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흔한 사장 정치

워커스 9호 이슈



한국 재벌사의 레전드로 기록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그에게도 ‘넘사벽’은 있었다. 엄청난 재산을 쌓은 뒤, 굳이 정치를 해 보겠다며 대선에 출마한 그. 하지만 돈 많은 자본가에게 정치의 벽은 높았다. ‘돈 많은 사람이 정치까지 하면 그게 왕정이지!’ 20여 년 전만 해도 정서가 그랬다.

하지만 그건 옛날 얘기일 뿐. 세상은 변했다. 정주영 회장이 대선에서 패배한 지 15년이 흐른 2007년. 현대건설 사장 출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무려 48.7%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정계에 진출한 기업인의 경제 공약은 경제 위기에서 신기루만큼 유혹적이었다. 이제 기업인도 마음껏 정치의 영역을 넘나들 수 있게 됐다. 정치의 꿈을 품고 국회로 몰려가는 기업인들. 과연 그들의 꿈은 1600만 명에 달하는 한국 노동자들의 꿈과 맞닿아 있을까.

국회로 간 사장님은 뭘 하고 있을까?

국회로 간 기업인 출신 의원은 얼마나 될까. 19대 국회의원 298명 중 민간 기업 및 공기업 경영인 출신을 조사해 봤다. 대상에는 사립 학교 이사장 및 민간 경제 단체 출신 인사들도 포함시켰다. 이력 조사는 중앙선관위 자료와 의원 홈페이지, 구글 검색 등을 활용해 다각도로 진행했다.
19대 국회에는 총 44명(약 15%)의 경영인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정당별로 보면 새누리당 소속 의원이 34명,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의원이 10명이었다. 반면 노동계(민주노총)에서 내세운 전략 후보 중 국회에 입성한 인물은 7명, 고작 2%다.
경영인 출신 국회의원들은 종종 논란을 일으켰다. 2014년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이 이사장으로 있는 아프리카 예술박물관에서 이주노동자 불법 착취 논란이 일었다. 측근을 내세워 고액 국제 학교를 불법으로 운영하고, 불법 건축물에서 2년간 임대료를 받아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대한제당 부회장까지 지낸 박상은 전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해 12월, 불법 자금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자신들의 도덕적 해이를 은폐하기 위해 관련 법안을 발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강은희 새누리당 의원은 IT 업체 사장직을 남편에게 물려주며 월급 몰아주기를 해 논란이 됐다. 해당 업체는 2007년부터 8년간 56억에 달하는 국고 보조금을 받아 왔다. 윤명희 새누리당 의원도 회사에 자신의 이름을 건 상품을 판매해 〈국회법〉 위반 논란에 시달렸다. 두 의원은 19대 국회에서 〈인사청문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고위 공직자 인사청문회 시 도덕성 검증 관련 내용은 비공개로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이다. 강은희 전 의원은 올해 1월,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경해학원 이사장 출신의 문희상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그는 정부가 도시 철도 사업에 투자한 민간 자본의 최소 운영 수입을 보장하는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민간 자본의 수익이 추정 수입보다 적으면 정부가 그 비용을 메워야 한다는 내용이다. 전하진 새누리당 의원은 전력 판매 시장을 개방해 민간 기업도 전력 판매로 수익 사업이 가능토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정갑윤 새누리당 의원은 집회 시위 시 복면 또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만으로 처벌을 가능토록 하는 〈집시법〉 개정안을 내놨다. 심지어 현대중공업 출신 안효대 새누리당 의원은 세월호 특조위 해체를 골자로 한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야당 소속의 경영인 출신 의원들도 ‘쉬운 구조조정법’ 앞에서 작아졌다. 올해 초 여야의 ‘원샷법(기업활력제고를위한특별법안)’ 표결 처리 현장. 총 10명의 야당 소속 경영인 출신 의원 중, 풀무원 창업주인 원혜영 의원을 비롯해 문희상 의원, 안철수 의원이 이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1명은 기권했고, 나머지 6명은 본 회의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에게 노동자란… 사회에서는 99%, 국회에서는 1%

20대 국회에 입성한 경영인 출신 국회의원 비율도 분석해 봤다. 총 300명의 당선자 중 기업인은 46명(15%). 19대와 비슷한 수치다. 하지만 야당 소속 경영인 출신 의원이 눈에 띄게 늘었다. 46명 중 새누리당은 22명, 더불어민주당은 17명, 국민의당은 5명, 무소속은 2명이다.
19대 국회에서 ‘새정치민주연합’으로 묶였던 더민주-국민의당이 무려 22명의 경영인 출신 의원을 배출한 셈이다. 19대 국회 10명과 비교해 두배 이상 증가했다. 여야는 경영인 출신 의원 수에 있어 사이좋게 동률을 기록했다.
반면 노동계 전략 후보 당선자 수는 반 토막이 났다. 이번 20대 총선에서 당선된 민주노총 지지 후보는 3명. 전체 국회의원 중 1%에 불과하다.
국회란 다양한 계급과 세대, 성별의 국민을 대표해야 하는 곳. 하지만 현실의 국회는 불평등의 온상이 된 지 오래다. 지난해 10월, 기업 분석 전문 업체인 ‘한국CXO연구소’가 발표한 〈국내 100대 기업 2011년 대비 2015년 직원당 임원 비율 비교 현황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100대 기업에 다니는 직원 중 임원이 될 수 있는 확률은 고작 0.9%에 불과했다. 107명당 1명 정도가 임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99.1%가 노동자, 0.1%가 경영자다. 하지만 국회는 99%가 전문 정치인, 경영인, 법조인 등으로 채워진다.

자본은 노동 환경 전반을 좌지우지할 힘을 갖게 됐다. 아무리 선거로 여당을 심판했다 하더라도 변하는 건 없다. 노동자들은 또다시 노동법 개악과 구조조정에 맞선 수세적인 싸움을 벌여야 한다. 16년 만의 여소야대지만, 그 누구도 ‘노동자의 승리’라고 이야기하지는 못한다.
장애인, 성 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은 국회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다. 장애인 국회의원이 존재할지언정, 장애인을 대표하는 의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애인 단체에서 후보자를 내기도 녹록지가 않다. 박철균 전국장애인철폐연대 활동가는 “정당 구성 요건이 까다로워 국회 입성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요건을 갖춘다 하더라도 후보가 되려면 기탁금 1500만 원을 내야 하는데 감당할 돈이 없다”고 설명했다.
소수자가 배제된 정치는 소수자를 향한 혐오를 확산하는 역할도 한다. 이번 총선에서는 동성애 혐오 등을 조장하는 ‘기독자유당’이 예상치 못한 약진을 보이기도 했다. 나라 무지개행동 활동가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확산하고 있다”며 “하지만 기성 정당 어디서도 제대로 된 대응이나 문제 제기가 없다. 오히려 압력에 굴복하거나 침묵했다. 차별 문제는 이전 선거보다 더 후퇴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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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솔, 윤지연 기자/사진 정운 기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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