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 사법살인과 진보당의 실체 (2)

[낡은책 21] 죽산 조봉암 (이영석, 원음출판사, 1983.8.30, 294쪽)

이 책 <죽산 조봉암, 그의 슬픈 삶과 죽음의 이야기>에서 조봉암과 일제시대 조선공산당의 창당과 당 활동에 해당하는 제2부 ‘비극의 뿌리 조선공산당’을 앞서 소개했다. 이제는 1958년으로 옮겨와 죽산을 죽으로 내몬 ‘진보당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는 이 책 제1부 ‘정치공작 그 수수께끼’와 3부 ‘사신의 그림자’, 4부 ‘형장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을 간추려 소개한다.

우익 반공청년회가 주축이 된 진보당

1959년 7월31일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지금 우리는 조봉암의 죽음을 <법살>이라 부른다. ‘사법살인’의 준말이다. 이보다도 사법부를 조롱하는 말이 또 있을까마는 당시엔 법살이 허다했다.

2006년 7월31일 조봉암 법살 47주기 기념식에는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와 당 지도부와 당원들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인터넷신문 통일뉴스는 “민주노동당은 국내 진보정당의 뿌리를 찾기 위해 옛 진보정치인, 좌파 독립운동가들의 족적을 더듬고 있다”고 의미를 부였다.

과연 그럴까. 여러분은 이 책에서 당시 진보당이 어떤 당인지,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었는지를 똑똑히 볼 수 있다. 서북청년단장과 김두환 깡패의 수하였던 우익출신 어깨들이 당의 주요 활동을 장악했던 게 진보당이다. 나는 죽산의 죽음을 애도하지만 진보적 정치인의 죽음으로 보진 않는다. 보수적 민족주의 정객의 정치적 타살일 뿐이다.


제1부 정치공작 그 수수께끼

고명 딸 호정이 면회 올 시간이다. 어려서는 글을 쓰지 못해 할아버지가 써준 편지의 글들을 그림처럼 그려 보내던 아이다. 그 아이 편지를 받아보던 신의주 감옥이 떠오른다. 만주벌판 모스크바로 이어지던 죽음의 여로, 어느 겨울의 5일, 잠들면 죽는다. 추위와 배고픔과 졸음을 견디며 걸었다. 꿈과 사랑이 가득했던 상해의 조그만 인형의 집.

조봉암과 양명산만 남았다. 나머지 진보당 관련자들은 모두 무죄판결 받아 풀려났다. 죽산에겐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 다녔다. 강추위의 58년 1월 12일 새벽 서울 충현동 죽산의 집을 서울시경 형사대가 급습했다. 죽산은 이틀전 집을 나간 채 소식을 끊고 있었다. 같은 날 진보당 부위원장 박기출은 부산에서 붙잡혔다. 최치환 시경국장은 상부의 압력에 허둥댔다. 죽산은 관철동 옛친구 집에 숨었다. 친구들은 술자리에서 해외로 망명하라고 권했다. 죽산은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선거가 끝나면 풀어주겠지 했다. 58년 5월엔 4대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돼 있었다. 죽산은 1월 13일 경찰에 전화를 걸어 자진출두했다. 경찰은 죽산을 시경분실인 남일사로 연행해 놓고, 은신 중이던 조봉암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수사당국은 57년 말 박정호 간첩사건에 혁신진영의 원로인 장건상 등이 관련있다고 발표했다. 박정호는 위장 귀순한 간첩으로 57년 혁신계의 정당 태동 때 재정지원을 위해 달러를 바꾸려다 체포됐다. 진보당 재정위원장 신창균은 탈당압력을 받았다. 신창균은 대전의 갑부 김갑순과 함께 무진회사 설립을 추진중이었는데 당국은 탈당과 허가를 거래해왔다. 신창균은 8.15 직후 김구 선생의 측근으로 한독당의 재정책임자였다.

경찰 정보라인이 흘러준 조봉암 검거

진보당 조직부장 이명하의 정보에 따르면 치안국 양모 경위가 진보당 간부 검거설을 귀띔해 주었다. 확실한 정보로 검거설을 전한 이는 박진목이다. 죽산이 농림장관일때 비서였던 현 통일일보 사장 이영근은 53년 부산정치파동으로 투옥돼 그 무렵 출옥했다. 혁신지도위원회 사건 관련자였다가 당시 경찰 정보를 돕던 홍××가 이영근에게 죽산 검거방침을 전했다. 이영근은 박진목을 불러 죽산에게 망명길 주선을 일렀다. 박진목은 죽산에게 이영근의 말을 전했다.

죽산이 몸을 숨긴 건 58년 1월 9일 결정적 정보에 따랐다. 치안국 정보과에 근무하던 홍원일이 8일 저녁 진보당의 청년국 소속이던 권대복을 불렀다. 홍원일은 죽산에게 “망명 주선은 제가 해드릴 테니 피신하도록 하십시오”라고 전했다. 죽산은 58년 5월 총선에서 서울 서대문구에 입후보할 방침을 발표했다. 서대문구는 이기붕 의장의 선거구인데 죽산의 출마가 발표되는 이기붕이 경쟁자를 구속했다는 말을 듣기 싫어 체포를 중지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홍원일은 원래 혁신계열 사람이다. 홍원일을 53년 혁신지도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됐으나 구제돼 치안국에서 일했다. 치안국 함선용 사찰과장 직속 촉탁이었다.

정순석 검찰총장, 서정학 치안국장이 기자회견했다. 죽산이 북에 보낸 친서가 오래전 당국에 압수돼 필적 감정까지 끝났다는 거다. 58년 1월 23일 오제도 대검 검사는 죽산이 간첩과 접선해 보안법 위반이라고 했다. 1월 16일 조인구 검사는 평양방송이 15일부터 조봉암이 당국의 탄압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 걸 소개했다.

경찰은 진보당의 김기철 통일문제연구위원장, 신창균 재정위원장, 이명하 조직위원장, 김병휘 진보당 기관지 <중앙정치> 사장을 추가 구속했다. 경찰의 발표는 연일 이어졌다. 1월18일 조봉암 집에서 자필로된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됐다는 등이었다. 최치환 서울시경국장은 수사가 순조롭게 집행중이라고 발표했다. 최 국장은 죽산이 해방후 동아일보에 남로당 책임자 박헌영을 공박하는 글을 썼지만 개인적 반대였지 공산당을 반대한 건 아니라고 했다.

윤길중 진보당 간사장

1월 26일 구속된 진보당 간부들이 구속적부심을 위해 모습을 나타냈다. 구속된 진보당 간사장 윤길중은 “김달호 의원이 경찰고문으로 건강이 나빠졌다”고 했다. 정작 구속적부심은 비공개였다.

(윤길중은 일제 때인 1941년 전라도 강진과 무안에서 조선총독부가 내려보 낸 군수를 지냈고 미군정 때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총무과장을 지내다가 1950년 2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1950년대 중반부터 조봉암의 진보당에서 간사장을 지냈다. 전두환 쿠데타 정권이 1980년에 만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입법회의 의원이 돼 1980년 11대 총선에서 민정당으로 서대문과 은평에서 당선됐다. 1983년엔 민정당 출신으로 국회 부의장을 지내며 이후 민자당에서도 상임고문이었다. 이런 자가 진보당의 간사장이었다.)

간첩 박정호는 재판에서 일제때 마포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함께 한 독립투사 최익환을 만나러 진보당 사무실에 한번 찾아갔다. 우파 민족운동가였던 최익환은 당시 진보당 고문이었다. 검찰은 진보당 노선의 강평을 구하는 증언을 들었다. 첫 증언자는 한민당 창당멤버로 보수우파진영의 원로였다가 혁신으로 옮긴 민혁당 당수 서상일이었다. 서상일은 “진보당은 좌경 사회주의 정당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서상일은 진보당의 주도권을 싸고 죽산과 대립해 진보당을 떠나 또다른 혁신당인 민혁당을 창당했다. 민혁당의 고정훈, 민주당의 정일형, 조재천도 증언했다.

58년 2월엔 진보당 조직부 간사 전세용이 체포됐다. 2월 8일엔 대구 계명대 강사 이상두도 구속했다. <북괴의 진보당 강평서>가 문제가 됐다. 강평서는 정태영 동양통신 외신부 기자가 작성한 것이다.

