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는 것 못지않게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우리의투쟁] 금속노조 발레오만도지회(2) 박진수·신시연 조합원 인터뷰

[편집자주]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너무 오래 싸우고 있다. 갈수록 장기투쟁사업장이 많아지고 벅찬 승리의 소식을 들은 기억은 오래다. 이심전심 통하는 마음으로 연대의 기운을 나누며 힘을 내지만, 지난한 싸움은 주체의 몫으로만 남아 외롭게 이어진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독이고 새롭게 결의하며 오늘도 내일도 싸우지만, 때로는 잊히고 때로는 외면받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가 <오늘, 우리의 투쟁>을 통해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함께 싸워 함께 승리하는 날까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우리 모두의 연대를 소망하며 전한다.

  발레오만도지회 박진수 조합원(왼쪽)과 신시연 조합원 [출처: 손소희]

2010년 2월 직장폐쇄 이후 투쟁이 본격화됐다. 그 전에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가?

2009년 3월에 현 강기봉 사장이 왔고, 그 며칠 전에 노무인사담당 이사가 바뀌었다. 오자마자 체육대회 하지 말자, 작업복 적게 주겠다, 기타 등등해서 임금까지는 손 못 대고 복지 부분이랑 식당‧경비‧청소노동자를 외주화하겠다는 내용까지 31가지 축소안을 노조에 던졌다. 여름에 싸워서 철회시키고, 합의 끝나고 바로 선거 치르고 몇 개월 안 돼서 직장폐쇄가 발생했다. 직장폐쇄 이전 상황들을 보면, 분명 생산량이 평상시보다 많은데 2009년 12월경 상용공장에 재고를 쌓기 시작했다. 집행부에서 의심하고 확인했지만, 외국에 나갈 게 많다는 식으로 의도적으로 숨겼다. 2010년 1월 하순에는 주소, 전화번호, 군필 여부, 일당 등까지 포함해서 신상명세서를 모두 새로 작성했다. 하필 연말정산 시기여서 전혀 의심을 안 했는데, 지나고 보니까 가정통신문 작업을 하기 위해서 그런 것 같다.

그 전에는 정문 앞의 큰 은행나무를 베어내기도 했다. 나무 때문에 밖에 있는 조합원들을 감시할 수 없는 조건이었는데, CCTV를 달기 위해서 베어낸 거였다. 지나고 보니까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치밀한 준비였다. 2009년 여름에는 조선일보에서 경주는 노조천국이다, 금속노조 사업장이 많아서 큰 도로만 막으면 울산으로 물량을 못 내보기 때문에 공단이 마비된다, 조합원 몇 명당 전임자 숫자까지 거론하면서 상근자가 많고 귀족노조다 하는 식의 기사가 나간 적도 있었다.

2010년 투쟁이 시작된 구체적인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2010년 1월 말에 노무인사담당 이사가 경비노동자들에게 용역화를 해야 하니까 현장으로 전환배치를 해주겠다고 하면서, 절대 다른 데는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 당연히 소문이 돌았고, 노조가 경비노동자들에게 전환배치는 단협에 의하면 협의해야 하는 사항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할 수 없다고 얘기를 했다. 그리고는 정보를 알아보는 사이 2월 4일에 회사가 경비실에 용역경비를 먼저 투입해서 일을 시켰다. 노조에서는 일방적인 도발이라고 규정하고 바로 용역 빼라는 투쟁을 했다. 조합원들 다 불러내서 정문 경비실 앞에서 항의하고, 문까지 닫아버리고 세게 나갔다. 그날은 야간조 파업까지 하면서 일단 후퇴시키고, 바로 지부운영위 승인을 얻어서 다음날 파업 찬반투표를 했다. 압도적으로 쟁의행위가 가결되어서 생산량을 30% 감소시켜서 70%만 하는 고품질 투쟁을 며칠간 진행했다.

