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업 공급망의 인권 기준이 ‘알리바이’가 되지 않으려면

[INTERNATIONAL1]


공급망을 둘러싼 국제적 흐름

공급망(Supply Chain)은 코로나19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사태를 겪으며 국제사회의 가장 큰 현안으로 부상했다. 전 세계적으로 식량과 자원 및 부품 공급 부족 사태가 발생하며 물가가 급격히 상승하고 경기침체가 가속화하고 있다. 이미 개도국에선 식량 공급부족에 따른 시민의 저항과 이로 인한 정치적 불안이 발생하고 있으며, 한국 역시 본격적으로 그 영향권에 들어가고 있다. 이 가운데, 미국은 중국·러시아와의 대치 국면 속에서 특히 중국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위한 공급망 재편을 시도하며 한국에도 동참을 요구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에 참여하면서 중국과의 갈등은 더욱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경제 안보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10위권의 한국 경제가 자신들의 공급망에서 인권, 노동, 환경에 관한 어떤 원칙을 가져갈 것인지 충분한 논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초국적 기업들의 인권침해는 국제사회의 현안으로 부상했다. 이에 따라 글로벌 시민사회는 UN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초국적기업의 인권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해왔다. 그 결과 2011년에 ‘UN 기업과 인권 이행 원칙’이 만들어졌고, 이후 EU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를 법제화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됐다. 그리고 마침내 올해 2월, EU 집행위원회는 EU에서 활동하는 기업들에 인권실사(Human Rights Due Diligence)를 의무화하겠다는 안을 발표했다.


즉, EU에서 활동하는 한국 기업들도 공급망까지 포괄하는 인권 및 환경침해 요소를 확인하고, 대책을 시행하는 동시에 시행 여부를 평가해 EU에 보고하는 것이 의무화된 것이다. EU에서 활동하지 않더라도 EU 기업의 공급망에 포함되는 한국 기업들은 EU 기업들로부터 인권 및 환경기준 준수 여부를 확인받게 될 예정이다.

무려 30년 넘게 초국적기업의 인권침해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를 논의하던 국제사회는 기업이 의무적으로 인권 및 환경문제를 ‘실사’하도록 가닥을 잡아가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최근 기업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권 기준 적용 논의가 흔들릴 상황에 놓였다. 미국과 유럽의 공급망이 불안해지는 상황에서 인권 및 환경실사 의무화 흐름을 장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한국 정부의 공급망 논의

문재인 정부를 포함해 한국 정부는 기업에 대한 규제를 도입하는데 극도로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럼에도 ‘기업도 인권을 존중할 책임이 있다’라는 국제사회의 흐름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2021년 12월 28일, 문재인 정부는 인권정책기본법을 발의하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시켰다.

제17조(기업의 인권존중책임)

① 기업은 국내ㆍ국외에서의 기업활동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제3자가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에 관여해서는 아니 된다.

② 기업은 기업활동으로 인한 인권침해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여 그 피해자가 구제를 요구할 수 있는 절차를 사전에 마련하고, 적절한 구제 수단을 제공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제18조(기업의 인권침해 예방을 위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노력 등)

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기업활동으로 인한 인권침해를 예방하고, 그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하여 필요한 법령과 정책을 마련하여야 한다.


즉, 최소한 한국 기업과 정부가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인권침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법률에 담은 것이다. 이는 한국 기업의 공급망에 관한 정부 차원의 원칙을 담은 첫 번째 법률(안)이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 법률은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이며, 그 사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이후 윤석열 정부는 한국 기업의 공급망에 대해 자원확보와 기업지원을 골자로 하는 공급망 관리 대책을 들고나왔다. 여기에는 한국 기업이 확보할 자원개발 과정에서 발생할 인권 및 환경침해에 대한 고려는 포함돼있지 않다. 문재인 정부에서 그나마 선언적으로라도 마련된 공급망에 대한 인권 원칙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것이다. 물론, 여전히 EU 차원에서 기업에 의무적으로 공급망에 인권 기준을 적용하겠다는 흐름은 지속되고 있다. ‘ESG 경영’이란 이름으로 국내에서도 이에 대한 입법 논의가 활발한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지난 6월 16일 국회에서는 인권실사의 법제화에 대한 토론회1)가 열렸다. 여기에는 국민의힘과 대한상공회의소도 참여했다.

이런 상황에 근거해 볼 때, 정부와 기업도 국제사회의 흐름에 따른 인권실사 의무화 법안의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에 부담이 되지 않는 수준에서 입법하거나, 그마저도 되지 못할 확률이 높다. 마찬가지로 인권정책기본법 역시 민주당이 원안을 통과시킬지 아니면 정부·여당의 요구에 따라 기업에 인권 존중 책임을 명문화한 원안을 수정할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향후 대응 과제

그동안 한국의 사회운동은 한국 기업의 공급망 문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 왔다. 하지만 한국 정부와 기업의 활동으로 세계 곳곳에서 인권 및 환경 침해 사례가 계속되고 있고, 이는 노동권 침해를 넘어 기후위기 문제와도 연계되고 있다. 실제로 기후정의운동 진영에서는 해외에서의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이나 화석연료 수입에 대한 반대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

당장 국회에 계류 중인 인권정책기본법의 통과 여부가 관건이다. 윤석열 정부, 정확히는 한동훈 법무부가 이 법에 어떤 입장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선언적인 수준에서라도 국가와 기업에 인권 존중 책임을 지우는 해당 법안의 통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기본 원칙 없이 인권 및 환경실사에만 초점이 맞춰진다면, 그럴듯한 보고서를 낸 기업에 알리바이를 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권침해 원칙을 법률로 명문화해야 기업이 허위 보고서를 내거나, 인권침해를 저질렀을 때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EU에서도 허위 보고서를 낸 기업들을 어떻게 처벌할지가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국제질서의 핵심 현안인 공급망 문제에서, 한국의 사회운동은 한국 기업에 인권 및 환경침해 예방대책을 세우고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인권환경실사 의무화와 나아가 허위로 보고하는 기업은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한국 기업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다른 나라 노동자와 주민들을 위해서라도 최소한으로 갖춰져야 할 제도다. 노동조합을 비롯한 한국의 사회운동이 공급망에 대한 인권 및 환경기준 적용 논의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한다.



[각주]

1) 사진 제목을 “여야가 하나된 ESG제도화 포럼”이라고 잡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https://www.news1.kr/photos/details/?54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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