1심 무죄를 뒤집는 양명산의 등장

당시 평화통일론이 쟁점이 된 또다른 두 사건에서 재판부는 평화통일론은 무죄라고 선고했다. 하나는 간첩 박정호사건에 연루된 혁신계 원로 장건상 등 근로인민당 재건파의 무죄선고였고 다른 하나는 서울대 문리대 학생 유근일(2003년 조선일보 논설주간으로 정년퇴임후 뉴라이트 논객으로 활동하면서 2008년 뉴라이트 조직 자유주의연대의 상임고문을 지냄)의 무죄선고였다. 검찰은 유근일의 불온논문과 평화통일론을 놓고 전자는 단순 학문연구로 봐도 평화통일론까지 무죄라는 건 부당하다고 했다.

또다른 문제가 나왔다. 이중간첩 양명산의 등장이다. 약명산이 북에서 4만 달러를 받아 죽산에게 전했다는 거다. 3월 13일 첫 공판이 열렸다. 양명산은 3월 18일 특무대에서 검찰로 넘어갔다. 4월 3일 3차 공판은 조봉암에 대한 집중심리였다.

4월 10일 4차 공판은 ‘통일론’ 심문이었다. 평화통일론은 58년 1심에서 무죄가 됐다. 조인구 당시 담당검사는 죽산이 발표한 <평화통일에의 길>이 이북의 주장과 비슷하고, 중립국 감시하 총선이란 북 주장 그대로였고 남북 동시선거란 합법정부인 대한민국을 부인하는 거라고 했다. 이병용 당시 배석판사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은 국민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고 이것이 보수진영에서 볼 때 하나의 위협이었다”고 판단했다.

경찰은 긴보당이 이중조직이라고 단정했다. 전세용 조직부 간사, 권대복 여명회 위원장은 이중조직을 캐려는 경찰의 집중 조사로 고통받았다. 여명회는 가장 문제있는 진보당의 특수조직으로 지목됐다. 여명회는 56년 12월 하순 가톨릭 학생회원 8명과 이상두 등 3명 등이 모인 걸로 회장엔 진보당 사회부 간사이며 가톨릭학생총연합회의장 권대복을 선출했다. 서울대 문리대 등 전국 13개 대학에 세포책을 둔 행동대라는 거다. 이상두가 이동화 교수에게 보낸 몇 통의 편지가 문제가 됐다.

학술토론장이 된 재판정

이상두는 편지 1에 대해 “이동화 교수가 <사상계>에 <정치학을 공부하는 학생에게>라는 제목으로 글을 실었는데 평화적 민주적 방식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반대하는 의견을 말해보고 싶어 일본의 이노끼 마사미찌가 쓴 <정치변동론>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고 답했다.

이상두는 편지 4에 대해 “당시 경북대 학장이던 박0수는 일제때 친일파였는데 8.15 이후 누구보다 일본 욕을 많이 하는 걸 보고 ‘전향자의 히스테리’란 제목의 글을 쓸까 했다”고 답했다.

진보당 재판은 줄곧 토론장이었다. 4월 24일 6차 공판에선 진보당의 성격을 싸고 언쟁했다. 피고중 유일한 비진보당원인 민혁당 이동화 교수는 “한국의 혁신정당을 일본 등 서방의 사회당 우파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말했다. 김달호 의원은 “죽산과 가족적 관계인 장택상씨가 말하길 공산당 남침이면 죽산이 먼저 죽는다고 했다”고 전했다. 김달호 피고는 검사 출신이었다.

유병진 재판장은 이동화씨에게 “사회민주주의가 도대체 뭐요”라고 묻자 이동화는 손을 번쩍 쳐들어 “아, 일찍이 북구 스칸디나비아로부터....”라 길게 설명했다. 남은 것은 양명산 사건이었다.

1950년대 남북을 오가던 양명산

이중간첩 양명산의 등장은 진보당 사건의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모든 범죄 혐의는 무죄였고 양명산 사건만 끝내 죽산의 목에 밧줄을 걸었다. 양명산과 죽산의 관계는 항일운동 상해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6.25때 남하해 강원도 속초에서 해산물상회를 하던 양명산은 55년 이래 인천 소재 HID(대북공작기관) 공작원으로 10여차례 남북한을 왕래했다.

△‘북은 조봉암과 합작할 용의가 있다’는 밀령을 받고 남하한 양명산은 3월 초 남선전기 사장으로 있다가 6.25때 납북된 박승철의 부인이 경영하는 남산 소재 음식점에서 조봉암과 만나 박의 제안을 전달했다.

△양명산은 3월 하순 돌개포에서 박일영을 만난 뒤 남으로 내려와 중국집 아서원에서 조봉암에게 박일영의 밀령을 전했다.

△11월 하순 평양에서 임해는 양명산을 만나 “김종원 치안국장이 진보당의 동향을 엄중감시하라고 전국 경찰국장에게 지시했으니 주의하라고 전하라”는 밀령을 내렸다.

양명산의 일방진술만 있었다. 양명산이 법정에 선 것이 진보당 관계자의 심리가 사실상 종결된 5월16일이다. 양명산은 8.15전에는 만주에서 활동했다. 해방 후 귀국해 신의주에서 ‘건국무역사’를 차렸다. 46년 8월 남하해 인천경찰서에 체포됐다가 풀려났다. 다시 미군 CIC에 체포돼 다시 석방됐다. 양명산은 6.25때 남하해 속초에 자리잡고 해산물상회를 차렸다. 양명산은 55년 3월 평양 시절 장사관계로 교분있던 김동혁에게 편지를 받았다. 김동혁은 미군 첩보기관의 공작선을 타고 남북교역을 해보겠느냐고 물었다.

55년 5월 양명산은 김동혁과 함께 미 첩보기관의 공작선을 타고 돌개포로 갔다. 양은 미군첩보기관과 북의 대남교육 첩보기관인 선일사의 양해 아래 남북을 왕래하는 교역상인이 됐다. HID 공작원 양명산은 56년 2월 하순 공작선을 타고 돌개포로 갔다.

양명산은 56년 3월10일 저녁 6시쯤 남산의 한 음식점에서 죽산을 만났다. 북쪽의 박일영으로부터 받은 지령을 전했다.

드러나는 양명산의 이중간첩 활동

재판에선 죽산의 장녀 조호정도 증인으로 나왔다. 진보당사건의 변호인단은 양명산의 등장에 당혹했다. 죽산이 비록 양명산이 간첩인줄은 몰랐다 해도 양의 자금원조를 시인했기 때문이다. 양명산은 계속 놀라운 사실들을 서슴없이 시인했다. 조봉암은 “양명산이 간첩인 줄 전혀 몰랐다. 양명산이 남북을 왕래하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북에 편지를 보내는가”고 반문했다.

죽산의 담당 김봉환 변호사는 나중에 6, 7, 8, 9대 국회의원이자 공화당 정책위 부의장을 지냈다. 김봉환 변호사는 “양명산이 법정에 나왔을때도 남파간첩으로 알아 변호인단이 몸을 사렸다”고 회고했다.

김봉환 변호사는 “54년 대북특수부대(JACK) 사건때 내가 변론을 맡았던 C 중령에게 부탁하니 C 중령은 양명산이 인천 HID 소속 요원으로 주로 대북교역을 담당해온 이중첩자”라고 했다. 양은 HID에서 장사를 시킨 것으로 이익금의 상당부분은 HID 공작금으로 사용됐다. 오히려 장사가 주였다.

자유당 강경파의 실력자 장경근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장경근은 진보당 사건 직전 내무장관이었다. 장경근은 인천 HID 대장으로 일하던 친동생 장영근 대령에게 양명산과 죽산의 오랜 친분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장경근은 죽산의 후원자 양명산의 이북 내왕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사건 조작을 지시한 의혹이 짙다.

장경근의 동생 장영근 대령은 6.25때 부산에서 김창룡 특무대장의 보좌관을 지내고 4.19 후 장경근의 일본 도피를 주선했고 5.16 후 미주로 이민갔다.

