 장소를 안내한 이는 한국일보 댈라스 지사장 임국준이었다. 오즈월드란 놈은 사회주의자였단다. 총을 쏜 장소가 초등학교 아이들 교과서 출판사였단다. 사회주의라는 것이 세계에 번지면서 이런 오즈월드 식의 야만이 세계의 도처에서 아무 가책도 없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는 것은 내 걷잡을 수 없는 고민이기도 하다. 미국 장교를 도끼로 찍어 죽인 사건을 나는 여기서 또 아울러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주의자들이 되면서 사람들은 흉악해져 너무나 황막한 것과 야합하면 케네디 암살사건과 같은 일은 앞으로도 세계 곳곳에서 연달아 일어날 것이다. 케네디 기념관을 지키고 있는 한 검둥이 여인이 있었다. 검둥이들을 이곳에 늘 많이 오게 하면 그들의 은인 케네디 그리는 마음에 훨씬 더 좋아질 것이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수도 롤리
내 큰 아들 서승해가 사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수도 롤리에 도착했다. 며느리 은자와 하나뿐인 손자 거인도 공항에 나왔다. 아들을 못 본지 벌써 13년, 며느리를 못 본건 11년이 됐다. 시골의 도서관장으로 소설과 시를 영어로 쓸 작정이란다. 파이퍼 대학이 나를 환영했다. 학장 출신 교수 메리센트 하니카트 박사는 전주 기전여고 교장과 대전대 영문과 교수도 지냈다. 서두수 교수가 오래 소식이 없다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하버드대와 워싱턴대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정년해 이곳 롤리에 있는 따님을 방문한 터였다.

좋은 노처녀 팍스양
승해가 여기서 박사과정까지 5년을 공부할 때 묵었던 학교 목사님댁엘 갔다. 거기서 나와 우리는 팍스라는 68살의 노처녀 댁을 방문했다. 아들 승해가 가장 좋은 미국 여성의 슬기와 정을 지닌 표본이라고 했다. 팍스 양은 여러 도서관장을 지내고 정년퇴직해 은거중이었다.

수도 워싱턴
워싱턴공항에서 경향신문 워싱턴 특파원 이강걸이 마중 나왔다. 서라벌이란 우리 음식점에 갔다. 워싱턴은 인구의 65%가 검둥이란다. 이강걸 특파원 안내로 미국 정부청사와 대통령관저, 국회의사당을 봤다. 워싱턴에서 가장 큰 잡지전문서점에 갔다. 만 이상이 벌거벗은 나체 남녀들 사진이었다.

뉴욕의 롱아일랜드에서
뉴욕 공항엔 여류시인 김송희 여사와 남편 박씨가 나왔다. 롱아일랜드의 그들의 집에 들렀다. 김송희는 내 제자로 내 추천으로 잡지 <현대문학>으로 시단에 나왔다. 내 주례로 서울서 결혼했다. 남편은 뉴욕 브루클린대 저명한 수학교수다. 김송희 여사가 낳은 5살 사내아이가 있었다. 시인 김상원은 1936년 나와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 김송희의 아버지로 1년쯤 전에 딸이 불러 뉴욕에 와 살고 있었다.

뉴욕 속의 한국 사람들
따님 댁에 들러 머무는 여류작가 최정희 여사를 뉴욕에서 만났다. 이민 온 시인 박남수씨는 과일가게를 했다. 박남수는 고생 끝에 지금은 뉴욕에서도 가장 좋고 비싼 과일을 모아 파는 가계를 전 가족이 총동원돼 벌이고 있다. 영화배우 율 브린너도 단골이란다. 나중에 미국땅의 비교적 한가한 곳에 들어가 농사나 지으며 시나 쓰겠다고 했다.

이곳에 와 있는 60대 이상 늙은 한국인들의 모임인 ‘상록회’가 있다. 거의가 다 한국에서 왕년에 내노라던 인물로 자유당 국회의원, 정당의 간부, 병원 의사, 신문사 간부도 있었다. 거의가 아들 딸들에게 얹혀 살았다. 어린 손자 손녀나 하나씩 데리고 여기 나와 바둑판이나 벌이고 있었다.