사측이 또 다른 도발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통제하기로 했던 설 연휴 기간 특근은 노조가 풀었는데, 쟤들이 그걸 깡그리 무시하고 직장폐쇄를 감행했다. 그 전에 쟤들이, 잘못 꼬일까 싶어서 그랬는지 ‘설 연휴 이후에 투쟁을 하지 않는다’는 걸 확약해라, 투쟁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노조가 밝히라는 공문을 보내왔다. 그런데 노조가 어떻게 그런 걸 받나? 얘들이 빌미를 갖고 가려던 거였는데, 의도대로 안 되니까 설 연휴 끝에 새벽에 직장폐쇄를 한 거다.

투쟁이 길어졌다. 비생산부문의 외주화로 시작된 투쟁이었고, 자본철수에 대한 이야기도 거론됐다. 처음 분위기는 어떠했는가

처음에 집행부는 1~2주 안에 끝난다고 봤었다. 현대자동차에 납품하는 업체가 파업을 길게 갈 수 없고, 조합원들이 나와 있는데 절대 라인 못 돌린다, 나쁘게 말하면 자만심 그런 게 있었다. 명확한 대안도 없이 무조건 조합원만 안 들어가고 버티면 이길 거라고 생각했던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 지금 안에 들어가 있는 운전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그때 우리 걱정하지 말고 외주 처리한다고 하면 받아줘라 그랬었다. 쉽게 말하면 자기희생인데, 자기 일 때문에 이 600명이 싸우고 있다는 그런 부담감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다행히, 조합 내부에서 외주화를 용인해야 한다거나 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2009년에 매물로 나온다는 얘기가 있어서 노조에서 사실 확인을 한 적이 있었고 대표이사 명의로 아니라고 했었다. 그래 놓고는 분위기를 잡으려고 했는지, 직장폐쇄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청산 쪽으로 분위기를 몰고 갔다. 그런데 당시 경비 외주화 시동을 걸었던 노무인사담당 이사가 직장폐쇄 며칠 후 사표를 썼다. 돌아섰다고 생각해서 노조가 만났는데 청산설에 대해서 강기봉이 자기 몸값 올리려는 거라는 등의 얘기를 해줬다. 그 양반은 경주 출신이고 경비노동자들도 절반 정도는 고향 후배였는데, 노무 생활 오래 해왔지만 저렇게 하는 건 처음 봤다면서 아주 부정적인 얘기를 했다. 강기봉 사장과 형님 아우 하는 관계였지만, 오자마자 두어 달 만에 직장폐쇄하고 후배들 다 날리려고 하니까 이용당했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 덕분에 청산설로 흔들리는 건 정리가 됐다.

직장폐쇄를 지속하면서 사측이 노노갈등을 전면화했다. 90% 이상의 찬성으로 민주노총을 탈퇴하고 어용노조가 장악했다고 알려졌는데, 당시 현장의 분위기는 어떠했는가

‘조조모’라고 ‘조합원을 위한 조합원의 모임’이 직장폐쇄 기간 중에 회사의 사주로 안에 만들어졌다. 일부는 공장 안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복귀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는데, 미리 선별을 했었다. 총회나 선거도, 총회 하자마자 바로 추천서도 없이 그 자리에서 추천해서 선거를 진행했다. 그때 이미 지금 현재 어용노조위원장 정홍섭이가 위원장 후보로 나왔다. 미리 다 준비가 되어 있었고 짜여 있었다. 총회할 때도 해고자들은 들어가지도 못하게 해서 밖에서 문을 뚫고 들어갔었다. 이의 있습니다! 소리 질러도 무시하고. 총회 투표함이 각 부서별로 나갔다. 어느 부서에서 반대표가 얼마 나오는지 다 알 수 있었고, 반대표 많으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았다. 당시 나는 미복귀 상태였는데, 미복귀자는 또 따로 투표함이 있었다. 그러면 미복귀자 입장에서는 여기서 반대가 많이 나오면 영원히 복귀를 못한다는, 그런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투표는 했다지만 자기 의사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모든 절차 자체에 문제가 있었지만 감히 반대를 찍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 뒤에도 철저하게 감시와 통제를 받다 보니까 조합원들이 자기 목소리를 절대 낼 수 없었다. 하물며 금속하고는 아예 만나지도 못하고, 경조사도 못 가게 했다. 사람들이 현장에서도 일하는 것에 대해서밖에 얘기를 안 했다. 어떤 사소한 거 하나 얘기해도 다 보고가 올라가니까. 초창기에는 일하고 있으면 와서 계속 와서 감시하다가 신경을 건드렸다. 일은 일대로 짜증나는데, 옆에 붙어서 5만 원짜리 아지매 쓰는 게 낫지, 회사 잘 돌아가게 잘라야 되는데 이것들, 그런 말 들으면 환장한다. 가서 한 번 붙어서 회사 날리면 안 되나 그런 생각도 한두 번 한 게 아니다.

