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진균/'영화독점 반대' 국제 연대 필요

최근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문제가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스크린에서만 보던 영화인들이 정부가 한미투자협정을 성사시키기 위해 미국의 요구를 수용, 현행 극장당 연 1백46일(최소 1백6일)인 의무상영일수를 2002년부터 연 92일로 축소하려는 것은 목전의 금전적 이익을 위해 우리 문화의 미래 전체를 팔아넘기는 것이자 한국영화 죽이기에 다름아니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한 거리투쟁에 나섰다.
시민단체들도 이에 가세하고 나섬으로써 스크린쿼터 사수는 사회문제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영화사상 초유의 일이며 정부도 영화인들의 예상 외의 강한 반발에 놀라는 듯하다.
▼ 배급망 잃으면 붕괴
하지만 한국영화를 잘 만들면 스크린쿼터 같은 보호막이 필요없을 것 아니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지금 같은 경제위기를 넘어서려면 철강같이 중요한 산업분야의 투자유치를 위해 영화와 같이 작은 분야를 양보하는 ‘대승적’태도가 필요하다든가, 문화도 좋지만 경제를 먼저 살려놓아야 문화가 살 수 있다는 주장들이 그것이다.
얼른 보면 영화인들과 정부가 문화와 경제 중 어느 것이 우선인가를 놓고 우선 순위를 매기는 싸움 같아 보인다. 그러나 최근 들어 문화와 경제의 상관관계가 점점 밀접하고 복잡하게 얽히고 있어 이분법적인 시각으로는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우선 영화는 단지 문화예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그 자체가 새로운 경제다. 엄청난 사전광고효과를 지닌 영화 영상산업은 21세기에는 그 직접적 부가가치가 단일 산업으로는 가장 높은 순위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며 간접적 효과는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또한 한국영화의 경쟁력 향상과 스크린쿼터의 유지는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하다. 영화인들의 주장처럼 아무리 잘 만들어도 배급망을 잃게 되면 붕괴하는 것이 영화산업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화가 40%이상 배급망을 장악한 영국의 경우 97년에 제작된 영화의 절반 이상이 상영되지 못한 비운을 맞고 있다고 한다.
더구나 한국영화는 과거와는 달리 급속하게 시장점유율이 향상되고 있으며(프랑스 일본과 함께 미국 외에 자국영화가 25% 이상 시장점유율을 유지한 3개 국가의 하나), 최근에는 칸 영화제를 비롯한 세계유수의 영화제에 다수의 작품이 문자 그대로 ‘입성’하는 등 질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영화인들은 바로 이런 성장 자체가 스크린쿼터의 힘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스크린쿼터가 축소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왜 이런 역설적인 주장이 가능할까.
만일 한국영화가 적어도 국내시장에서는 충분한 경쟁력을 지닐 수 있다면 이론상으로는 해외영화와 1대1의 경쟁이 가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여기서 ‘경쟁’의 의미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제의 핵심은 자유경쟁과 독점 사이의 변증법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직배 문제는 시장개방과 자유경쟁을 채택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공정거래의 관점에서 보면 할리우드 영화는 이미 세계영화시장을 80% 가량 독점하고 있는 위협적인 존재다.
자유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스크린쿼터는 과잉보호장치이자 자유무역을 방해하는 조치로 보이겠지만 공정거래의 관점에서 보면 할리우드 영화는 그 존재자체가 독점금지법으로 규제되어야 할 대상이다.
여기서 정말 어려운 점은 어디까지가 자유경쟁이고 어디까지가 독점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특히 양자간 투자협정 같은 경우에 그 기준은 힘의 논리에 의해 좌우된다. 돈을 꾸는 입장에선 그 기준은 더욱 불리할 것임은 자명하다.
▼ 한 국가 만으론 역부족
사실 99년부터는 서비스 분야의 개방을 둘러싼 밀레니엄 라운드가 시작될 예정이다. 이 라운드는 21세기의 주력산업이 될 지식정보영상시장의 점유권을 둘러싼 새로운 전쟁이다. 이번 한미투자협정에서 영상산업에 대한 ‘문화적 보호조치’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밀레니엄 라운드에서는 더욱 불리한 입장이 될 것이다.
우리 정부가 이렇듯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밀릴 경우 국민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제적인 자유경쟁과 독점의 변증법이라는 보다 큰 맥락에서 보면 우리 정부와 국민의 단결된 힘만으로 강대국들의 거센 압력에 대응하기는 힘들다. 이런 이유로 반독점을 위한 국제연대가 요망되는 것이다. 영화인들과 시민단체들의 이번 연대운동은 그런 점에서 문화와 서비스 분야에서 요구되는 반독점 국제연대를 위한 적절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김진균(서울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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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영화 , 김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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