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시장과 최동익 의원, 그들이 ‘소수자 배제’가 가능한 이유

이재명 시장 “짝눈에 정신지체 된다”, 최동익 의원 “동성애 지지 안 한다”
이들에게 ‘장애’란 무엇인가

지난 22일, 이재명 성남시장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짤막한 글 한 편이 논란이 됐다. 현재 성남시가 추진하는 성남 청년배당 상품권을 폄하하는 조중동(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과 종편 기자들에게 일갈하는 글이었다. 조중동과 종편 기자들이 일베 회원이 조작한 것을 사실 확인 없이 그대로 인용해 보도했다는 것이다. 청년배당이란 3년 이상 성남에 계속 거주한 만 24세 청년에게 분기별로 12만 5000원의 지역화폐를 지급하는 것으로 성남시가 현재 무상교복, 산후조리와 함께 추진하는 ‘성남시 3대 무상복지’ 정책 중 하나다.

문제는 표현이었다. 이 시장이 “수준 낮은 일베만 보시면 짝짝이 눈에 정신지체아되는 수가 있어요”라고 쓴 것이다. 후에 일부 사람들이 이는 시각장애인과 발달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이라고 지적하자 이 시장은 해당 문장을 “수준 낮은 일베만 보시면 이상한 사람됩니다”라고 수정했다. 그리고 “비하 의도는 없었으나 같은 장애인이면서도 배려가 부족했습니다. 정중히 사과드립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자신의 트위터에도 “저도 장애인인데‥ 비하 의도는 없었지만 실수한 건 맞습니다. 장애인과 소외된 사람들의 인권과 복지향상에 더 힘쓰겠습니다^^;”라는 멘션을 올리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

이 사건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장애인 비하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고 질타하는 이도 있었으며 혹자는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면 항상 등장하는 반응 중 하나인)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이 정신지체”라고 이 시장을 비꼬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 반응이다. 이 시장 본인이 말했듯 “같은 장애인”이라는 그의 상황이 장애인 비하 발언에 대한 면책 조건이 된 것이다. 실제 일부 사람들은 “그 자신이 장애인인데 장애인을 비하했겠느냐”며 비하할 의도가 없었다는 이 시장의 말을 수용하며 그의 편에 섰다. 이 시장은 10대 시절 공장에서 일하며 프레스 기계에 왼쪽 팔목을 다쳐 장애 6급 판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장애인이라고 모두가 다 ‘같은 장애인’은 아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보다 장애인 내부의 차이가 크다. 장애인 내부엔 장애유형도, 장애정도도 다양하다. 지체장애, 시각장애, 청각장애, 발달장애(이 시장이 말한 ‘정신지체’가 이에 해당한다), 조현병·우울증과 같은 정신장애, 신장장애 등 내부장애에 이르기까지, 장애유형은 다양하다. 그리고 같은 장애유형에서도 장애정도에 따라 다르다. 지체장애의 경우, 이 시장처럼 왼쪽 팔에 경미한 장애가 있는 사람부터 전신마비까지 장애정도에 따라 차이는 크다. 그래서 ‘같은 장애인’으로 묶이기 힘들다. 외부적으로 티도 나지 않고 일상에 큰 어려움 없이 ‘비장애인처럼 사는 장애인’도 있으며, 타인의 도움 없이는 (문자 그대로) 숨도 쉴 수 없는 장애인도 있다. 이들이 과연 ‘같은 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할까? 대부분의 장애인도 ‘장애가 없는’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다른 장애유형에 대해 인식하지 않는 한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장애계 내에서도 종종 자신과 다른 장애유형에 대한 비하 발언이 무의식적으로 발설되고 자신 또한 소수자임에도 다른 이의 소수자성(여성, 이민, 성소수자, 인종, 나이 등)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아니, 때론 혐오하고 배척하기도 한다.

이 시장은 ‘같은 장애인’이라고 표현했으나 그가 실제 발달장애인의 문제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졌는지는 모르겠다. 이는 ‘정신지체’라는 단어 선택에서부터 드러난다. 장애계는 정신지체라는 단어에 대해 ‘정신이 지체됐다’는 표현에서부터 이미 장애인을 비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며 오래전부터 이 단어를 쓰지 않고 있다. 그가 말했던 정신지체는 지적장애, 자폐성 장애를 가리키며 이를 묶어 ‘발달장애’라고 통칭한다. 지난해 11월부턴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도 시행되고 있다. 이 법을 집행해야 할 지자체의 시장이, 그것도 ‘복지 시장’이라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이가 이러한 ‘행정용어’조차 모르는가.