금속노조가 무력화되고 자본의 통제가 극심해지면서, ‘노사상생 우수사업장’으로 거론되고 경제지 등에 모범사례로도 많이 회자됐다. 실제 분위기는 어떠했는가

초반에도 이건 아니라고 하는 부분이 있었다. 왜냐하면 초반에 이미 조합이 완전히 박살나다시피 했다. 연행될 사람 연행되고 해고될 사람 해고되고, 누가 대비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는 좋고 나쁘고도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코오롱호텔에서 사장이 직원들 모아놓고, 회사 살리는 안을 내라는 워크숍을 했다. 사측에서 팀을 만들어서 관리직 사원들 하나씩 테이블에 앉혀놓고 분위기를 띄운다. 회사 살리는 안이라고 내놓는 게 전부다 반납이다. 수당을 까자, 물량을 올리자, 정년퇴직 나이를 낮추자, 하물며 그걸로 되냐, 더 내야 된다, 학자금도 줘버리자, 다 주자, 이렇게 된 거다. 옷 다 벗자, 그런 거다. 사장은 그때 시장까지 초대해서 허허거리면서 여러분들 의견 잘 받아들이겠다, 그래도 나도 자식 키우니까 건강검진이랑 학자금은 안 빼앗아가겠다, 이랬었다.

성과급도 예전에는 단협에 의거해서 일률적으로 줬었는데, 이후로는 S부터 D까지 7등급으로 나눠서 차등지급으로 바꿨다. B를 기준으로 S는 두 배, D는 한 푼도 안 준다. 다 비밀이라고 하니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자기들끼리 회사 쪽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많이 받지 않겠나 생각한다. 현장 안에도 기준 이하로 받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정확한 건 아무도 모른다, 몇 명이 받는지, 누가 받는지, 아무도 모른다. 금속이라는 이유로 D등급을 받은 사람들이 제법 있는데, 그 사람들한테는 학자금도 주지 않는다.

당시에는 회사가 정상화되면 모든 것을 돌려주겠다고 했는데, 벌써 4년이 넘게 지났고 회사 매출이 올랐고 순이익이 몇 백억이 됐는데도 돌아온 건 하나도 없다. 오히려 물량은 옛날보다 더 올랐고 수입은 많이 줄었고 복지는 모든 것이 삭감됐고, 그것도 모자라서 안에 간접부문 생산관리나 이런 쪽은 외주화 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예전에 비해 실제 현장 생산직 인원은 100명 정도가 줄어들었는데 그 물량을 맞춘다고, 40% 이상 높여서 노동 강도를 살인적으로 높이고 있는 상황이다. 일찍 조출해서 일하고 중식, 야식 시간에 일을 하고. 퇴근 시간에 잔업 이외의 시간에도 그냥, 추가 잔업 없이 일을 하고 그렇게 해서 물량을 대주고 있는 것이다.

  발레오자본의 현장통제 프로그램 [출처: 발레오만도지회]


직접적인 현장 통제 프로그램도 지탄의 대상이 됐었다.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가

직장폐쇄 끝나고 바로 TFT팀이라는 게 생겼다. 그때는 임시로 운영한다고 했었는데 지금까지 4년 넘게 하고 있고, 내가 그 팀이다. 한 때는 지피지기TFT팀이라고, 말 뜻 그대로 너를 알고 나를 알라고, 니 자신을 알라는 팀이 있었는데 뉴스타파랑 2580에 나가고 언론의 몰매를 맞고부터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아지니까 없앴다. 초창기에 했던 사람들은 100% 금속조합원이었다. 뒤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도 넘어온 사람이 많은데, 워낙 인원이 많아지다 보니까 현장에서 빼면 일이 안 돌아갈 사람들은 제외됐다.