자연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에도 갔다. 동국대 전 부총장인 오법안 스님이 경영하는 원각사에 갔다. 오법안 스님은 나와 중앙불교전문학교 한반 학생이던 전관응 큰 스님의 상좌였다. 시인 고원도 오랜만에 여기서 만났다. 고인이 된 시인 조지훈과 고원이 함께 서울 뒷골목의 목로술집을 섭렵하던 기억이 났다. 한 교포가 “고원 씨는 이제 한국 가기 어려울 겁니다”고 했다. 한국정부의 미움 때문이란다.

시카고 미술관에서
78년 1월 13일 시카고 미술관에 갔다. 소박한 반 고흐의 자화상은 1936년 내가 선배 시인 정지용에게 빌린 반 고흐 화집에서 본 이래 자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술가의 신경질과 아울러 내 마음속 한 귀퉁이에 깊이 사진 찍혀 있었다. 내 시 <맥하> 같은 작품에서 담아 보인 작열하는 한여름의 생명의 느낌 그대로였다.

태권도, 이어즈 타워, 미스 티클
시카고의 동국대 출신 동문회 전 회장인 남태희를 봤다. 남씨는 내가 동국대 국문과에서 강의하기 이전에 국문과를 졸업했다.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세계무역센터가 한동안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나 이제는 단연 세계 최고의 건물이 됐다. 시어즈 타워를 봤다. 시카고 근처 한 농촌에서 임서경이란 여류 신진 시인 하나를 발견했다. 임서경은 내 부탁으로 갖다놓은 시작품 원고들을 몽똥그려 추천하는 글을 덧붙여서 서울 현대문학사의 조연현씨 앞으로 가도록 해놓았다. 임서경은 5살짜리 딸아이를 데리고 호텔로 나를 찾아왔다.

포트요크 요새와 우리 석광옥 여자스님
캐나드 토론토의 포트 요크로 갔다. 폭리욕은 1811년부터 1813년까지 3년동안 캐나다 군대와 미국 군대가 캐나다를 두고 쟁탈전을 벌인 전장터다. 한국 절 불광사의 주지 성광옥 스님을 봤다. 동국대에서 불교대학원을 마치고 국제 포교에 나선 36살이었다. 고향은 전북 군산이었다.

캐나다의 이쁜 국회도서관
오타와 공항에 내려 세계의 서울들 가운데 가장 추웠다. 인구는 60만 명이라지만 넓었다. 1858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캐나다 수도로 정했다. 솔직하고도 친절한 한병기 대사를 봤다.

몬트리올 밤하늘의 폭풍설과 함께
몬트리올에서 특히 겨울에 가장 쓸모있는 것은 세계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 아닐 수 없는 넓은 땅속의 시장거리였다. 빌 마리와 캐나다 보나방퀴르의 세 개의 광장을 연결했다. 넓은 상점과 술집과 사무실이 있었다. 두더지 도시였다.

원로시인 어빈 레이튼과 대화
토론토에 돌아왔다. 캐나다 시인 어빈 레이튼을 만났다. 월리엄 포크너라는 미국 작가가 검둥이들의 권리옹호하는 운동단체에 끼여서 늙은 검둥이의 서러운 모양을 그린 미국 출판사 시집 한권에 어빈 레이튼과 나는 같이 실린 적이 있다. “이 엉터리인 땅덩이가 당신 시를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하냐?”고 물었다. 시가 이 딱한 현실에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역설했다.