그는 분명 장애인복지법상 등록된 ‘등록장애인’이다. 장애인이라는 점에서 그는 분명 이 사회 ‘소수자’이긴 하나 ‘소수자성’에 대한 인식은 이와는 별개다. 아니, 오히려 소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로 때로 더욱 강하게 주류 사회에 편입되길 욕망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최동익 의원(더불어민주당)은 더욱 노골적이다. 최 의원은 지난 19대 총선에서 당시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의 장애인 비례대표로 선출됐으며 현재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으로 있다. 그는 시각장애인으로 과거 시각장애인연합회 회장직을 역임했다.

최 의원은 지난 1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개인적으로 신앙을 가진 한 사람으로써 동성애는 지지하지 않음을 이 자리에서 명확하게 말씀드립니다”고 밝혔다. 4월 총선을 염두에 둔 ‘선 긋기’였다. 과거 자신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안’과 ‘군형법 일부개정안’에 대해선 ‘동성애 옹호’와 관련이 없다고 분명히 ‘해명’했다. ‘장애인 대표’로, 이 사회 소수자를 대표하며 선출된 이가 또 다른 소수자에 대해선 바로 그 소수성을 이유로 차별을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말은 사실상 “차별에 찬성한다”는 공언이었다.

  최동익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

그의 선언으로 우리는 알 수 있게 됐다. 그가 과연 누구를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으며, 누구의 욕망을 대리하고 있는지. 적어도 최 의원 자신은 이에 대해 똑똑히 알고 있었다. 동성애 이슈에 대해 찬성하기보다 노골적 반대를 표할 때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실시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동성애 반대를 표하는 목소리를 이처럼 당당히 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글엔 어떠한 주저함도, 조심스러움도 없다. 명쾌하고 명료하다.

이들에게 자신의 장애란 무엇인가. 단지 장애인 비하 발언을 한 것에 대해 면책을 구하고,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한 장치일 뿐인가. 분명 장애인은 이 사회 소수자다. 그러나 모든 장애인이 자신을 억압하는 사회 주류적 통념에 대해 비판하는 날 선 감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증장애인의 경우, 때로 학령기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해 통제된 정보만을 습득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이러할 때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차적 정보는 ‘보수적 가치관을 담지한 사회 주류적 통념’이다. (참고 : 발달장애인은 아프고 위험하다? 그 통제의 시선 너머, 이진희) 그러나 이미 사회 ‘주류 계층’에 있는 이조차 자기 안의 소수자성을 사유하지 못하고 확장하지 못한 채 그러한 가치관을 갖게 된 경우도 있다. 그러한 이들에게 ‘소수자성’은 ‘정체성’이 아닌 자신의 희소성을 드러내는 수단에 가깝다.

소수자성에 대해 정희진은 자신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은 없다.”라고 말했다. 어느 누구도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이뤄져 있지 않다. 나는 ‘어린 여성’이라는 점에서 ‘중년 남성’에 비해 소수자의 위치에 점하나 ‘비장애인 이성애자’라는 점에서 ‘장애인과 성소수자’보다 안정적 위치에 있다. 그 외에도 한국에선 학벌, 외모, 거주지역, 직장 등 수많은 것들이 한 사람의 위치를 쥐고 흔든다. 그렇게 우리는 늘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한다.” 이 경험들을 어떻게 소화해낼 것인가. 나의 경험을 주류적 시선에 동일시시키지 않고, 내가 경험한 배제와 상처로 주류 사회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이재명 시장과 최동익 의원은 장애인이라는 점에서 소수자다. 그러나 그들은 중년 남성이자 이성애자이며 학벌(이 시장은 중앙대 법학과를 최 의원은 미국 미시간대학교 대학원을 나왔다)에서도, 이미 사회 계층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들은 어떠한 필터로 이 세계를 바라보고 있을까. 적어도 최근 그들 행위를 통해 보건대, 그들은 ‘소수자 대표’라는 이름으로 사회 지배계층에 서서 또 다른 소수자를 차별하는 행태를 하고 있다.

이재명 성남시장, 최동익 의원. 이 중 누구도 공식적인,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이 이에 대해 비판했지만 그 정도는 이들에게 치명적이지 않다. 앞으로도 사과는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이 호명했던 이들은 자신과 닮은 고통을 경험한 소수자가 아니라 ‘완벽한 타자’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말

강혜민 기자는 비마이너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비마이너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은 필자가 직접 쓴 글에 한해 동시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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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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