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을 짓는 노동자들의 사회

[녹색 스트라이크]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은 어떻게 생태운동이 될 수 있는가?


생명들은 죽기에 앞서 먼저 존엄을 짓밟혔다. 그렇다, 우리는 ‘존엄이 짓밟혔다’고 얘기한다. 생태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소수자와 다양성을 옹호하고, 사회를 변혁하려는 운동에서 우리는 존엄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노동자가 존중받지 못하는 위험천만한 일터에 저항했다. 성별·나이·국적·장애·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도록 싸웠다. 경제 성장과 전쟁이란 두 바퀴를 구르며 생태 공동체를 파괴하고 학살하는 자본과 국가 권력을 폭로했다. 우리는 지구에서 사라져가는 멸종 위기종 이웃 생명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렀다. 존엄은 우리 모두의 싸움을 관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건설노동자 양회동 열사가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는다며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건설 현장에서의 위험하고 불합리한 관행을 개선하고자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활동해 왔던 그의 노력이 업무방해와 공동공갈이라는 죄목으로 돌아왔다. 그가 남긴 말에 많은 민중들이 슬퍼하고 함께 분노했다. 애도하는 날이 길어진다. 애달픈 이름들이 우리의 외침이 되고, 기도가 된다. 여전히 우리 가운데 시퍼렇게 살아있는 그의 자존심은 이 생을 버티고 서있는 나의 자존심과 무엇이 다른가?

이 시대의 존엄이란

전 지구적인 수준의 위기와 재난이 닥쳐오고 있는 이 시점에 희망찬 비전은 찾기 어렵다. 우리 대부분은 국가-자본 지배동맹의 관리 아래 허우적대고 있다. 패배와 패배를 거듭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끈질기게 부여잡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열사로부터, 그리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연약한 이웃들에게서 나는 존엄을 발견한다. 그들이 남겨준 이야기는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높이 쏘아 올린 작은 공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전은 존엄을 ‘감히 범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엄숙’한 무엇으로 정의하고 있지만 사전적 정의만으로는 존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그 맥락을 읽기 어렵다. 무엇보다 존엄하다는 우리의 삶과 생명이 생태적·경제적 위기 앞에서 함부로 내동댕이쳐지는 현실을 마주할 때면 더욱 그렇다. ‘존엄’이라는 말은 언제든 하수구를 통해 지하로 흘러 내려가는 차디찬 빗물이 된다.

존엄은 인류가 지구 행성에서 이웃 생명들과 더불어 땅에서 나서 살고, 땅으로 돌아가는 일을 거듭 경험하며 발전시킨 공동체 의식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다. 인류는 역사적으로 ‘생존을 위한 균형 감각’을 키워왔고 이를 후세에 전수해 주었다. 자연 생리와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며 발견한 균형을 마음에 새겼다. 선조들은 균형 감각이 그득히 배어나는 마음을 지혜라고 불렀다. 오래전 신의 이름으로서 주어진 계명, 혹은 원시 부족 공동체의 금기로 대표되는 계율 이면에는 전체 세계의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공동체주의적인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이 균형 감각 속에서 공동체적인 삶의 방식과 의식이 발달했고, 사람들은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었다.

폭력은 전체를 조망하고 상호 연관성을 가늠하던 균형 감각이 깨지면서 발생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자신과 타자 사이의 관계성이 파괴되고, 각자의 고유한 운명을 빼앗기는 폭력을 경험해 오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경제 체제와 과학·기술은 폭력을 수반하고 있다. 다만 국가가 폭력을 관리하고 있을 뿐이며,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는 거대한 자본 권력의 연합체들이 그 주도권을 가져가고 있다. 이들은 자연과 민중을 수탈하고 착취하며 자신의 배만 불리고 있고, 지구적 공동 운명체들을 사이에 놓고 구획 싸움을 벌이는 데 열중하고 있다. 국가는 정부 사업이라는 외피를 씌운 채 일상적으로 생태계 생명들을 학살하고, 국익과 안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이유로 전쟁에 가담하고 있다. 그 결과 생태계와 인간 사회는 역사적으로 가장 심각한 불균형을 겪고 있으며, 이미 많은 땅의 공동체들이 파국을 맞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조건에서 우리는 존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존엄이란 ‘지구’라는 행성의 특정한 조건에서, 수많은 다양한 타자와의 연관성 속에서, 그리고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우주적 질서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확인하고, 그 운명을 따르고자 하는 분투 그 자체라고 말이다. 이런 이해에 기반한다면 존엄은 공중에 떠 있는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든 삶을 살아내려는 의지에 속한다. 그리고 생의 의지를 발현하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이들에게 깃들어 있다. 자신이 누구와 함께, 어디서, 어떻게 살 것인지 가장 먼저 자신의 운명을 시험받고 있는 비인간 자연의 존재들은 그야말로 ‘존엄’이라는 당대의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깨어진 생태계의 균형으로 인해 가장 먼저 고통받는 존재들이다, 누구보다 앞서서, 그리고 최후의 순간까지 깨어진 균형을 회복시키려고 하는 이들이다.