젊은 한인회장 강신봉 군
캐나다 한인회장 강신봉 군처럼 성격이 가장 뚜렷한 사내를 만난 적이 없다. 6.25때 아버지가 공산군에 붙잡혀 다리가 부러졌다고 했다. 아버님은 한문만 숭상했단다. 서울 용산고를 나왔단다. 고향 화성군 두메산골이란다. 같은 피를 받은 동포끼리 대립하고 욕한단다. 협박전화를 받은 적도 있단다. 왕년에 육군 소장으로 고관을 지낸 누구도 캐나다에도 가끔 돌면서 한국 정부를 욕하고 다닌단다. 강신봉 군은 캐나다의 농부이며 좋은 수필가이기도 했다.

멕시코의 첫 인상
멕시코 공항엔 대사관 박남균 공사가 나왔다. 메로프마 거리엘 갔다. 스페인의 막시밀리언 황제가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를 본떠 만들었단다. 높이 2240m의 고원이었다.

눈부신 공기와 꽃의 쿠에르나바카
대한항공 멕시코 주재원 이혁기 군이 대사관 부탁으로 찾아왔다. 약 70km 떨어진 쿠에르나바카 시로 갔다. 대통령 카터가 멕시코에서 가난해 못살아 미국으로 밀입국해온 몇 백 만 명의 멕시코 사람들에게 쫓아내라는 여론을 무릅쓰고 영주권을 인정해준 처사는 참 인도적이다.

먹은 것 다 토하고 실신해 병원행
맥주잔을 한 손에 든채 술상 위에 포개져 버리고 말았다. 다 토하고 병원으로 실려갔다. 사람들이야 무한량 좋지만 거의가 두루 너무 게으르고 향락적이다.

과달루페 성당
1531년 스페인 사람들이 이곳 인디오들의 아즈텍 왕국을 침략해 멸망시킨 뒤 10년만에 한 인디오가 대주교 앞에 나타나 성모 마리아의 그림을 보여줬다. 성모 마리아의 자비와 인고의 덕 밑에 스페인 사람들과 인디오들은 서로 피를 섞으며 평화와 공존 번영을 이루고 있다. 먼 계단부터 두 무릎을 꿇고 두 무릎으로 걸어서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성실과 신앙으로 간절한 눈물로 흥건했다. 북받치는 통곡과 흑흑거림도 있었다. 반 이상은 순 인디오의 얼굴이었다.

찾아온 아들 승해와 함께
우리 무역진흥공사 박철성 군이 쌀죽을 갖고 문병 왔다. 고향이 나와 같은 고창이고 연전에 작고한 시인 신석정의 누님이 할머니란다. 신석정 씨댁에 내가 19살때인가 찾아가 땀 흘리며 맛있게 밥 반찬해 먹었던 뱅어젓 기억이 났다.

떠돌이 길의 새 힘을 길러
1978년 2월 19일부터 3월5일까지 보름동안 롤리의 아들 집에 쉬었다. 아들은 롤리에서 200km 떨어진 ‘버고’의 도서관장이라 주말에만 가족을 만난다. 역시 이곳 주립도서관에서 해 저물도록 일하는 내 며느리 은자, 중학에 다니는 내 손자 거인이 다 없는 낮시간. “아메리카로 가라 / 아프리카로 가라 / 아니 침몰하라 / 침몰하라 / 침몰하라”던 내 23살 때 쓴 <바라>라는 시의 한 구절이 있다.

파나마의 낙천주의
마이애미에서 파나마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국제상사 이사 유희조와 전기전자부 한의웅 부장을 만났다. 장삿길 개척이란다. 공항에서 돈 10달러를 내고 나왔다. 파나마는 총인구 160만명으로 놀기만 좋아한다. 현재의 대통령 라카스는 한두 해 전 정부 사람들을 모조리 돌려보내 놀게 했다. 파나마는 1502년 컬럼버스의 부하의 하나인 발보아가 발견했다. 거리엔 발보아 동상이 둥그런 지구를 들고 선 모습으로 서 있었다. 미국화한 파나마의 속 깊이 숨어서 그들의 본래의 값을 주장해 소곤거리고 있는 듯했다.