죽산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당시 정보팀의 고문역이던 남로당 출신의 윤모 씨(작고)가 죽산에게 불리하게 진술했다. 변호인단은 양이 북에서 남파된 간첩이 아니라 HID 공작원으로 남북을 내왕한 교역상인이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사건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다. 양명산에게 남북교역이라는 돈벌이 길을 열어준 김동혁을 증언대에 세웠다. HID 수사요원 엄숙진의 증언도 변호인단의 확신을 뒷받침했다. 양이 비밀리에 물건을 가져가거나 가져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양이 오갈땐 옷을 완전히 갈아 입었다. 그러니 진보당의 문서나 달러화 등을 몰래 가져가거나 가져온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죽산은 “그동안 내게 돈으로 가장 많이 도와준 후원자가 김 사장(양명산)”이라고 증언했다. 양명산은 죽산이 체포된 뒤 죽산의 조카 조규진을 불러내 변론비용으로 쓰라면서 30만환을 건네주기까지 했다. 그만큼 죽산을 좋아하고 존경해온 양명산이었다. 그러던 양명산이 어떻게 그토록 쉽게 죽산을 간첩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교도관이 연출한 구치소 통방사건

조봉암의 통방사건은 양명산이 서대문 구치소로 이감된 직후인 4월에 일어났다. 조봉암이 간첩 양명산에게 보내는 메모를 전해준 서대문 형무소의 이동현 임신환 두 간수부장이 구속됐다. 이는 조봉암에게 의혹을 보탰다. 임신환 간수부장 건은 <쪽지 함정>이었다. 임신환 부장은 죽산을 국한하지 않고 딸 조호정에게도 메모를 받아내려고 했다.

통방메모가 연출된 각본이라는 건 1심 심리가 모두 끝나고 판결직전에 듣는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간수부장 이동현은 통방을 청탁받은 일도 없고 돈을 받기로 한 일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동현은 고문에 못이겨 조작된 사실을 그대로 시인해왔다. 고문은 상처를 치료해준 문영회 내과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번복 진술을 시작했다.

양명산과 같은 감방에 있던 사람이 경찰관이었던 모양이다. 통방사건의 모든 윤곽이 뚜렷해졌다. 그것은 서글픈 세태의 척도로 우리들에겐 더 없는 슬픔을 안겨주었다.

고문 논쟁

▲전세용 진보당 조직부차장 겸 간사 : 나는 죽산이 체포된 뒤 피신해 있다가 2월4일 자진출두했다. 나는 곧바로 남일사로 옮겨져 취조받았다. 내가 월남했다는 이유로 김일성과 죽산과 함께 북한에 호응하는 정당을 하라고 나를 남으로 파견했다는 자백을 하라고 했다. 나는 북에서 반공운동을 하다 남으로 왔다고 말했다. (오제도 검사와 같은 경력이다.) 모진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물고문, 매를 던져 맞히는 이른바 필살봉 고문까지 당했다.

▲이명하 진보당 조직부장 : 비밀당원 문제로 고통당했다. 비밀당원을 대라고 가혹한 문초를 했다.

▲신창균 진보당 재정위원장 : 1차 검거를 피해 14일 연행됐다. 선거자금을 공산당에서 지원받았음을 시인하고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 거부하자 난폭한 심문으로 나를 굴복시키려 했다.

6월5일 검찰이 신청한 신도성(愼道晟), 고정훈, 간첩 박정호의 증언을 들었다. 정치학자며 보수진영의 이론가였던 신도성은 검찰 기소에 반대해 진보당을 변호했다. 신도성은 “진보당의 정강정책은 내가 만들었는데 아직 사회주의는 아직 시기적으로 적합지 않고 수정자본주의 정당으로 만들어 나는 수정자본주의 정당으로 본다”고 했다.

진보당 간사장 윤길중 피고인은 국보법 위반죄에 간첩방조가 덧붙여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조인구 검사는 165페이지에 달하는 긴 논고문으로 진보당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징역 5년 선고한 1심

변론공판은 도중에 중단됐다. 검찰도 당사자도 숨겨온 양명산의 자살미수 사건이 변호인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검찰총장 자리를 거쳤던 한격만(韓格晩)변호사는 변론에서 당국의 형사정책을 공격했다. “검찰의 과오다. 도대체 정치범에게 보안법을 적용해 공산당으로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한격만 변호사는 “나는 죽산이 농림장관때 예산을 관사수리비로 유용했다고 기소됐을 때 담당판사였다. 당시 죽산 선생의 손가락들이 떨어져 나가고 없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울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 투옥돼 모진 고문과 동상으로 손가락 마디들이 썩어 떨어진 고생을 겪은 분을 내가 감히 재판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피고인들의 진술은 자신의 피의사실 해명보다 죽산의 변호가 더 많았다. 보수우파의 청년조직에 몸담았다가 진보당에 참여한 최희규(崔熙圭) 진보당 당무부장은 자유당 2인자 이기붕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사건의 정치성을 강조했다.

7월2일 재판부는 1심을 끝냈다. 조봉암 피고에게만 국보법 위반죄를 적용했을 뿐 다른 피고들은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조봉암은 양명산과 똑같이 징역 5년이 선고됐다. 1심 재판부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국시를 위배하고 괴뢰집단과 야합해 국가변란을 기도했다는 근거가 없다고 했다. 진보당이 사민주의를 지향하고 방법도 국헌을 위배했다고는 공소사실도 인정하지 않았다.

반공청년단원의 용공판사 응징 데모

판결 뒤 사흘째 7월5일 반공청년단원 2백여명이 서울시청 앞에 집결해 “용공판사 유병진(柳秉震)을 타도하라”라는 플래카드를 들었다. 함선용 치안국 정보과장이 말렸지만 데모대는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결국 데모대의 2명의 대표가 대법원장을 대리한 변옥주(卞沃柱) 서울고법원장을 만났다.

법조계 원로 김병로 전 대법원장은 “미개한 나라에도 없는 창피한 일이라면서 배후를 색출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자칭 반공청년들은 자유당의 정치 깡패 이정채 일파의 아이들이었다. 변호인단은 수난을 겪었다. 김춘봉 변호사는 구속됐다. 신태옥 김봉환 두 변호사도 검찰의 심문을 받았다.

판사, 검사, 경찰의 시각차

유병진 부장판사는 작고했다. 유병진 판사는 진보당 사건 판결 2년쯤 뒤 4.19 후에 법정신문과 인터뷰에서 “내가 선고한 5년이라는 것도 마음이 아픈 판결이었다”고 했다.

조인구 검사는 죽산이나 진보당의 정치진로가 북과 합작으로 가고 있다고 보지 않았다. 진보당을 다뤘던 당시 경찰 책임자도 이 점에선 마찬가지 견해다. 수사당국의 고위 관계자들은 죽산을 유죄로 주장하면서도 죽산의 정치성향을 이북과 합작으로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심문하고 취조한 당시 서울시경 실무팀 책임자 K씨 등 수사 실무진은 죽산은 공산주의 사상을 청산하지 않았다고 지금도 확신한다고 했다. “죽산은 일제때 모스크바에서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소련공산당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상해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해왔다”고 말했다.

조호정씨는 “달러화를 바꾸었다는 사실을 내가 증언했다구요? 나는 달러화를 바꾸는 암시장이 있는지도 모르고 자랐어요”라고 반박했다. 전세용 조직부간사는 진보당에는 우익청년 출신이나 군 출신이 중심을 이뤘다고 주장했다. 당시 성대 교수로 당 강령을 기초했던 이동화 교수도 마찬가지다. 선진국의 민주사회주의 노선과 비교해도 가장 우파적인 입장이었다. 강령 기초단계에서 죽산이 의견을 말한 게 있다면 <원자력 문제를 포함시킬 수는 없겠느냐>는 정도였다. 원자무기는 역설적으로는 평화를 열었다는 측면이 있다.


제3부 사신의 그림자

죽산은 해방을 감방에서 맞았다. 다음날 오후에 풀려났다. 여운형이 몸소 인천까지 달려와 감방에서 나오는 죽산을 얼싸안고 서로 감격에 목메이던 광경을 그의 가족들은 잊지 못한다. 10년만의 만남. 여운형이 인천으로 달려왔다는 건 일제 항일투쟁 대열에서 죽산의 위치를 말해준다. 그러나 죽산은 이후 정치 중심에 좀처럼 나서지 않았다. (제헌의회 의원 당선은 ‘정치’가 아닌가)

감옥에서 맞은 해방, 여운형과 재회

조봉암은 장안파 공산당이나 재건파공산당 간부명단에 오른 적이 없다. 해방 직후 맨 먼저 조선공산당 간판을 내건 건 이영 정백 최익한 등 장안파공산당이다. 장안파공산당은 4차당 주역으로 이들 4차당은 대선배로 망명해있던 상해지도부를 깎아내리고 조봉암에게 모함도 곁들인 세찬 비판을 했던 사람들이다.