기후 위기 시대의 존엄은 지구상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들이 주어진 한 몫의 삶을 살아내고자 애쓰는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강요하는 굴종에 온전히 저항하지 못하더라도 내 곁에 소중한 한 두 사람이라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 존엄은 깃들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존엄은 지구 공동체 전체의 균형을 조금이라도 회복하고자 하는 낮고 거대한 흐름과 연결되어 있다. 존엄은 폭력이 자행되고 있는 땅에서, 민중과 이웃 생명의 몸에 공동으로 새겨져 있는 실존의 문제다. 민중은 부지런히 사랑하고 일하고 투쟁하던 두 손으로 존엄을 감히 범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엄숙한 곳에 올려놓았다. 존엄을 향한 갈망은 생의 위협 앞에서 더 진해질 것이다.

확장된 존엄의 렌즈로 본 세계

존엄의 문제는 투쟁과 제도화 과정을 거치며 ‘인권’과 ‘자유’, ‘평등’의 이름으로 사회에 자리 잡았다. 1948년 채택된 세계인권선언문은 30개 조항에 걸쳐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인권 목록들을 담고 있다. 생명을 지니며 자신의 몸의 안전을 지킬 권리, 고문과 잔인한 처우를 받지 않을 권리, 함부로 구금당하지 않을 권리, 박해를 피해 다른 나라에서 피난처를 구할 권리,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 수준을 누릴 권리 등등. 나는 우리를 지켜온 이와 같은 목록들을 ‘생태계의 존엄’에 근거해 다시 해석하고 재조직하길 원한다. 생태계가 본래 갖고 있는 균형과 회복력에 근거하여 ‘인간 동물’로서 존엄을 지키고, ‘비인간 생물’들의 존엄과 연대하기 위한 권리 목록을 말이다. 그 목록의 문장은 ‘모든 사람은’으로 시작하지 않고 ‘모든 지구의 이웃 생명은’으로 시작하거나, 다른 이름으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확장된 존엄의 렌즈로 보았을 때, 자본주의 사회는 생태계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존엄한 이들의 분투를 분쇄하고 왜곡시키고 있다. 자본주의는 상품의 생산과 토목 공사를 위해 비인간 동물의 서식지와 인간 동물의 자연부락과 오래된 집을 무참히 파괴한다. 우리는 안락한 집을 가질 권리, 피난처를 구할 권리를 갖는다. 자본주의는 대량의 육식 생산-소비 고리를 만들기 위해 공장식 축산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그곳에서 감금당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목숨을 잃고 있는 이들과 그들의 피를 묻히며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생각한다. 유리 벽면으로 지어진 높은 빌딩에 돌진해 목이 부러져 낙하하는 새들과 고속도로 위 자동차에 부딪혀 죽는 인간 동물은 모두 자본주의의 교란 시스템에 희생당하고 있다. 숲과 들, 바다와 강은 반생태적인 정책과 오염물질에 의해 갈수록 빈곤해지고 황폐해지며 동물과 식물은 병든다. 자본주의가 건설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황폐와 나락뿐이다. 우리는 존엄으로 다시 연결되어 싸움의 전선을 엮어가야 한다.

자본주의는 황폐와 나락을 건설한다

‘자본가는 전체 사회의 필요를 자신이 소유한 생산 기계와 구매한 노동력을 통해 생산한다’, 내지는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자본가가 소유하고 있는 생산수단을 통해 사회에 필요한 상품을 생산한다’는 자본주의 이론의 전제조건은, 우리에게 무엇이 얼마나 필요하고, 어떻게 생산할 것인지 논의하고 결정할 정치적 권한을 모조리 박탈당한 사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자본가는 끊임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내적 동기를 자신의 욕망과 동일시하며 존엄으로부터 가장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는 주어진 삶을 살아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으며, 단지 온갖 지구적 존재들의 삶을 재료 삼아 누가 더 많은 이윤을 만들어 내는지 경쟁에 복무한다.