파나마 운하와 밤의 뒷골목
근년에 와서 파나마는 미국의 이익이 엄청나게 많은 걸 요량하고 꺼졌던 본 남편 나타나듯 밤중에 홍두깨마냥 불쑥불쑥 나타나 그 소유권 반환을 성화부리고 있다. 파나마는 공산세계에까지 가끔 한 다리를 걸쳐 보기도 했다. 방관하는 외국 사람들은 때로 낄낄거리기도 한다. 파나마라는 나라는 독립국가가 아니라 콜롬비아의 한 지방이었는데 미국의 운하 건설계획에 콜롬비아가 반대해 미국이 도와 독립까지 시킨 것인데 운하의 이익이 부러워 경영권 반환까지 벌써부터 주장한다. 배은망덕도 분수를 잊은 것이다. 밤거리의 여인의 90%는 모두가 다 콜롬비아 여자들이다. 미국돈 몇십 달러면 누구하다고 잠자리를 같이한다.

페루의 국립박물관에서 보니
78년 3월11일 페루 공항에 대사관 김상규 참사관이 마중 나왔다. 국립박물관에 갔다. 1532년 스페인 사람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인디언들의 잉카제국을 멸망시키기까지 사용했던 무기를 전시해 두었다. 인구 1천5백만중에 백인은 겨우 11%고 인디오가 50% 나머진 혼혈이다. 우리의 힘센 놈 등골 빼 내놓았던 풍습은 월등하게 힘센 장수가 태어나면 그놈이 역적이 되면 나라에 해가 된다며 잡아서 등뼈를 빼내 병신을 만들었던 우리나라의 못된 옛 풍습이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칠레는 3가지 W가 있다. 여자, 와인, 바람이 좋다는 것이다. 아헨데라는 전 대통령이었던 사내가 한동안 사회주의 정책을 씁네 하고 꽤나 어지럽혀 놓았던 일들과 질서가 군인들의 쿠데타로 새로 선 현재의 피노체트 대통령 시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회복하기 비롯하여 지금은 모든 것이 향상돼 가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와는 거래 관계도 꽤 좋은 편이라 포니를 2천대, 3천대 최근에도 들여왔다.
호텔 근처의 길거리에선 꽤나 이쁘장한 젊은 여인들이 하룻밤의 동침을 지원한다. 1541년 스페인의 정복자 발디비아 일당에게 남자 인디언들은 반항하다가 모조리 떼죽음 당하고 그들의 여자들만 어느 만큼 남아 지금도 순인디언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백인 아니면 백인과 혼혈종 뿐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첫 인상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맑은 공기’란 뜻이다. 그러나 아르헨 인구 2500만명의 1/3이 이곳에 살아 공기가 맑은 곳이라 느끼지 못한다. 78년 3월16일 이곳 국립대 건축과 재학중인 우리 학생 최양호 군이 안내를 했다. 최군 아버지는 7년전 2천달러를 갖고 여기 와서 부지런히 일한 결과 지금은 대서양 바닷가에 24만평 좋은 전답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건평 100평의 좋은 3층집을 갖고 있었다. “우리들만 어느 경우도 서로 대립하지 말고 한 조국의 얼로 뭉쳐 살자”는 주장을 내세워 최 군은 지내고 있었다.

상파울루
상파울루 인구 500만명 중 일본인 12만명 한국인 2만명이나 살고 있어 브라질서 가장 동양인이 많은 곳이었다. 상파울루 특파원으로 와 있는 한국일보 외신부 홍성학 군과 여기서 남미여행사를 경영하는 신백순 군의 안내로 명소를 둘렀다. 신백순은 나의 오랜 친구 시인 신석초 형의 생질이다.

리오 데 자네이로 산수
리오 데 자네이로 공항에선 태권도 도장 사범 이우재 군이 마중왔다. 이우재는 동국대 졸업생이다. 리오 데 자네이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3개의 항구 중 하나다. 이탈리아 나폴리와 호주 시드니와 함께. 코르코바도의 예수 성상을 봤다. 이탈리아가 이곳 브라질의 독립기념일에 선물로 준 것이다.