박헌영을 중심으로 화요회는 1945년 8월17일 1차 회의를 거쳐 45년 8월20일 공산당재건위원회를 열었다. 이는 장안파와 대립되는 재건파공산당이다. 9월3일 두 파벌은 통합대회를 열었다. 박헌영 등 화요회와 ML파 연합의 승리였다. 서울그룹은 패배했다. 조봉암은 어느쪽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46년 5월 죽산이 박헌영에게 보낸 편지로 미루어 죽산이 그 무렵 조선공산당 당원의 자격만은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공산당 등 좌익은 46년 1월19일 민전(민주주의 민족전선) 준비위를 구성해 통일전선을 꿈꾼다. 조봉암은 이 민전에 참여한 것은 스스로도 인정했다. 그러나 조봉암은 민전에도 간부직을 맡지 않았다. 조봉암은 46년 후반에 민독(민주주의 독립전선)을 결성해 의장을 맡았다.

조병옥은 <나의 회고록>에서 “나는 조봉암의 정치이념 문제 때문에 그의 신당(민주당) 가입을 완강히 거절했다. 조씨는 박헌영에게 패해 반간부파로 몰렸지만 본질적으로 공산주의자요 조봉암의 저서 <우리의 당면과제>에서는 사회주의자로 자처한다”고 말했다. 왜 죽산은 해방된 조국의 자유천지에서 공산당의 무대에 뛰어들지 않고 방관했던가.

죽산의 공산당 이탈이 기이한 일이라지만 죽산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리고 그때의 공산당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죽산이 해방 이후 걸어간 길은 그 다운 길이다.

공산당 이탈의 궤적

박헌영은 기묘한 전략으로 공산당의 주도권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박헌영 선생은 어서 나와 우리를 지도하라”는 삐라를 서울에 뿌렸다. 그때 박헌영은 이미 서울에 있었다.

죽산은 인천에 머물면서 인천 건준 고문도 맡고 노조도 구성했다. 인천 실업자대책위도 만들었지만 서울엔 가지 않았다. 조봉암이 재건파공산당의 정치전선에 도전한 건 46년 5월이다. 죽산은 재건파를 이끌고 절대권을 휘두르는 과거의 동지 박헌영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동무에게 편지를 쓴 것은 1926년 상해에서 암호편지를 쓴 것 외에 처음인 것 같소. 해방 이후 오늘까지 인천에 들어박혀서 당, 노조, 정치 등 모든 문제에 입을 봉하고 오직 당부의 지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의 정열을 가지고 정성껏 해왔소. 당을 사랑하고 동무를 아끼는 마음으로 쓰는 것이오”라고 했다. 20년전 조봉암과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1차당의 창당주역이었다. 죽산은 이 편지에서 당의 노선과 활동상의 과오를 하나하나 비판했다.

편지 비판의 요지는 △인민위, 민전 모두 조직과 시기 선택이 졸렬하고 운영상 큰 실패 △인민위가 정권 인수기관인양 환상을 갖게 하는 건 과오 △민전은 통일전선치고는 공산당원이 너무 많아 비당원 군중의 능률적 활동을 제약 △신탁통치 지지를 실천함에 방법이 졸렬해 사기수법 △인사는 종파주의 봉건성 △김일정 무정 두 동무의 영웅주의에 대해 경계 등이다.

박헌영 비판과 자기 해명

죽산은 이 편지에서 자신에게 쏟아진 비판도 해명했다. △안모 씨와 공모해 조직의 돈을 소비 - 돈을 맡았다가 여비와 생활비로 쓴 건 사실, ML당에 보내는 것보다 책임 일꾼이 굶어죽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허락없이 쓴 것은 죄다. △당원인 아내를 버리고 비당원 여자와 결혼(김조이 버리고 김이옥) - 김이옥도 좋은 당원이 돼 중국당에서 중요역할을 했다. △상해서 강도짓 - 내가 상해당부 책임자였을 때 당원 중 그런 자가 있었다. 책임자로서 죄는 내게도 있다. △출옥 뒤 이권을 얻어 부자로 살았다 - 이권을 얻지도 부자로 살지도 않았다. △감옥에서 전향설 - 강문석 김점권 등이 사실무근임을 증명할 것 △진실로 죄라 여기는 건 “일하지 못한 것”이다.

이 편지는 박헌영 개인약점을 지적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시기 공산당의 정치노선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았다. 소련파 김일성, 중국당(연안파) 무정의 영웅주의까지 지적했다. 조봉암은 누구보다 공산당을 잘 알았다. 죽산은 공산당에서 권력자 비판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이 긴 편지는 당을 떠나는 명분을 찾는데 비중을 둔 글이라는 얘기다. (이는 저자 이영석의 생각이지) 물론 이렇게 단정할 근거는 없다. 이 편지는 여러 신문에 보도됐다. 당시 한민당 기관지 역할을 하던 동아일보는 1946년 5월 이 편지 전문을 사흘에 나눠 실었다. 동아일보가 보도하면서 다소 윤색했다는 풍문도 있다. 그러나 죽산은 이에 침묵했다.

정치 라이벌들은 이 편지문제로 그를 중상모략했지만 그는 한번도 응하지 않았다. 편지가 공표되고 그 결과 당에서 출당조치를 취했기에 공산당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조봉암은 46년 6월 11일 문제의 편지가 공개된 뒤 약 한 달 뒤 인천CIC에 검속됐다가 12일만인 46년 6월23일 석방됐다. 석방 3일 뒤 각 신문은 조봉암의 성명서를 보도한다. 당시 기사내용은 조봉암의 신당운동 구상이다. “인천 좌익의 거두 조봉암 명의로 46년 6월 23일 상오 인천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민전 주최 인천시민대회장과 각 신문에 다음과 같은 공산당과 그 지도하 모든 정치운동을 부인하는 죽산의 성명서가 배포됐다.”

이승만에게 어필했던 소책자 ‘3천만 동포에게 고함’

성명서 요약 : △어느 1계급이나 1정당의 독재나 전제이어서는 안 된다 △공산당이나 과도입법민주의원의 독점 정부는 안 된다 △현재 조선민족은 공산당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인공 인민위와 민전 등으로 정권을 취하려는 정책은 단연 반대 △미국을 비롯 연합국에 진심으로 감사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

이 성명은 죽산의 공산당 이탈의 신호다. 40일 뒤 46년 8월 2일 공산당은 조봉암을 추방했다. 당시 신문의 죽산 인터뷰 기록은 “경성콤그룹과 당수 박헌영 중심의 현 간부진의 파멸적 섹트화와 민족분열의 정책을 용인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직후에 죽산은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란 소책자를 출판해 모순투성이의 공산주의와 반민족적 공산당의 과오와 죄과를 폭로 규탄했다. 죽산은 이 소책자에서 “나는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사람 중 하나다. 당시 당원은 180명이었다. 그 태반은 공산주의의 ‘공’자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일제를 타도하기 위해 공산당같은 강력한 조직이 필요했다. 180명 성분을 조사한 즉 8할이 양반출신이었다. 이래서 공산주의 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밝혔다.

잇따른 반공 선언

죽산은 <공산주의 모순발견>이란 논문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좌익계 이탈자를 속출시켰다. 공산당과 손을 끊고 새 정치방향을 잡은 죽산은 민독(민주주의 독립전선)을 결성했다. 이 조직은 이극로 김찬 등이 함께했다. 이극로는 여운형과 길을 같이했다. 김찬은 죽산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김찬은 초기 공산당의 지도자다. 김찬은 함경도 명천에서 태어나 14살에 신학문에 접근, 성진중 경성고보(경기고)를 거쳐 1912년 서울의학강습소(서울대 의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해 8월 일본으로 가 명치대 전문학부에 입학했다. 돈이 없어 중국 동북으로 건너가 중국어를 공부한 뒤 귀국해 모직회사 노동자로 일했다. 3.1운동을 국내에서 치르고 1919년 4월 일본에 건너가 명치대 경제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야간에 다닐 수 있는 중앙대 경제과로 옮겼다. 이때 <마르크스 경제학> 등 사회주의 서적을 접했다. 1921년부터 22년까지 3번이나 러시아로 가 조선공산당 건설을 협의했다.

