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살아가는 노동자의 보편적 실존의 문제

[새책] 길에서 만난 사람 (이호동, 2015. 매일노동뉴스)

월급이 적은 곳.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와 같은 곳. 아무도 가지 않는 곳. 장래성이 전혀 없는 곳. 사회적 존경을 바라볼 수 없는 곳. 한 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

이것은 경남 거창고등학교가 졸업생들에게 권하는 직장의 조건, ‘직업선택 십계명’이다. 남다른 기독학교의 권고에는 가장 낮은 곳에서 섬김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예수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정서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몸소 실천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충고로 여겨진다. 어느 누가 사랑하는 가족이 결사반대하는 곳, 죽음으로의 귀결이 명백한 곳을 선뜻 삶의 터전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탐욕과 이기주의가 만연한 자본주의의 토양 위에서 이 십계명은 비현실적인 이정표다.

개연성 없는 여정을 리얼다큐로 승화시킨 이가 있다. 바로 이호동 전해투(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해고자복직투쟁특별위원회) 위원장이다. 그는 불투명한 장기투쟁 사업장 문제를 기꺼이 떠안는 의리파로, 해고자·비정규직과 함께하기 위해 전국을 누비며 성실하게 십계명의 정신을 계승하는 구도자다.

그의 여정의 기록, <길에서 만난 사람>이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10여 년간 그가 전해투 위원장을 맡으면서 겪은 분규현장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쉼 없이 현장을 기록한 성실함, 이 사회에 대해 갖는 사명감이 없었다면 이 책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제목을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아닌,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파도와 맞서 싸우는 자갈을 자갈들이라고 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해석했다. 저자도 남의 얘기가 아닌 언제든 자신의 일이 될지도 모를 우리 모두의 얘기라고 본서를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 각기 다른 삶의 모습, 다양한 투쟁의 흔적이 새겨져 있지만, 결국 다 읽고 나면 이 책이 현재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보편적 실존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길에서 만난 사람>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저자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저자의 기록, 둘째는 이호동 위원장에 대한 타인들의 글이다. 전반부에서는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다른 수단을 찾기 어려운 투쟁자들의 고통, 거대한 부당함에 정면으로 맞서는 이들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소소한 성공의 현장도 묘사되어 있지만, 아직 싸움을 이어가거나, 투쟁 가운데 유명을 달리한 이들에 대한 처연한 사연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의 모습에는 공통적으로 부조리한 현실에 굴하지 않는 어떤 위엄이 서려있다.
한편, 타인들은 저자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시대 녹두장군’, ‘강호동보다 힘이 센 사람’, ‘신작로를 만드는 사람’, ‘우리들의 영원한 위원장’.

나는 그를 ‘도사’라 칭한다. 장기투쟁 사업장에 대해 연구하던 해, 저자께 수차례 자문을 구한바 있다. 그가 이 문제에 있어 국내 최고의 전문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을 바삐 누비는 그를 만나기 위해, 새 차 마일리지가 급속히 쌓여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항상 길 위에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 길을 찾아 떠나야 했다. 언제나 그 길에는 그 어떤 학자에게도 얻을 수 없었던 뭉클한 깨달음이 있었다. 그는 박사보다 한 수 위, ‘길에서 만난 진정한 道士’다.

<길에서 만난 사람>곳곳에도 탁월한 전문가·전략가인 저자의 식견이 발견된다. 그의 경험은 연대·협조를 고민하는 조직가들에게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당신이 노동자라면 이 책은 따뜻한 위로가 될 것이다. 당신이 사용자라면 이 책은 직원들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는 역지사지의 매개가 될 것이다. 당신이 노사관계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오늘날 노동운동의 한 극단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귀중한 역사서가 될 것이다. 끝으로, 당신이 거창고등학교 관계자라면 이 책은 십계명을 몸소 실천한 전설적 멘토의 경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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