개선TFT팀 같은 경우 작년 여름에도 내내 예초기 메고 풀 뽑기를 했었고, 현장 안에는 거의 못 들어가고 잡일들을 한다. 일지도 쓰고 업무소감도 적도록 되어 있다. 한 번은 기온이 40도에 육박하고 소방관제청에서 야외 활동 자제하라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풀이 많이 올라오니까 한 달, 두 달 계속 풀 뽑기를 하는데 하도 어지러워서, 업무소감에 더운 날씨에 그 일을 하니까 어지럽다 매일 이렇게 적었는데도 계속 그 일을 시켰다. 죽어보라는 거다. 하루는 너무 어지러워서 병원에 가려고 조퇴하겠다고 했는데, 조퇴 안 하면 오늘은 바깥일을 안 시키겠다고, 지금 내가 앉아 있어도 어지러우니까 가야겠다고 해서 바로 응급실에 가서 링거를 맞은 적도 있다. 우리는 그게 일상생활이었다. 지금도 페인트칠이나 지붕 위에 올라가서 이것저것 하고, 맨날 그런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들을 한다. 4년 동안 계속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화장실 갔다 왔다고 사유서 쓰라고 하고, 복도에 앉혀 놓고 벌세우고 그런다.

화랑대 교육이라고 집단 정신교육 같은 거에 한강철교니 오리걸음이니 하는 훈련까지 하는 프로그램도 있는데, 직원 전체가 다 하는 거다. 나이가 50이고 60이고 간에 사무직, 용역까지 다 한다. 올해는 아직 안 잡혔는데 작년까지는 했다. 올해는 상황이 이렇게 돼서 3월부터 전쟁 치르느라 일정이 아직 안 나왔다.

불이익과 탄압이 극심한데도 금속노조를 탈퇴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다들 묻는다. 처음에는 누구나 다 들어가 버렸고, 마지막에 들어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나도 자식 기르고 부양가족이 6명이나 되는데, 그런 상황에서 100일 정도 밖에 있다 보니까 여러 가지 힘든 것도 있었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복귀하라는 명령에 들어갔는데, 보니까 이게 영 아니었다. 처음에 들어가서 감금노동하고 온갖 비인간적인 대우에 사람들이 전부 다 쥐 죽은 듯이 일을 하는데, 정말 회사 다니기 싫은 분위기였다.

해고자들은 밖에서 계속 피케팅을 하고. 집이 근처라 걸어 다니는데, 하루는 걸어가는데 해고자들이 피케팅하다가, 이 친구가 “형님, 고개 드세요~” 그랬다. 얼마나 낯 뜨겁고 부끄러운지,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걸어 다닐 수가 없어서 집이 가까운 데도 차를 몰고 다녔다.

회사 다니면서 이건 아니다, 더러워서 사표를 쓰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근데 이왕이면, 그런 마음이면, 차라리 내가 한 번 부딪쳐나 보자, 해고자들도 저렇게 있고. 내가 조합 간부 한 번 안 해보고 조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젊었을 때 조합 간부라도 한 번 해볼 걸 하는 마음에 후회가 될 때도 있었다. 왜냐하면 너무 몰랐기 때문에, 정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런데 마지막에 희망을 준 게, 금속 탈퇴 서명 절차가 아직 남아있었다. 그걸 버티니까 갈수록 탄압이 들어오고, 자꾸 겪다 보니까 버틸 수 있는 내성이 생기는 거다. 그러면서 천막 식구들하고 직접적으로 교류도 하고, 그러다가 조합 지침이 같이 하자고 내려와서 우리한테 동의를 구했다. 그래서 2012년 봄부터 같이 했던 걸로 기억한다. 금속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히기 전에 우리는 이미, 탈퇴 안 했을 때부터 회사에서는 밝히든 아니든 도려내야하는 암적인 존재라고 했었다.