죽산의 민독(민주주의 독립전선)에 관한 가장 객관적 기록은 국편이 펴낸 <대한민국사>에 짤막하게 실려있다. 1947년 4월11일 민주주의 독립전선의 이극로 조봉암 이동산 3명이 미군정의 하지 중장과 회담했다. 조선일보 1947년 4월13일자에는 이 회담에서 “하지 중장이 민주주의 독립전선의 정치동향에 많은 기대를 가진다는 뜻을 말하고 앞으로 연락해 협력할 것을 청했다”고 보도했다. <민독>은 1947년 5월을 전후해 계속된 미소 공동위 기간에 많이 활동했다.

보수의 과녁이 된 조봉암 농림장관

조봉암은 1948년 5월10일 제헌의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민족분열 이유로 상해임정 주류조차 보이코트한 선거였다. 죽산이 출마하자 인천의 족청계열이 죽산편에 섰다. 뒷날 농림장관 비서로 일한 강원명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강원명은 조봉암의 선거운동을 돕기로 작정하고 본부단장 이범석을 찾아갔다. “조봉암은 공산당이야. 족청이 도와줘서는 안돼”라는 게 이범석의 얘기였다. 강원명은 인천 족청계를 끌고 조봉암을 도와 족청 중앙에선 징계를 단행했다. 당선 이후 이범석은 강원명을 불러 조봉암을 만나 자신의 총리인준을 도와 달라고 설득하라고 요구했다. 죽산은 이에 대해 “그 사람은 파시스트야, 위험한 군국주의자”라고 고개를 저었다.

제헌국회에서 조봉암은 윤길중과 함께 헌법기초위원회 멤버였다. 둘의 좋은 관계는 이때 이뤄졌다. 조봉암은 주로 소장파가 중심을 이룬 무소속 구락부의 리더였다. 죽산은 “부질없는 반미와 마찬가지로 반소도 국가 이익상 온당치 못하다”고 역설했다. 윤치영은 조봉암의 발언취소를 요구했다. 이승만 박사가 조봉암을 주목한 건 <3천만 국민에게 고함>이란 공산당 이탈 소책자였다. 조봉암의 농림장관 기용은 누구도 예측못했다. 조봉암 농림장관은 한민당 등 보수우파에겐 충격이었다. 조봉암의 농촌개혁책도 한민당에게는 위협이었지만 조봉암이 농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게 더 심각했다. 마침내 농림장관 관사 수리비로 예산을 유용했다. 뒤에 모두 무죄가 됐지만 죽산은 사표를 내야 했다.

1950년 조봉암은 2대 국회에도 재선됐다. 6.25가 났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미 반격을 개시했다며 국회에 북진결의를 해 달라고 호언장담했다. 조소앙 원세훈 등 원로혁명가들은 개탄했다. 윤길중은 그때까지 신익희 의장의 사람이었다. 27일 새벽 신 의장댁에 전화를 걸었더니 벌써 피난갔다고 했다. 윤길중은 울분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윤길중은 그때 담담해하던 죽산에게 깊은 감명과 존경심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죽산은 국회의 피난준비를 하느라 가족을 돌보지 못했다. 서울 수복돼 돌아와 보니 부인 김조이는 납북되고 없었고 딸 호정만이 강화의 친척집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부인 김조이는 공산주의자였지만 해방 이후엔 공산당뿐 아니라 정치에서 완전히 발을 뺐다. 서울이 북의 수중에 떨어지자 <반역자 조봉암을 잡아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김조이는 원남동 친척집에 숨었다. 50년 7월 하순 저녁 피신처가 드러나 체포됐다. 전쟁통에 북진할 때 죽산도 평양에서 여러 곳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김조이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죽산과 종전운동 그룹

52년 봄 재야 일각에서 종전운동이 일었다. 종전운동의 주역은 박진목(동경서 발행하는 통일일보 부사장), 최익환이 한다. 최익환은 의친왕과 함께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을 벌였고 동학의 신봉자로 우파민족진영의 중진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에서 입법과도 민주의원도 지낸 애국지사다. 박진목은 일제때 공산당과 열결돼 해방 후에도 좌익으로 활동했으나 50년 초에 경북의 민족진영 선배들의 주선으로 전향한 민족주의자다. 1.4후퇴때 서울 철수할 때 피난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 북의 책임자와 접촉해 전쟁종식을 호소했다.

51년 1월 5일 두 사람은 서울시 인민위 책임자들을 만났다. 그들도 잘 아는 남로당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노동당 제2비서로 대남책인 이승엽과 면담을 요청했다. 최익한 박진목은 51년 1월25일 이승엽과 면담했다. 서울시 인민위 부위원장 한지성도 배석했다. 이승엽은 “그 정신만은 알겠지만 두 분은 남한정부의 어떤 자격도 없어 곤란하다”고 말했다.

51년 7월 28일 박진목은 미군 대령의 안내로 전선을 돌파, 개성으로 떠났다. “10일만에 이승엽과 면담을 끝내고 돌아오라”는 미국과 약속이 있었다. 박진목은 북측 정전회담 부대표 이상조와 만났다. 그러나 이승엽과는 20여일 뒤에 간신히 만났다. 박진목의 밀행목표는 시간을 어겼지만 뜻은 이루었다. 뒷날 이 교섭은 김일성이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파를 숙청하는 구실이 됐다.

패배한 승리, 1952년 부산 정치파동

전쟁기간 죽산은 대통령과 정부에 협조적이었다. 죽산이 대통령과 거리가 멀어진 것은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사건 때문이었다. 국회는 개헌안을 52년 1월18일 143대 19표라는 압도적 차로 부결시켰다. 국회가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부결시키자 국회를 규탄하는 관제데모가 시작됐다. 원래 죽산은 대통령중심제를 지지했다. 죽산은 친일파 집단 한민당보다는 이승만이 훨씬 애국자라는 것이 그때의 논리였다. 그러던 그가 내각책임제 지지로 돌아선 건 대통령의 실책이 거듭되면서부터였다.

정국은 요동쳤다. 정부는 일요일인 52년 5월25일 공비소탕을 이유로 계엄을 선포했다. 다음날 40명의 국회의원을 태우고 국회로 가던 출근버스가 임시의사당이던 경남도청 정문 앞에서 헌병대로 끌려갔다. 의원 가운데 5명이 구속됐다. 국제공산당 관련 혐의였다. 이후 20명 넘는 의원이 구속되고 30명 이상의 국회의원이 피신해 국회의 기능은 마비됐다.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이었다. 뒷날 죽산이 쓴 <정치백서>에는 “순경이 국회의원을 끌고다니고, 곽상훈 외 12명의 우익의원을 국제공산당과 연락이 있다고 무동의로 체포 구급하고 기립투표시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킨 파동이다. 신익희 의장과 내가 이 대통령을 방문해 강경히 항의했다”고 밝혔다.

반공 청년들이 장악한 조봉암 대선캠프

국회는 마침내 굴복해 52년 6월4일 기립표결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한 달 뒤 52년 7월 10일 국회 의장단 선거를 했다. 조봉암은 부의장에 재선했다. 20여일 뒤엔 대선도 있었다. 윤길중 의원은 신익희 의장에게 대선출마를 권했다. 신 의장은 사양했다. 전 부통령 이시영도 사양했다. 조봉암은 출마를 결심했다. 윤길중이 국회의원으로서 유일하게 조봉암의 측근이 돼 대선캠프 사무장을 맡았다. 그 선거를 돕겠다고 자진해 찾아온 사람이 왕년의 서북청년회장으로 반공에서 이름을 떨쳤던 김성주다. 김성주가 사무차장을 맡았다.