깊은 밤 삼바 춤에 끼여
관객석의 맨 앞줄에서 매우 몰입해 있는데 검둥이 모레나 색시 하나가 나를 끌고 무대 위로 끌어들인다.

야생동물의 왕국 케냐
반도상사 지사장인 이상모 군이 나왔다. 그의 부인이 우리 동국대 영문과 출신으로 내 애제자의 하나인 시인 김정웅 군의 부인과 친형제나 다름없었다. 케냐는 해발 1630m의 높이라 늘 선선했다. 영국의 식민지였다 1963년에 독립했다.

토산보석을 파는 흑인 미녀
케냐의 나망가는 탄자니아와 국경지대다. 간소하게 자리잡은 한 가게의 안주인인 깜둥이 색시는 균형 잡힌 얼굴에 불타는 두 눈과 석류속같이 붉은 입술을 가졌다. 호박(琥珀)이 특산물이었다.

킬로만자로 산밑의 야수왕국 암보셀리
헤밍웨이의 소설 <킬로만자로의 눈>으로 유명하다. 탄자니아 산이지만 케냐의 암보셀리에서도 가까이 정체의 전모를 우러러 볼 수 있다.

라고스에선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 나이지리아 수도 라고스
인도양 가 아프리카 동물왕국 케냐를 뒤로 하고 대서양 가 상아해안으로 갔다. 상아해안으로 가기 전 나이지리아 수도 라고스에서 1박 경유했다. 우리와 정식 국교도 안됐고 김일성의 대사관이 있는 곳이다. 인심이 대단히 좋지 않으니 가지 말라고도 했다. 호텔을 알선하는대 20달러, 공항에서 500m 떨어진 호텔까지 택시비가 10달러, 호텔 객실은 화장실도 공동으로 썼다. 화장실 변기에 물도 안 나왔다. 1일 숙박에 40달러였다. 하루 자면서 100달러 넘게 바가지를 썼다.

띠아싸레의 도립병원과 감옥
1978년 4월7일 상아해안 코트디브와르의 서울 아비잔에 도착했다. 대사관의 전창규 영사가 나왔다. 띠아싸레 정글을 봤다. 띠아싸레는 인구 3만명의 작은 도시로 안순구 박사가 도립병원의 원장이었다.

토인 마을의 이모저모
악어가 많이 잡히는데 여기 토인들은 아직 그 가죽을 다루어 말리는 기술을 몰라 끓여서 먹기만 한다. 우리나라 사람 누가 여기 와서 그 가죽을 말려 핸드백 제조업이나 했으면 좋겠다.

아비잔의 우리 원양어선 선원들
코트디브와르 수도 아비잔에 우리 원양어선 산페드로 65호(선장 권영갑)가 도착했다. 기관장 김영석 군과 만났다. 얼마전에도 우리 선원 한 사람이 숨졌단다. 김영석은 서울 중앙고 출신으로 내 젊은 동창생이었다. 일반 선원은 한 달 칠팔십 달러(한국 돈으로 3만5천원에서 4만원씩) 월급을 받고 중노동에 시달렸다. 종업원들과 그 가족들을 이렇게까지 혹독하고 야박하게 다루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원양어선들의 선주는 자유당 말기의 4.19때 지탄을 받으며 법의 심판대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란다. 내 <국화 옆에서>라는 시의 한 구절을 써 김영석 군에게 주면서도 마음이 두루 을씬년스럽기만 했다.

스페인 마드리드 - 플라맹고춤 집에서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마드리드대학 박사과정 학생인 문광현(대사관 촉탁) 군이 안내했다. 신상철 대사의 초대로 그댁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우리 태권도 사범인 조용훈 6단이 동석했다. 현재 스페인 황제인 후안 카를로스 폐하에게 일찍 우리 태권도를 가르친 사람이다.