그렇게 생활하고 또 이런 친구들한테 조언도 받고 여러 가지 우리 조합에서 많이 가르쳐주는 것도 있고. 처음에는 힘이 없으니까 법적인 대응밖에 못 했는데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있고 지금은 회사에 들어가서도 당당하게 얘기한다, 조합 활동 방해하는 부분에 대해 비키라고 얘기하고. 징계위에 들어가서도 떳떳하게 얘기했다. 우리는 금속 조합원이기 때문에, 금속 탈퇴를 안 했다는 이유로 우리를 제명한 이 사람들은 징계위원이 아니라고. 마지막 소명 기회 때도, 안 하면 본인들에게 손해라고 얘기했지만, 우리는 금속이 들어오면 하겠다고 얘기하고. 그래서 출근정지 15일을 받게 된 거다. 어쨌든 현장에는, 회사 안에는 우리가, 금속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우리가 버틸 수 있는 데까지는 버텨봐야 한다.

  공장 안 선전전
[출처: 발레오만도지회]

해고자도 수십 명에 이르는데, 생계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 왔는가

요즘에는 좀 바뀐 걸로 아는데 최초 1년은 금속노조 신분보장기금을 받았다. 2013년에는 금속노조 경주지부에서 조합원 3천여 명이 1인당 월 1만원을 1년간 내서, 해고자들이 매달 100만원 남짓 지원을 받았다. 2014년 4월부터 또 연말까지 다시 결의를 해줬고, 올해는 파나진이라고 영천에 청산하겠다고 문 닫아버린 회사가 있는데 거기 투쟁하는 동지 9명이랑 우리 중에 생계 나간 분들 빼고 22명, 이렇게 해서 또 100만 원 정도 받는 거다. 신분보장기금이랑 마찬가지로 투쟁 이기면, 환급해야 하는 돈이기도 하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는 그걸로 해결하고, 몇 명 빼고는 대부분 부인들이 맞벌이를 한다. 한 명 한 명 따지면 뭐, 20년 벌어놓은 거 갖고 4년 못 싸우겠나 하는 거다. 집 팔아서 좁은 데로 가고, 전세 살면 월세로 가고. 그렇게라도 살면 되지, 여기서 돈 없다고 나자빠져 돈 벌러 나가면 투쟁 못 한다, 끝난다. 그럼 못 이긴다. 재판 이겨서 들어가도 노예처럼 살다가 언제든 자본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 뭐, 지금 당장 어렵더라도 버텨서 싸워야 한다.

해고자들은 생계도 물론 문제지만,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하는 게 막막하고 힘들기도 하다. 해고투쟁이라는 게, 특히 재판 문제 이런 것들이. “언제 끝나겠노?” 하는 게 그냥 막, 누구나 입에서 툭툭 나올 수밖에 없는 이런 상황까지 와 있다. 그렇지만 피해갈 수는 없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거니까.

‘금속노조 권리복원’ 투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현장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금속노조 조합원 권리복원 확약서 조직화 사업은 올해 3월부터 했다. 작년 7월 이전에는 공장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7월 합의 이후 8월부터 출입이 가능해지면서 공장 안에서 피케팅을 했다. 여기는 차를 몰고 들어가니까 인사 안 해도 뭐라고도 못하는데, 공장 안에서는 바로 앞으로 지나가니까 전혀 모른 체하고는 못 지나가고, 자연스럽게 서로 눈인사도 하고. 직접 우리가 선전물도 줄 수 있고, 그렇게 접촉면이 넓어지면서 관계가 좀 복원이 됐다.