선거일정은 52년 7월18일 선거법 공포와 동시에 선거일 공고, 7월26일 등록마감, 8월5일이 투표일이었다. 사양했던 이시영도 후보로 나섰다. 이시영의 러닝메이트 민국당의 조병옥은 죽산의 과거 공산당 경력을 표적으로 삼았다. 선거결과 이승만은 523만8796표, 조봉암은 79만509표, 이시영은 60만표쯤을 받았다. 조봉암은 선거 이후 새 원조자를 얻었다. 임정요인 최익환 김성숙, 천도교 신숙(申肅) 등 원로지사들과 대학생 중심의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대선 이후 김성주는 1953년 체포돼 54년 5월6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그러나 고문으로 타살당했다. 김성주는 유엔군 북진때 미군 당국에 의해 평안남도지사로 임명됐다. 그런 김성주가 국가변란죄로 헌병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4.19 이후 고정훈 등은 김성주 사건은 영문으로 된 이승만의 지시서에 따라 착수해 불법으로 죽였다고 진상을 폭로했다.

조선공산당 때 함께 했던 김준연과 악연

1956년 4월3일 민복기 검찰총장은 회견에서 “김준연이 55년 가을 조봉암을 걸어 서면으로 고발한 국반란음모방조사건에 대해 곧 결말를 짓겠다”고 말했다. 이른바 ‘동해안 반란사건’이다. 민주당 창당 준비때 고발한 것이다. 민주당은 조봉암의 입당을 놓고 내부대립이 심했다.

조봉암 참여 반대의 선봉이던 김준연이 슬그머니 조봉암을 모함하는 고발장을 검찰에 내밀었다. 뒤에 특무대 고문 김지웅의 창작극이라는 게 밝혀졌다. 강원도 속초지구 1군단에 대통령이 시찰오면 군단 인사참모인 김화산 대령이 대통령을 저격하고 곧바로 임시수도 부산으로 진격하고 조봉암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음모다.

(김준연은 1917년 경기고를 나와 1921년 동경대를 거쳐 19922~24년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했다. 1925년엔 사회주의 러시아를 시찰하고 돌아와 ML당을 이끌며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냈다. 해방 이후엔 지주계급이 만든 한민당 창당에 앞장 서면서 반탁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제헌의원이 됐다. 한국전쟁때는 이승만의 법무장관으로 대구 사수에 임해 북한군을 막아내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해방 후엔 같이 우익의 편으로 돌아선 조봉암과 늘 대립했다.)

53년 4월 21일 국회는 백두진 총리를 인준했다. 백 총리의 인준엔 조봉암 부의장의 도움이 컸다. 54년 봄 죽산은 민주진영의 대단합운동을 제안했다. 죽산은 “현 정부가 김구 김규식 계열, 심지어 족청계마저 용공세력인양 배척하는 것은 과오”라고 주장했다. 54년 5월 3대 의원선거에서 죽산은 후보등록방해에 부딪쳤다. 인천은 서류탈취, 서대문은 추천인 취소작전으로 죽산의 후보등록은 실패했다. 죽산은 사직동의 세칭 <도장궁>에서 1년간 은둔했다. 도장궁은 강화 출신 실업인이 죽산에게 빌어준 집이었다.

인촌 김성수의 도움

사실 장면 씨의 과거 경력 때문에 인촌 김성수도 모의투표 얘기를 듣고 장씨의 친일을 지적하면서 “그런 사람이 대통령 꿈을 꾸다니... 나라 꼴이 우습게 돼간다”고 할 정도였다. 민국당의 김성수, 영남파를 대표하던 서상일이 죽산의 합류를 강력히 밀고나섰다. 조봉암 반대의 선봉장은 김준연이었다. 한국일보 1954년 3월8일자 1면엔 김준연과 조봉암의 지상논쟁이 실렸다. 여기서 조봉암은 “소련의 공산당과 영국의 노동당이 4촌간이라고 단정짓는 것과 같다”고 했다.

김성수는 조봉암 반대론을 완화하기 위해 무던 애썼다. 당시 인촌 김성수는 건강이 나빠 2선에 물러나 있었지만 당내 영향력은 여전했다. 그러나 인촌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죽산은 약속대로 얼마뒤 성명을 냈다. 인촌은 민국당계의 중진들을 불러 설득했다. 그랬지만 보수파의 반대는 완강했다. 죽산의 입당을 반대했던 김준연도 ML당에 참여하는 등 일제하 조선공산당원이었다가 전향했다. 병석의 인촌은 보수파의 반대론을 돌려놓지 못한채 55년 2월20일 숨졌다. 보수진영과 합류하는 죽산의 정치구상은 공산당 출신이라는 경력에 걸려 좌절됐다.

조봉암과 서상일 등 혁신세력은 55년 9월 광릉회의에서 독자 정당추진으로 돌아섰다. 서상일은 보수파 원로였다. 당의 강령과 정강정책은 이동화 윤길중에게 맡겼다. 서상일 조봉암 박기출 이동화 김성숙 신숙 등 12명의 추진대표가 지도부였다. 우익청년단 출신에서 민주사회주의자까지 다양한 세력이 들어왔다.

죽산 주변엔 우익청년단 출신이 많았다. 민족청년단이란 과격단체가 죽산 조봉암 부대의 행동대가 된 경우는 최희규(崔熙圭)가 증언한다. 56년 3월31일 진보당은 전국추진대표회의를 열어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기로 했다.

56년 대선, 야권 후보단일화 과정

민주당과 진보당의 후보단일화협상은 56년 4월27일 신익희 조봉암 회담 결렬로 끝난듯했다. 그러나 발표와 달리 이면엔 사실상 단일화협상은 ‘원칙적 합의’가 있었다. 박진목은 “나는 죽산 계열이었지만 해공 신익희의 사위 김재호, 장남 신하균과도 가까워 양쪽을 오가며 연락했다. 해공 신익희는 나는 죽산과 약속을 지킨다. 우리 당에서 죽산을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죽산을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다고 말입니다”고 당시를 증언했다.

민주당의 조병옥 최고위원도 5월 초 성명에서 “야당 단일후보 교섭에 내가 장애가 된 모양인데 필요하면 민주당 최고위원 자리도 내놓겠다”고 했다. 야당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위한 신익희 조봉암 회담은 56년 5월6일 전주에서 열기로 했다. 그러나 하루전날 신익희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백지화됐다. 해공의 서거로 죽산은 야당의 단일 대통령후보가 됐다. 진보당은 연합전선을 노려 재빨리 박기출 부통령후보를 사퇴시키고 민주당의 장면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연합은 실현되지 않았다. 민주당의 김준연은 조봉암 후보를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대통령에는 자유당 이승만 후보를 지지한다고 성명했다. 민주당은 특별성명에서 “정권교체를 단념하고 부통령선거에만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56년 5월 15일 투표일. 개표결과 이승만 504만표, 조봉암 216만표, 신익희 추모표가 대부분인 무효 185만표였다. 부통령선거는 자유당의 이기붕이 20만표차로 장면 후보에게 졌다. 4.19 이후 자유당 간부들의 상당수가 이때 선거에서도 개표부정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자유당 간부들은 “개표 시작때 예상 밖의 조봉암 표에 놀랐다. 이래서 민주당과 협상해다. 부통령 개표는 공정하게 할테니 대통령선거 개표는 종사원에게 맡기라”고 했다. 지역에선 너무 심하게 이승만 표를 늘려 강원도 정선에선 2만5천표 대 34표라는 심한 불균형을 드러냈다. 박문철(朴汶喆) 당시 진보당 경남도당 선전부장(효광상사 대표)는 “나는 용케 부산 중구 개표참관을 했는데 내가 계산한 것은 죽산이 3만, 이승만 1만표선이었다. 그런데 선관위는 발표를 하지 않다가 나를 경찰에 연행한 뒤 발표했는데 서로 바꿔서 발표했다”고 증언했다.

반공청년과 특무기관 출신이 장악한 진보당

죽산 계열은 56년 11월 10일 시공관에서 창당대회를 열고 진보당을 창당했다. 위원장 조봉암, 부위원장 박기출, 김달호로 지도부를 구성했다. 서상일은 나가서 민주혁신당을 창당했다. 종로통의 장안빌딩에 사무실을 얻었다. 서울시당 결당대회때는 자유당의 전위폭력배 유지광파 청년들이 난입해 용공분자는 쳐부숴야 한다면서 깡통 계란 사과 등을 던져 수라장을 만들고 난투극을 벌였다. 박기출 김달호 두 부위원장은 우파 활동의 경력자들이다.

