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과 울분의 풀무원 화물 노동자, 249일 파업 종료

간부 3명 복귀 불가…내용 모른 채 ‘성실 이행 확약서’ 사인

“개 목줄을 감고 들어가야 하나”

5월 9일 밤 10시 30분. 수서역 풀무원 노조 농성장에서 살벌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양아치 놈들.” “시벌 놈들.” “시너 통 매고 들어가라니까!”

파업 249일 차, 화물연대 충북지부 음성진천지회 풀무원분회와 운송사 간의 중간 교섭이 끝났다. 윤종수 분회장은 중간 교섭에서 나온 합의서 가안을 읽기 시작했다. 풀무원 화물 노동자들은 ‘성실 이행 확약서’ 조항에 대한 설명을 듣고 ‘멘붕’에 빠졌다. 지난해 9월 파업을 시작한 후 진전이 없던 교섭이었다. 4월이 돼서야 노조는 운송사와 10여 차례 만나며 협의를 진전시킬 수 있었다. 총선이 끝난 후엔 문구를 미세하게 조정하고 있었다.

합의서 사인만 남아 있던 5월 9일, 풀무원의 물류 배송 자회사이자 화물 노동자의 원청사인 엑소후레쉬가 나섰다. 노사가 함께 만들기로 한 ‘성실 이행 확약서’를 노조와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만들겠다며 입장을 바꿨다. 엑소후레쉬는 파업을 시작하고 나서도 화물 노동자와 직접적인 계약 관계가 없다며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런 엑소후레쉬가 ‘성실 이행 확약서’ 내용은 공개할 수 없으니 무조건 사인할 것을 요구했다. 합의서엔 확약서의 취지만 짧게 언급돼 있다. 복귀자들이 다시 집단적 운송 거부에 나설 경우 면책된 손해 배상금을 재청구한다는 내용이다. 조합원들은 그 확약서에 온갖 독소 조항이 들어가 노비 문서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개 목줄을 감고 들어가야 하느냐”는 자조적인 말까지 나왔다.

합의서는 제쳐 두고 이 확약서를 두고 격론이 오갔다. 몇몇 조합원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반대하는 조합원들은 이런 안을 제시한 사측에 격한 반응을 쏟아 냈다. 다른 조합원들은 아쉽지만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사측 안을 거부해 교섭 자체가 어그러질 경우 현실적인 대안이 있느냐는 것이다.

더 큰 투쟁 동력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누구도 결의가 쉽지 않아 보였다. 파업 8개월 동안 빚과 피로가 크게 쌓인 상태였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 여의도 철탑 위에 노동자 2명이 68일 동안 올라갔다 내려왔다. 전 조합원이 단식을 감행했고, 풀무원 본사가 있는 수서역 앞에서 노숙 농성도 했다. 그동안 41명이었던 조합원이 31명으로 줄었다.

엑소후레쉬 측에 확약서의 구체적 내용을 문의했다. 엑소후레쉬는 본사인 풀무원에 입장을 물어보라고 했다. 본사 지시 없이 대외적인 업무가 불가능한 듯 보였다. 풀무원 홍보팀은 “확약서에 대해 공유된 바는 없지만, 알아본 바로는 구체적인 내용은 나온 것 같지 않다”고 밝혔다.

노조 요구는 하나도 반영되지 않은 합의안

지난해 9월 4일, 풀무원 화물 노동자들은 파업을 시작했다. 41명, 많지 않은 숫자였지만 그동안 쌓였던 울분으로 똘똘 뭉쳤다. 그들이 경험한 풀무원은 항상 직원이 모자랐다. 화물 노동자들은 운전 외의 다른 일까지 맡아야 했다.
배송 외의 물건 체크 같은 일까지 하다 보니 시간이 부족했다. 장시간 노동은 졸음운전으로 이어졌다. 물건을 더 빨리 나르기 위해 무리하다 보면 살이 찢겼다. 뼈도 부러졌다. 일을 못 할 정도로 사고가 나면 화물 노동자들은 제 돈을 내고 용차(개인 운반 차량)를 불렀다. 이렇게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사측에 항의해 따져 물을 자리를 만들면 변명하고 피하기 일쑤였다. 노조는 처음으로 완전 파업을 결심하며 다섯 가지 요구안을 내밀었다. ▵차량 도색 유지 서약서 폐기 ▵노사 합의서 성실 이행 ▵노조 탄압 중단 ▵화물연대 인정 ▵산재 사고 보상 등이다.