스페인의 옛 서울 - 톨레도
문광현 군이 운전하는 차로 마드리드 남쪽 71km의 옛 서울 톨레도를 찾았다. 1936년 민족주의파와 인민전선파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붙어 몇 백 만명의 사상자를 낸 싸움터 유적도 있었다.

인민전선파와 혈전장 - 알카사르 성에서
1936년 민족주의자들과 인민전선파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스페인 동족상잔의 기념물 알카사르 성에 들렀다. 이 성을 그때 끝까지 인민전선파의 공격에서 지켜낸 모스카르도 대령의 큼직한 사진이 걸려 있는 방에 들어갔더니 여러 나라 말로 모스카르도 대령의 행적을 간단히 기록해 붙여 놓고 있었다. 그들의 혼란을 1939년 프랑코 총통이 이끄는 군인들이 나서서 수습하지 않았더라면 스페인의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 스페인 다수 국민들의 반성이라고 한다. 프랑코 총통의 무덤은 바이에 데 로스 카이도스의 인민전선파의 무덤들 옆에 나란히 놓여 있다고 한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옛집
한국외국어대 시인 허세욱이 스페인에선 꼭 민용태를 만나라고 했다. 민용태 박사는 마드리드 국제대학 동양문학 강좌도 담당하는 시인 교수로 스페인 말로 시집을 두 권이나 내고 태권도의 단수가 5단이 된다고 한다.

푸짐한 불소주집과 프라도 미술관
‘케이마다’라는 불소주는 본래 70도 쯤 된단다. 불을 붙여 알콜 도수를 낮추어 레몬덩어리와 설탕까지 넣어 먹는다. 문광현 군과 함께 프라도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 고야 등 스페인 왕가의 수집품들을 봤다.

파리행 국제열차 속의 불안한 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파리까지 열차로 14시간을 달렸다. 경향신문에서 이글의 원고료로 받은 1차 여비는 벌써 몇 달러만 남았다. 파리에 가면 나머지 것을 탈 예정이다.

몽파르나스의 보들레르 묘
경향신문 파리특파원 노영일씨의 안내로 몽마르트에서 멀지 않은 트레비즈가 20의 레망(애진원)이란 우리 교포 겨영호텔에 묵었다. 주인 박씨는 내 고향과 멀지 않은 전주 태생이었다. 가까운 후배 시인 임성조가 인도와 프랑스, 미국을 구경하다가 나와 만났다. 파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는 사돈뻘인 유제현 군의 안내로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의 보들레르 묘를 찾았다. 의외로 너무나 초라했다. 무척 싫어했던 그의 의붓아버지 오피크와 어머니 사이에 한무덤에 같이 묻혀 있었다.

카르티에 라텡 거리와 충혈된 몽테뉴 대리석상
라텡 거리와 소르본느 대학을 임성조 군과 돌았다. 빅토르 위고의 큼직한 조각상도 봤다. 몽테뉴의 대리석 조각상은 얼굴에 붉은 물이 묻어 있었다. 여기 여학생들이 시험때 점수를 많이 따게 해달라고 몽테뉴의 얼굴에다 대고 마구 키스를 하고 더구나 그 맑은 두 눈에 몽땅몽땅 입술을 문질러서 그렇단다.

룩상부르 공원
룩상부르 공원은 아름다운 여신들의 육체 풍만한 대리석이 많다. 룩상부르 공원의 북쪽에는 프랑스 상원이 있다. 원래 한 후작의 성이었는데 17세기 앙리 4세의 왕비 메디치의 마리가 1615년에서 1627년까지 열두 해에 걸쳐 짓게 해 궁전이 됐다가 19세기까지 왕궁으로 있다가 프랑스 혁명때는 한때 감옥노릇도 했고 1946년부터 프랑스 국회 상원이 됐다. 수수하고 나직한 표정의 중년 여인상을 봤는데 염문도 꽤나 파다했던 프랑스 여류소설가 조르지 상드의 조각상이었다. 그 옆에 플로베르의 윗수염 점잖은 대리석상도 서 있었다.