간사장 윤길중은 해방 직후 상해 임정의 건국사업으로 일했다. 윤길중은 죽산계열이 되기 전 신익희 측근이었다. 최희규 당무국장과 그 그룹은 반공 극우파였다. 조직부의 핵심 전세용과 안경득도 해방 이후 북한공산당에 쫓겨 남하한 반공주의자였다. 진보당에 참여한 신창균은 “나는 김구 선생이 만든 한독당의 재정부장이었다. 김구 선생은 그때 죽산에게 입당 교섭을 해보라고 했다. 죽산이 공산당이라면 가능했겠는가”라고 말했다. 조희규 진보당 선전위원장은 “나는 해방 이후 안재홍 선생이 운영한 한성일보 정치부장이었다”고 말했다. 진보당 안에선 청년단 출신이나 특무기관 출신이 너무 많다는 불평이 나올 정도로 조직은 우파색이 강했다.


제4부 형장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

피고들은 2심을 낙관했다. 문제의 양명산이 진실을 말하겠다고 통고했기 때문이다. 김봉환 변호사는 “1심 끝난 뒤 양명산의 부인이 나를 찾아와 변론을 부탁했다. 부인은 속았다며 본인을 만나보면 알 것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양명산은 본명이 양이섭이다. 진보당 사건이 났을 때는 52세였다. 평북 강계출신으로 1927년 중국 천진중을 나와 중국으로 건너가 곡물상으로 상해 임정의 독립자금을 후원했다. 부유한 집 출신이라 거상이었다. 그때 이름은 김동호(혹은 김동철)를 사용했다. 양명산이 죽산과 처음 만난 건 상해시절이다. 죽산은 코민테른 원동부의 조선공산당 대표로 항일운동을 하던 때다. 양명산은 상해 임정의 <독립신문>에 3만원을 기부했다. 그 시절 죽산은 상해 프랑스 조계에 살면서 김동철(양명산) 역시 이웃에 살아 죽산의 재정 후원자이기도 했다. 양명산은 1931년 4월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양명산은 4년간 신의주 형무소에서 살았다. 죽산은 양명산보다 1년 뒤 체포돼 신의주 형무소에 함께 수감됐다. 양명산은 출옥 뒤 잠시 식민지 침략과 수탈의 대표기관이던 만주철도에서 일했다.

해방 후 귀국한 양명산은 신의주에서 건국무역사를 차렸다. 양명산은 46년 8월 남하해 인천서에 체포됐다 풀려났다. 이 무렵 양명산은 죽산을 잠시 만났다. 양명산은 6.25때 남하해 대구 부산으로 피난갔고 휴전 뒤 강원도 속초에 자리잡고 해산물상회를 차려 살았다. 양명산이 남북을 내왕한 건 55년이다.

양명산은 2심에선 간첩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재판부도 검찰도 이를 짐짓 받아들이지 않는다. 양이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했지만 단체원으로 활동한 경력은 없다. 일경에 잡히자 일본의 중요기관(만철)에서 충실한 협력자 노릇을 했다.

도둑의 돈으로 큰 조선공산당 상해지도부

양명산은 31년 6월 상해에서 잡혀 신의주로 압송됐을 때 죄명은 절도와 치안유지법 위반이다. 절도는 우편행낭을 훔친 일이다. 양은 1925년 9월 26일 오후 4시50분께 신의주 우체국 집배원으로 일하면서 우편 행낭을 옮기던 중 평안북도 삭주군 고성면 부전동에서 행낭을 열어 가격표시 우편물 38통을 훔쳤다. 우편물 중에는 동삼성 관록호 대양표 3만5968원이 있었다. 당시 일본돈으로 환산하면 2만5180원의 거금이다. 양명산은 이 돈을 훔쳐 중국으로 도망쳤다.

양명산은 부유한 집안 출신이 아니다. 그는 10대 소년때 우체부로 취직했다. 19살의 우체부가 어느날 거액의 돈 2만원을 훔쳐 중국으로 도망쳤다. 조봉암 등 중국에선 양을 부잣집 아들로 아버지 몰래 거액을 가지고 나왔다고들 알고 있었다. 훔친 돈 2만원을 밑천으로 처음부터 거상이 됐다.

죽산의 딸 조호정(曺滬晶)의 이름에 들어간 호(滬)는 상해의 옛 지명 호강(滬江)을 딴 것으로 상해에서 낳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조호정은 “김사장(양명산)은 약수동 저희집에 처음왔을 때 아버님이 김 사장에게 저를 인사시켰다”고 회상했다. 양은 신의주 감옥에서 4(3)년을 살고 나온 뒤 일본군 수비대 통역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 일본의 대륙지출의 전위기관인 만주철도의 경무처에서 일했다.

양명산은 2심을 앞두고 변호사에게 “공판이 진행되면서 조봉암의 간첩협의가 나와 관련된 것 뿐임을 알고 고민했다. 변호사들이 추궁할때는 괴로웠다. 지난 6월21일 결심공판 뒤 선고날까지 12일도안 단식해 7월 2일 선고공판에서 사실을 고백하려 했지만 이날 따라 보통 공판 개정 뒤 약 2분 동안 묵상하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말을 못했다”고 했다.

허공만 쳐다보던 2심 판사

양명산 피고의 번복 진술은 1심에서 조봉암 피고인을 유죄로 간첩혐의를 모조리 흔들어 버렸다. 양명산은 많은 새 사실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재판부는 변호인단이 제출한 증거보강이나 증인채택을 묵살한 채 다른 피고인의 보충 심문으로 옮아가 재판 종결을 서두르는 인상을 주었다. 1심에서 진보당 탈당의사를 밝혔던 김달호 피고인이나 “나는 죽산이 간첩과 관련된 줄은 몰랐다”고 했던 박기출 피고인 등은 1심 때의 태도가 폐쇄된 속에서 신문보도만을 전해듣고 사태판단을 잘못했던 탓이라면서 진보당은 물론 평화통일이란 강령도 합법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김용보(金容普) 부장판사가 1.4 후퇴때 남하했고 오제도 검사 등 친지의 주선으로 법관으로 복직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최희규 진보당 당무부장은 “진보당 간부 1차 검거뒤 나는 별동대를 조직해 중앙당을 지키게 했다. 별동대에는 나와 함께 진보당에 입당한 이홍렬과 선우 동지도 있었다. 두 사람은 김두한 그룹에서 청년운동도 했고, 6.25때는 국군유격대에도 참여했던 우익 과격파였다”고 말했다.

10월 22일 오전 피고 최후진술뒤 김용보 2심 재판장은 검찰에게 도주우려가 있는가 하고 물은 뒤 검사가 그렇다고 답하자 1심에서 무죄선고로 보석으로 풀려났던 윤길중 등 18명의 피고인의 재구속을 집행했다. 김용보 재판장은 조봉암 양명산 두 피고인에 원심을 파기하고 간첩 및 국보법 위반죄를 적용 검찰의 구형과 똑같이 사형을 언도했다. 진보당 간부들에게도 1심의 무죄를 뒤엎고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유죄를 선고했다. 죽산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김용보 2심 재판장은 이북에서 판사를 하다가 1.4 후퇴때 남하해 법관으로 약점이 많았다.

판결문 뒤편의 수수께끼

국보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자유당과 민주당이 격돌한 58년의 2.4 파동은 진보당 사건과도 관계가 있다. 개정안이 진보당 사건의 2심 판결 뒤 구체화됐다. 양면산의 처 김귀녀는 재판의 결과는 당국의 약속과는 다르다는 항의를 하고 다니다 간첩혐의로 구속됐다. 조봉암 담당 김춘봉 변호사도 경제사범으로 입건됐다. 대통령은 “하나의 법을 가지고 한 나라의 사람들이 판이한 재판을 하게 되면 어느 것이 옳은가를 국민이 판단하기 힘들 것이다. 재판의 권위를 세워줄 것을 사법부에 요망한다”고 언급했다.

