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조용히 다가온 전망

[식물성 투쟁의지](37)

씻을 곳 하나 없어
산발한 머리, 기름 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퇴근하는 사람의 저녁입니다
배춧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다 울컥 ... 하는 사람의 저녁입니다
저물어가는 것들은 아름다웠던 날들의 긴 독백으로 사무칩니다

젖은 몸은 군더더기 하나 없는 서러운 맨몸입니다
아무 것도 갖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평등에 가까운 투명입니다

상처받은 몸으로 내 곁에 왔다가
상처받은 몸으로 내 곁을 떠나간 그대여
저물녘에 이르러 더욱 사무치는 날들입니다

내 젖은 몸은 그댈 위해 저녁밥상을 차리겠습니다
내 손맛이 그대 입맛에 맞을지 걱정입니다

내가 뼈아픈 건 그대의 좋은 대화상대가 돼 주지 못했다는 겁니다
판단과 규정에 익숙한 나의 대화법이
공감에 적응하기엔 너무 서툴고 어설펐습니다

하지만 치유프로그램으로 기타를 배우고 기타를 치며
‘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를 부르는
리듬을 갖는 그대 목소리가
나에게 조용히 다가온 전망인 줄
그대가 떠나고서야 알았습니다

흐드러지게 노란 개나리가 만발한 봄날 봄날
속절없이 그대를 떠나보내고
난 노란개나리처럼 아팠습니다

아프도록 우리 삶을 수평적 대지에 이르게 한
그대의 투쟁이
삶의 치유력임을 알겠습니다
밥상을 마주 보고 환히 웃던 그대를
젖은 몸으로 기억하겠습니다 (2012년 9월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