앙발리드와 팡테옹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앙발리드. 팡테옹은 신들의 집이란 뜻이다.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세느강 왼쪽 언덕 위에 있는데 15세기 파리를 침공한 아틸라족을 막아낸 수녀 에티엔느의 무덤도 팡테옹에 있다. 프랑스 혁명 뒤엔 자유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분들이 여기 묻혔다. 볼테르, 루소, 위고, 에밀 졸라의 무덤도 여기 있다. 안내와 설명을 맡은 정복의 관리는 관광객들이 낮은 목소리로 가만히 소곤거리기만 해도 신결질을 내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고 하여 질색이었다.

루브르와 현대의 두 미술관
루브르 미술관은 프랑스와 1세가 그리스와 로마의 그림과 조각을 모은 것에서 시작해 루이 14세때 미술관을 계획했다가 혁명으로 한동안 중단됐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봤다. 나는 달리의 <잠 깨기 전의 두 번째 석류를 둘러싸고 나는 한 마리 벌이 이끄는 꿈>이라는 그림이 제일 좋았다.

여배우 윤정희의 초대를 받고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여배우 윤정희 부부가 나를 초대해 저녁을 같이 했다. 한국일보 특파원 김성우도 함께 했다. 너무나 작고 초라하고 침침한 2층 구석방에 살았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윤정희의 친정어머니를 극진히 효도를 다해 모시고 있었다. 유고 납치에 궁금턴 걸 물어 봤으나 그들은 가지런히 입을 다물고 내막을 거듭 말하기를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들을 유고로 데리고 가서 골탕을 먹였다는 화가 이응로의 부인 이야기에도 그들은 그저 예 아니오로 나직이 대답했다.

몽마르트 구경
몽마르트 언덕 위에는 사크레쾨르 성당이 있다. 그 성당에선 파리 전망이 잘 보인다. 몽마르트 광장에서 꼬불꼬불 더듬어 아래로 내려오면 ‘물랭 루즈’가 있다. 파리의 창녀들과 놈팡이들의 소굴이다. 지금은 그렇지는 않다. 이름을 상징하는 붉은 풍차만은 그대로다. 사창의 여인들이 숨어서 나타나는 술집도 아직 있기는 하단다.

불로뉴 숲, 조세핀의 흉가, 베르사이유 궁
여류소설가 한무숙의 큰 자제인 김호기 군이 대사관의 참사관이어서 나를 안내했다. 가장 아름다운 숲 봐 드 불로뉴, 나폴레옹의 첫 아내 조세핀이 서러운 말년을 보낸 말 메종의 흉가, 화려한 베르사이유 궁을 돌았다.

프랑스 사람들의 콧대
퐁 뇌프라는 다리는 ‘새로운 다리’라는 뜻이다. 1604년 앙리 4세때 만든 것으로 3백74살이나 됐다. 세느 강가의 한쪽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면서 뉴욕에 크게 모작해 보낸 여신상을 생각했다.

페스탈로찌 마을의 세계고아원
취리히에서 기차로 한 시간쯤 가면 트로겐의 페스탈로찌 마을이 있다. 아이들을 도와 기르는 아학표 씨가 살고 있다. 16개국의 아이들이 모여 살았다. 원장 이학료와 부인 유귀섭 여사가 있었다. 이학표는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를 나왔는데 이어령 교수와 한반에 다녔다. 이번에 이학표씨는 세계고아원의 회장을 뽑혔다.

인터라켄의 이쁜 산수
천병규 대사집을 찾았다. 내 안내를 맡은 천 대사의 여비서 조순덕 양과 함께 구경했다.

제네바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대표부에서 일하는 시인 고창수 참사관을 만났다. 국제연맹 본부는 미국의 월슨이 제창해 1937년 여기 제네바에 지어졌다.