대통령은 2심 판결에 만족을 표시했다. 그러니까 1심 판결처럼 친공판사규탄 데모가 일어나는 그런 사태가 없도록 하는 엄중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표시했다. 장면 부통령도 2.4 보안법 파동에 대한 민주당의 견해를 전달하기 위해 대통령에게 면담신청을 냈다. 교수 출신인 이동화 피고인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었다가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정착한 그의 사상적 방황과 소신을 직접 집필해 상고이유서에 담기도 했다.

59년 2월 초 대법원은 재판장 김세원, 주심 김갑수, 배심 배한성 허보 변옥주 대법관 등 5명의 합의부로 재판부를 구성했다. 재판부는 59년 2월 27일 낮 11시 선고공판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예정시간을 1시간 20분을 넘긴 12시 20분 주심 김갑수 대법관은 “지금부터 진보당 사건에 대한 판결을 언도한다”고 선언했다. “진보당의 강령정책은 헌법위반이 아니다. 조봉암은 괴뢰의 지령을 받고... 피고인 조봉암은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죽산은 “판결은 잘 됐다. 무죄가 안 될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이념이 다른 사람이 서로 대립할 때에는 한 쪽이 없어져야만 승리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판결문 낭독 때는 ‘무기’

신태옥 변호사는 죽산에 대한 사형판결은 당초 무기였던 것을 선고직전의 회의, 즉 김갑수 대법관과 오제도 검사의 면담 후 열린 재판부 회의에서 사형으로 고쳐진 듯한 의혹이 있다고 했다. 주심 김갑수 대법관은 “합의를 변경한 사실은 없다”고 단언했다. 변호인에게 송달된 판결문으로 보면 “법률에 비쳐보건대 피고인 조봉암의 판시 행위 중... 사형에 처하고...”라고 돼 있다. 판결문 낭독 때는 문제가 된 “사형에 처하고”를 “무기에 처하고”라고 읽어 변호인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그대로 이제 죽지는 않게 됐다”고 안도했다는 것이다.

김달호씨는 자유당과 어떤 타협을 위해 죽산을 찾아갔다. 그러나 죽산은 타협을 거부했다. 한국일보는 제4회에 걸친 연재로 사형판결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글을 실었다. 김갑수 대법관은 한국일보에 “진보당 판결은 오판이었나”라는 제목으로 10회 걸친 연재를 통해 판결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당황한 변호인단은 59년 5월5일 재심청구서를 냈다. 재심의 심리 역시 3심의 주심이던 김갑수 대법관에게 맡겨졌다.

정치적 구명운동도 펼쳐졌다. 이명하 진보당 조직부장은 “진보당 간부 몇 사람이 이기붕 의장 비서실장이던 한갑수씨를 만났다”고 했다. 대검은 “일본 지역의 조봉암 구명위는 조가 농림장관일때 비서였으며 그뒤 간첩과 접선혐의로 대법원에 재판이 계류돼 있으면서 병보석으로 석방되자 도피한 이영근과 역시 같은 사건에 관련돼 기소됐다가 병보석 중 도피한 김봉진 등이 주동이 됐다”고 발표했다. 59년 7월16일 사형수 조봉암은 제헌절 성명을 내고 “과거의 우리 동지들은 현실의 포로가 되지 말고 더욱 조국번영과 우리의 이념을 살리기 위하여 최후까지 노력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조봉암 구명운동자들

딸 조호정이 아버지 구명운동에 나겄다. 이기붕의 부인인 박 마리아 여사를 만나려 이화여대로 찾아가 겨우 만났다. 딸 호정의 애절한 발걸음이 전 총리 장택상을 구명운동에 나서게 했다. 장택상은 조봉암과 6.25때 대화에서 “공산당 잡던 전 수도청장이 전 공산당원 조봉암에게 가족 부탁을 다 하나”고 파안대소했던 사실을 소개했다. (장택상은 6.25때 조봉암에게 자기 가족의 피신을 부탁한 바 있다.) 장택상은 “호정이가 내 집을 찾아와 ‘일이 닥쳐온다’는 뉴스를 내게 전하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즉시 구명운동에 나섰다”고 말했다.

치안국장을 지냈고 당시 자유당 부총무였던 이성주도 구명호소를 받아들였다. 이성주는 죽산과 때론 마작을 즐기는 등 친하게 지냈다. 이성주가 죽산 구명을 제안한 날 대부분 찬성했으나 다음날 장경근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때는 이승만 이기붕 장경근 라인으로 굳어져 있을때라 모두들 유구무언이었다.

대법원은 7월30일 조봉암 피고인의 재심청구를 이유없다고 기각했다. 장택상이 메모를 보내왔어요. “죽산 처형... 통곡 통곡”이라는 단 8자의 메모였다. 59년 7월 29일 양명산 사형집행, 7월30일 조봉암 재심기각, 31일 조봉암 사형집행. 안문경 서울고검 검사는 아침 일찍 서대문형무소로 나가 사형집행을 준비했다.

죽산은 누가복음 23장 23절을 읽어달라고 했다. 크리스찬이 아닌 그가 왜 성경귀절을 읽어달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59년 7월31일 11시3분 죽산은 사형집행당했다. 당시 죽산은 충현동 산 4-5번지에 살았다. 죽산의 외아들 조규호(당시 10살) 군 등 7명의 가족이 살았다. 죽산의 양자 규진 내외와 자녀 4남매도 살았다. 진보당원중 가장 젊은 권대복이 소리내어 통곡했다.

죽산의 상가에 모인 사람들

현직 국회의원이자 전 총리였던 장택상씨마저 장충동까지는 왔으나 상가에는 끝내 와보지 못한 사실이 그때 경찰의 경계를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59년 8월2일 17시반 유족들의 흐느낌 속에 죽산은 땅에 묻혔다. 8월1일 오전 이강학 치안국장은 조봉암 보도통제를 요청하는 경고문을 전 신문통신사에 보냈다. 한국일보만이 1단으로 보도했다. “지난 7월31일 상호 사형이 집행된 조봉암의 시체는 2일 하오 서울 시내 충현동 그의 집에서 발인되어 하오 5시반 경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보도통제의 근거가 된 법률이 총독부령 제120호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신문들은 늦게 보도했다. 미국의 뉴욕타임즈는 죽산의 사진을 3단으로 싣고 이 사실을 보도했다. 영국의 이코너미스트는 “이승만의 경찰이 무고한 조봉암의 목에 오랏줄을 매어 정적을 말살했다”고 논평했다. 일본도 죽산의 처형을 비판했다. 일본 거류민단은 8월12일 죽산 추도식을 올렸다.

수사당국은 또 간첩검거를 발표하면서 조봉암 양면산의 구출 사명을 띠고 남파됐다고 했다. 거물여간첩 김귀동도 그 중 하나다. 수사당국은 감추었지만 김귀동은 양명산의 아내였다. 그녀는 해방 전이나 후나 이북엘 가본 일이 없다. 속초에서 어물장사를 하던 과부였다. 그녀는 54년도인가 그러니까 사건이 나기 2~3년 전 양명산과 만나 재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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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

    한국현대사의 비극이네요. 그런데 또 한번의 희극으로 역사는 반복하는것 같습니다.

  • 조심

    평화통일하자 = 빨갱이..
    그때 빨갱이는 평화통일.. 이승만과 정치하는 양반은 북진통일.. 그러니 평화통일을 말했으니 빨갱이랑 같은 소리하거니 빨갱이와 같은거이고 어찌보니 빨갱이네... 한때.. 연방제... 이것도 빨갱이들이 한말인데 이걸 말하면 빨갱이로 잡아가....
    그런데 요즘은 평화통일도 말하고 북한체제를 인정하기도 말하기도 하고 앞서 정부에서 빨갱이로 잡아가던걸 요즘은 정부가 이러니 저리니 하니,., 참 이상한 세상이요,.,.. 법이 바뀐것이 아닐텐테.. 정부는 김정일위원장이라고 하고...눈에 가시 같은 놈이 김정일위원장이라고 해봐라..찬양고무죄가 있다는걸 알게 될 것고... 남북통일과 관련하여 온갖 많은 설이 나왔는데 ...정부가 하는 말을 눈에가시 같은 놈이 말하면...국보법이 있구나를 알게 될 거고... 예전에는 반대주장이 문제지만 지금은 다들 한다고 해도 문제가 되니 더 머리가 복잡한 세상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