3월부터 조직화를 시작한 이유는 3월 26일이 단협 해지 시점인데, 거기에 대한 현장 조합원들의 불안 심리가 발동된 것도 있다. 지금까지는 어쨌든 금속 인정을 받아왔고 빼앗긴 임금을 되찾을 수 있다 이런 것도 있었는데, 단협 해지랑 맞물리면서 성과급 못 받고 이런 분들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4년간 억눌려왔던 분노도 올라오는 게 있었다. 그리고 회사가 철문 만들고 구사대로 사무직들, 용역들 내세워서 해고자들하고 싸우고 치고 박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 속에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초창기에는 선전물을 잘 돌리지도 못했지만 돌려도 회사가 다 걷어가기도 하고 읽으면 한 소리 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점심시간에 나눠줘도 잔디밭에 앉아서 읽는다. 받는 게 대세가 되니까 더 이상 통제가 안 되는 거다. 마음은 우리 쪽에 와있다고 하지만 행동으로는 못 나섰던 사람들은, 앞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이 행동까지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후 투쟁의 계획과 전망은 어떠한가

어쨌든 지금 권리복원 조직사업을 통해서, 금속이 공장 내에서 실질적인 행동으로 힘의 우위를 가져와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장 핵심은 조직사업이고, 그 다음에 강기봉, 노조파괴사업주 처벌이다. 유성은 광고탑 농성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걸 갖고 특별한 투쟁을 하고 있지는 못하다.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대구고등검찰청에 항고를 했고, 민주노총 대구본부‧경북본부‧상신브레이크‧KEC‧발레오만도 다섯 개 단위가 하루씩 담당해서 피케팅을 하고 있다. 이후에 고검 앞에서 처벌 촉구 기자회견 진행하고 변호사와 대표자들이 검사까지 만나보는 일정을 잡고 있다. 만일 고검까지도 지검처럼 혐의 없다는 식으로 한다면, 법원에 직접 재판을 신청할 수밖에 없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지만, 조직사업 충실히 해서 우리가 지난 4년 동안 억울하게 당해왔던 거 보상 받을 거 다 받아야 되고 빼앗긴 권리 원상회복 다 해야 되고, 기본적으로. 그런 사업들을 하려고 하고 해야 한다.

해고자들 중에 내가 제일 젊은데, 해고자들 연세 드신 분들이 많다. 들어가서 진짜, 현장 권력을 우리가 갖고, 회사의 노예로 안 살고. 사람대접 받아가면서 살 수 있는 현장을 만들고 들어가야 진정한 복직이지, 뭐 가서 월급만 받으면 복직이 아니라는 거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열심히 하는데, 들어가셔도 정년인 경우도 많고, 금속 정년이 60세인데 2년을 못 넘긴다. 이런 분들이 끝까지 함께 싸워준다고 하는 게 너무나 고마운 거다. 우리는 들어가서 10년, 20년 해야 되니까. 이 꼬라지의 공장에 들어가서, 비인간적 대접 받으려고 복직하는 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민주노총 경주본부 연대 현수막 [출처: 철폐연대]

인터뷰를 위해 내려간 5월 7일은, 금속노조 조합원 8명에 대한 미지급 임금을 지급하라는 5월 2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원의 판결문이 도착한 날이었다. 공장 앞 작은 공원에 자리한 농성장은 해고자들과 짬을 내 들른 현장 노동자들로 북적였고, 퇴근 선전전을 하기 전 비빔국수를 나누며 조합원들은 식당노동자까지 해고해 준 덕에 이렇게 잘 먹으며 투쟁한다며 웃었다.

금속노조 미탈퇴자에게 가해지는 갖은 불이익을 감내해 온 뚝심의 노동자 박진수 조합원은 3월에 진행한 식당 피케팅으로 출근정지 15일의 징계를 받은 덕분에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를, 1990년 실습생으로 시작해 노조간부로 잔뼈가 굵은 해고자 신시연 조합원은 발레오만도지회 투쟁을 둘러싼 전반적인 이야기들을 주로 들려주었다.

살아나는 현장 분위기도 한 몫 했겠지만, 지나온 투쟁에 대해 주거니 받거니 나누는 말들 속에 서로에 대한 고마움과 신뢰가 진하게 느껴졌다. 두 동지들에게 현장의 동료들은 ‘저쪽 기업노조’가 아니라 ‘안에 있는 조합원들’이었고, 아마도 그런 마음이 모두가 사람답게 일할 수 있는 공장을 만들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의지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낙관과 헌신으로 투쟁해 승리를 목전에 둔 발레오만도지회, 사람냄새 가득한 공장을 되찾는 날까지 모두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