수도 빈
오스트리아 빈 역에 내렸다. 펜션 주인 사내는 나 하나를 재우기 위해 우리 공보관과 함께 손수 빈 역까지 마 중나왔다. 얼굴이 이쁜 40살쯤의 사내였다. 내가 묵을 방 탁자 위엔 우리 태극기까지 구해 가지런히 꽂아놓았다. 하룻밤 숙박비는 15달러로 쌌지만 방은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다. 빈은 커피를 맨 처음 차로 마시기 시작한 곳이란다.

쾨테의 생가
우리 무역진흥공사 지사의 안내를 받아 프랑크푸르트 23그로서 히로시그라벤에 잇는 괴테의 생가를 찾았다. 폭격으로 망가진 걸 다시 주워 모아 옛 모습대로 재생했단다. 1층엔 괴테 아버지의 사무실과 식당, 부엌, 2층은 응접실과 음익실, 3층엔 괴테 아버지의 서재와 어머니 방, 괴테가 태어난 방, 4층엔 괴테의 방이 있었다. 괴테대학은 1914년에 세웠는데 이 대학엔 조화선이란 우리 여교수가 문학 강의를 하고 있었다. 1950년대 <현대문학>에 무명여사란 이름으로 나한테 시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못 만났다.

엘리자베드 여왕과 이용희 장관
우리나라 통일원의 이용희 장관이 본에 묵고 있었다. 이용희는 나와 서울 중앙고보 학생시절 동기동창으로 1936년 11월 창간했던 <시인부락>에 상해라는 아호로 시론을 쓴 동인이기도 했다. 본 대학에 한국학과를 새로 만들고 우리 문학을 가르치는 독일 문학자 구기성 교수도 봤다. 이용희 장관이 헤어질 때 한쪽 구석으로 나를 이끌고 가 봉투 하나를 내게 전해줬다. 여비에 보태 쓰라고 했다. 미국 돈 200달라나 됐다. 영국제 바바리 코트나 하나 사 입을까? 올 가을에 서울 돌아가면 그걸 입고 그의 앞에 나타나 볼까?

본 대학, 베토벤의 생가
대사관의 안 노무관의 부인인 여류시인 김정숙 여사의 큰 따님 안 양(여고 3학년)을 따라 본 대학을 둘러봤다. 시청 근처의 한쪽 번화가엔 베토벤의 생가가 있었다.

워털루 싸움터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 도착했다. 숙박비와 음식값이 너무 비쌌다. 파리에서 이항성 화백이 나와 함께 몇 군데 여행을 하고 싶다고 찾아왔다. 나폴레옹이 참패한 워털루부터 찾았다.

루벵대학과 브뤼셀의 밤 뒷골목
루벵대는 신학 명문으로 국회의장을 지낸 한솔 이효상과 이기영 교수도 공부한 곳이다. 지금은 남기영이 신학을, 김용자가 역사학을, 조정원 군이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뒷골목에는 공창은 아니지만 정부도 묵인하는 사창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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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9

    그런 책도 다 있었군요^^
    미당인지, 맞당인지... 그 늙은이 참... 국제 매춘관광기네요..참...
    뭐 솔직한건지..노추인지...헐.

  • 허참

    미당의 친일파 논쟁은 과거 시한수에 그친 일이 아니고
    이렇게 계속되는 추한 역사였군요.
    그사실을 새삼 접하게 되니 치가 떨립니다.

  • p

    이런 부끄러운 글을 책으로 내다니~~~ 1970년말인데도 민도가 한참 낮았나보네요. 기생충이란 말이 갑자기 생각납니다.

  • 피리

    미당이 일제때 만주가서 마적질 안한게 천만다행이군,
    그랬다간 딱 김일성처럼 나라는 거지꼴로 유지하고
    지혼자 잘처먹고 즐길 사고였네.

  • 인근

    외국에는 발도 딛지않은 저로서는 신기하게 외국의 풍광을 간략하게 어필하여 스쳐가는 관광객의 입장에서 구경잘하고 잘 읽었습니다. 미당선생님 관악저택 가봤는데 그립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명시 명문장들 남기시고 가심을 감사드립니다. 영원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