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받는 언론이 되겠습니다

[참세상이 만드는 주간 워커스 1호] 창간 인사


편파 보도를 일삼겠습니다. 《워커스》 창간호의 첫 일성이 ‘편파 보도’라니 의아해하는 독자들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재벌이 하는 일이면 무엇 하나 틀리지 않은 게 없고, 대통령의 농담까지 기삿거리가 되는 우리 사회에서 공정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재벌이 살아야 나라가 살고 나라가 살아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저급한 성장 이데올로기로 치장된 기사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파업을 불법이라 매도하고 파업 때문에 회사가 망할 것처럼 떠드는 관료와 자본가들의 목소리만 넘쳐 나고 있습니다. 45도 기울어진 길을 오를 때는 뒤꿈치를 들어 줘야 걸을 수 있습니다.

‘성역은 없다’는 말로 대중을 현혹하지 않겠습니다. 언론지상에 과연 성역이 없을까요? 돈으로 매수하고 광고로 위협하면 있던 기사도 사라지는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몸통도 아니고 그저 용의 발톱을 본 것만으로도 무슨 대단한 일이 벌어진 양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몸통은 지키고 실세들은 뒤로 빼내며 깃털로 변죽 울렸던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워커스》는 보다 솔직하겠습니다. 《워커스》에는 성역이 있습니다. 노동력을 팔아 먹고사는 사람들, 혹여 주변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지 못하는 사람들, 해 봐야 알바고 잘돼야 비정규직 일자리밖에 없는 이 사회에서 오늘도 노심초사하는 청년들이 《워커스》가 지켜야 할 ‘성역’입니다.

색안경 하나 더 끼고 문제를 보겠습니다. 세상을 제대로 보려면 필터 하나쯤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프니까 청춘”이라 조언하고 ‘사토리(달관) 세대’라고 부르며 청년들에게 힘들어도 인내하라 말하는 것이 제대로 세상을 본 것일까요? 누군가 파란색과 초록색 필터를 끼고 세상을 보고 있다면 《워커스》는 빨간색 필터 하나 더 끼우겠습니다. 빛의 삼원색이 섞여야 밝은 현실, 제대로 된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흙수저 같은 수저 계급론이 나오는 것은 왜곡된 현실 인식에 대한 자연 발생적인 저항입니다. 재벌의 자식은 재벌이 되고, 노동자의 자식은 노동자가 됩니다. 노동자 부모의 연금이나 임금을 삭감하면 당장 그 자식들은 더 심각한 생활고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임금피크제를 확대해 청년 고용을 늘리겠다는 식으로 청년 문제를 윗세대의 문제로 몰고 간다면 《워커스》는 색안경을 끼고 현실을 다시 보겠습니다.

《워커스》를 창간했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지만 대중의 비판과 사회적 논란을 자양분 삼아 끊임없이 발전하고 자본과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사랑보다는 비난받는 주간지 《워커스》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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