하지만 이번 합의안에 노조의 요구는 한 가지도 반영되지 않았다. 그나마 파업 시작 후 1인당 6000만 원 넘게 물어내라던 손해 배상액이 1000만 원으로 줄어들었다. 윤종수 분회장 등 노조 지도부 3명은 복귀도 거부됐다. 운송사가 이행해야 할 처우 개선과 공정 배차 등 상호 의무 조항은 ‘노력한다’는 식의 효력 없는 문구로 나왔다. 교섭에 참여했던 최기호 화물연대 충북지부장은 “풀무원의 악질적인 노무 관리가 그대로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그는 “사지로 몰리는 화물 노동자들이 전국적으로 많다며 개인 사업자로 등록되는 노조법을 수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망스러운 교섭 결과였지만 조합원 다수는 합의안을 받아들였다. 당시 수서역 농성장에 있던 조합원 27명 중 찬성 20명, 반대 2명, 기권 2명이 나왔다. 매달 200만 원에서 많게는 400만 원까지 내야 하는 대형차 할부금, 생계를 위해 져야 했던 빚들이 발목을 잡았다. 파업 전까지 하루 16시간 일했다는 김 모 조합원은 집에 가스 공급이 중단될 정도로 궁핍해졌다. “8개월 동안 전혀 수입이 없었어요. 파업 동안 낸 빚이 2천만 원 좀 넘어요. 손해 배상까지 때리니 돌아가면 이것까지 물어야 하고….” 하지만 그는 분회장이 합의안과 확약서를 가져왔을 때 크게 화를 냈다. “찢어 버리고 왔어야지.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라니. 뭘 알아야 사인을 할 거 아냐. 그걸 찬반 안건으로 부쳐?”

윤 분회장은 “운 없는 사람들의 비애”라고 했다. 그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일반 노조랑 달라요. 차 할부금도 있고, 우리가 이긴다고 해서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죠. 우린 개인 사업자니까 다른 노동자처럼 밀린 임금을 받을 수도 없어요.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손해죠.” 실제로 투쟁 과정 내내 어려움에 봉착했다. 개인 사업자라 제대로 된 사무실도 없어 조합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불매 운동 등을 주도했다. 길거리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돈도 나갔다.

풀무원 노동자들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5월 10일 새벽, 교섭은 마무리됐다. 조합원들은 수서역 농성장을 철거하고 그 길로 음성으로 돌아갔다. 풀무원 화물 노동자들의 투쟁은 일단락됐지만, 풀무원 한편에선 또 다른 투쟁이 준비되고 있다. 풀무원은 춘천 공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취업 규칙 변경을 시도했다. 사측은 해고 예고 수당(통상 임금 30일분)을 지급하면 해고할 수 있게 한 조항, 연장 근무와 휴일 근무를 회사 편의에 따라 명할 수 있게 한 조항 등 노조라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노동 조건 악화 규정을 대거 삽입했다. 풀무원 춘천 노조는 “정당한 사유 없이 해고할 수 없게 만든 <근로기준법> 23조를 위반한 조항이다. 악법 중의 악법인 쉬운 해고를 자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풀무원 제품을 만드는 공장 노동자, 물건을 전국으로 배송하는 화물 노동자는 풀무원이라면 치를 떤다. 소비자가 사 먹는 풀무원의 ‘바른 먹거리’는 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만들어지고 있다.(워커스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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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솔 기자/ 정운 사진기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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