따라서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이 사회에 필요한 노동이라는 명제에 반대한다. 비단 인간 중심성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여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가령 인간에게만 필요한 것인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에게 어떤 노동이 필요한지 충분히 논의하고 결정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미 자본 권력들은 일자리 목록들을 제멋대로 재조직하고 있고, 우리는 별다른 생존 전략을 갖지 못한 채 그들이 나열한 일자리 목록들을 마우스 스크롤을 오르내리며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다. 자본가들이 이 사회에 철도와 자동차와 비행기와 선박이 필요하다고 했고 민중들은 그 산업에 복무해 임금을 받고 생활했다. 전쟁 시기에는 무기와 군수물자가 필요하니 국가 주도하에 군수공업화가 이루어졌다. 건설노동자들은 토건 자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은 살 수 없는 고층 빌딩과 아파트 단지를 짓고 있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이윤을 증대할 목적으로 생산 기계를 발달시켰고, 화학물질을 사용했다. 근대 과학기술의 진보는 자본의 무한한 이윤추구의 욕망과 깊게 결속되어 전진하고 있다. 편리하고 세련된 제품과 고층 아파트, 도시 경관은 새로운 욕구와 필요를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은 과학기술의 진보가 ‘지독한 생계의 어려움’을 극복해 주었다고 공공연하게 대중들을 학습시키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프로그램은 자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우리 삶에 필수적인 공통 기반을 갉아먹어 없애버리고 있을 뿐이다. 만일 당신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의 편의를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덕분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부당하게 착취당하고 있는 당신의 이웃 노동자의 고된 노동과 자본주의 경제가 괄시하고 있는 누군가의 호혜적인 노동 덕분이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가져다주고 있다는 진보에 강한 의문을 품어야 한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진보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이 후퇴했는지 떠들어대야 한다. 저 높은 빌딩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산이 파헤쳐졌는지 말해야 한다. 남반구 민중과 내국인 임금 노동자를 착취하고 자연을 수탈해 이룩한 북반구의 세련된 도시의 풍광과 높은 생활양식의 기만을 폭로해야 한다. 존엄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는 철저하게 황폐와 나락만을 건설해 온 것이다.


존엄을 위한 노동의 재조직

자본이 건설한 황폐와 나락 위에서 우리는 생태계의 존엄을 위해 어떤 노동을 할 것인지 논의해야 한다. 생태계 전체와 인간 동물의 상호 연관성에 근거한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존엄을 위한 노동을 재조직하는 주된 동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현재의 주류 노동의 상당 부분은 폐기되어야 할 것이고, 평가절하되던 많은 노동(특히 여성에게 부여되었던)을 중심으로 노동이 재편되어야 할 것이다. 생태계가 생태계에 속한 다양한 생물과 물질, 비물질이 서로 연대하며 균형을 회복하는 원리는 과학 기술의 주된 준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학 기술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높은 생산성(실제로는 높은 파괴성)과는 질적으로 다른 풍요로움을 선사할 것이다. 이미 자연이 우리에게 풍요를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자본주의는 민중이 자신들이 터 잡은 자연환경과 함께 더불어 살면서 오랫동안 지녀온 삶의 방식을 경제 체제에서 배제하고 구분시켜 ‘시민사회’라는 구획에 할당시켰다. 시민사회는 연대와 소통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반생태적인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연대, 소통, 돌봄 등의 영역은 비경제적인 또는 부수적인 경제 영역으로 지위를 격하시켰고 오로지 기업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시장을 경제의 주요 축으로 삼았다. 이러한 재편은 국가 권력이 자본주의 경제에 의지하면서 통치 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기업의 생산 과정에서의 과도한 착취를 완화하기 위해 공장법과 노동법이 만들어지고 노동시간이 단축되었지만(이 과정에서 엄청난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지만), 우리의 싸움은 착취의 정도를 조율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노동조합의 투쟁과 단체 교섭은 대안적인 경제 체제의 전망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노조할 권리 확대를 위한 노조법 2·3조 개정 투쟁은 매우 중요하다.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가 교섭할 권리를 갖고, 손배 가압류의 공포 없이 폭넓게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단체행동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틀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정부와 자본을 상대로 강한 교섭 역량을 갖고서 기업별 단체협약을 넘어서 업종별/지역별 공동 협약을 체결하고 나아가 전 사회적인 협약을 갱신하는 전략은,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생태사회의 전망 속에서 다양한 주체들을 포괄하며 실행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노조할 권리를 찾기 위한 운동은 자본주의와 독립적이고 대안적인 경제체제를 세우는 전략과 긴밀히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민주노총과 산별 연맹이 시도하고 있는 녹색 단체협상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내지는 대안적이고 생태적인 공동체 경제를 세우는 운동의 연합에서 정부와 자본의 지배동맹을 무너뜨릴 통합적인 전략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지배동맹의 고리를 끊어낼 작고 다양한 운동과 개인의 연합 역시 상상해 볼 수 있겠다. 각자의 자존심과 존엄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서로를 돌보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먹히기도 하는 생태 공동체다.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비인간 동물과 식물, 미생물과 무기화합물을 먹었다. 나의 생명은 누군가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고, 나의 죽음 역시 누군가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나의 몸은 생물학적으로도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며, 다양한 생물들과 시신들의 ‘모임’으로서 몸을 지니고 있다. 모임들의 모임으로써, 몸들의 몸으로써 생태사회를 상상하고 재조직하자. 다양한 몸들을 재료로 가져다 쓰면서도 몸들의 연결과 연대를 부정하는 자본주의에 저항하자. 우리는 이미 친구의 주검 위에서 존엄을 짓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존엄을 지어나갈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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