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개 언어로 만드는 신문이 있어요

한국-이주노동자 연대 투쟁 16년


6월 8일 밤 8시 건국대 병원 장례식장 앞. 지난 5월 28일 구의역에서 안전문을 고치다 열차에 치어 숨진 하청 노동자를 추모하기 위해 시민대책위원회가 주최한 문화제 ‘9-4번 승강장’ 이 열렸다. 많은 한국 청년들 사이에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과 이주노동자들도 열아홉 청년의 억울한 죽음을 함께 추모했다. 청년의 처지와 이주노동자의 처지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주노조)은 지난해 5월 대법원 판결과 8월 노조 설립 필증 발급으로 노조 설립 10년 만에 합법 노조가 됐다. 그전까지 정부가 이주노조를 인정하지 않아 ‘불법 단체’였다.

세계 이주민의 날 선물

지난해 12월 18일, 세계 이주민의 날을 맞아 금속노조는 80여 명의 이주노동자 조합원이 일하는 공장을 찾아 따뜻한 버프(목수건)를 선물로 건넸다. 선물 포장지에는 이주노동자의 나라 말로 “세계 이주민의 날을 축하합니다. 우리는 동지입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1년에 두 차례(노동절과 이주민의 날) 12개국 언어로 인쇄한 소식지도 나눠준다. 금속노조는 경주와 경남 등 자동차 부품사에서 노조를 만들 때 이주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여 함께하고 있다.

대구에서 이주노동자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고, 연대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성서공단노조는 매주 수요일 ‘이주노동자 무료 진료소’를 운영한다. 성서공단 ‘마찌꼬바(소규모 공장)’ 에서 일하는 몽골,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등 아픈 이주노동자들을 진료하고 약을 지어 준다. 병원에 가기 어려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많이 찾는다. 벌써 10년째다. 성서공단노조에 가입한 이주 조합원은 60여 명이지만, 여름 수련회를 가면 100명이 훨씬 넘고, 상담, 진료실, 한글 교실에 참여하는 노동자는 수백 명이다.

통역-번역 공익 협동조합 ‘링크’ 출범

부산에서 이주민 연대 운동을 벌이는 ‘이주민과 함께’는 지난 3월 10일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이주민들과 연대하기 위해 공익적 통-번역 협동조합 ‘링크이주민통번역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전국에서 최초로 이주민이 주도해 만든 통역 번역, 상담, 다문화 사업의 전문성을 갖춘 이주민 조합원들이 공동으로 출자해 운영한다. 조합은 필리핀어, 네팔어, 몽골어, 미얀마어, 우즈베크어, 캄보디아어 등 12개 언어를 전문적으로 통역 번역하고 있다. 금속노조에서 이주노동자 사업을 담당하는 이상우 국장도 ‘링크’를 통해 노동조합 가입 원서, 임금 및 단체 협약 요구안 등을 각 나라 언어로 번역해 이주 조합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대법 판결 미뤄진 8년 동안 위원장 4명 강제 추방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문제는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4년 산업 재해를 당한 이주노동자들이 경실련에서 농성을 벌였고, 1995년 네팔 산업 연수생들이 명동성당에서 쇠사슬 농성을 전개해 산업 연수생 문제를 사회에 알렸다. 1994년 시작된 산업 연수생 제도는 이주노동자를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폭행, 임금 체불, 산업 재해 미보상, 송출 비리, 여권 압류 등 수많은 인권 침해가 폭로됐다. 정부는 이를 인정하고 2003년 8월 고용허가제를 입법화해 2004년 8월 시행했다. 3년을 일하고, 사업주가 원하면 1년 10개월을 더해 한국에서 총 4년 10개월을 일할 수 있는 제도다. 그 후 회사가 원하면 3개월 동안 출국했다 다시 돌아와 같은 방식으로 4년 10개월을 일할 수 있다.

그런데 정부는 고용허가제가 통과된 직후인 2003년 11월부터 전국적으로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잡아가 추방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인간 사냥’이었다. 정영섭 이주노동자운동후원회 사무국장은 “절망한 많은 이들이 목숨을 내던졌다. 지하철에 뛰어들거나 컨테이너 기숙사에서 목을 매거나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 위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적었다. 전국에서 이주노동자와 연대 단체가 농성을 벌였고, 특히 서울 명동성당에서 평등노조 이주지부를 비롯해 이주노동자와 단체들이 단속 추방 중단과 합법화를 요구하며 싸웠다. 2005년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MTU)을 결성하고, 노동권을 보장하는 노동허가제 도입을 촉구했다.

정부는 이주노조가 낸 노동조합 설립 신고서를 거부했다. 2006년 2월 7일 서울행정법원은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의 주장을 받아들여 설립 신고서 반려가 정당하다고 했지만, 2007년 2월 1일 서울고등법원은 1심 판결을 취소하고, 노조 설립 신고서 반려 처분이 법적 근거가 없어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자그마치 8년 동안 이 사건을 심리하지 않았다. 그 사이 아노아르 후세인(방글라데시) 초대 위원장을 비롯해 미셀 카투이라(필리핀) 4대 위원장까지 이주노조 주요 간부들이 표적 단속으로 강제 추방을 당했다.

지난해 국제노동기구(ILO) 이사회는 8년째 계류된 이주노조 설립 신고 상고심을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이주노동자들이 체류 자격에 상관없이 결사의 자유에 대한 권리와 단체 교섭권을 전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한국 대법원과 정부에 촉구했다. 결국 대법원이 지난해 5월, 8년 만에 이주노조 합법화 판결을 내리게 된 것이다.

문제 많은 고용허가제 갈 길 멀어

하지만 갈 길은 멀다.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금지하고 있는 고용허가제로 인해 계약 기간 동안 고용주 허락 없이 회사를 옮기면 비자를 잃게 된다. 관리자들에게 얻어터지고 부당한 처우를 당해도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 농축산업, 어업, 건설업 등 동종 산업 간 이동도 불가능하다. 2014년 겨울, 대구에서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를 만났다. 그는 어업 비자로 들어와 울릉도에서 오징어잡이 배를 탔다. 그런데 선원들은 그가 말을 잘하지 못한다며 매일 두들겨 팼다. 도망갈 수도 없이 맞아 가며 오징어잡이를 했던 그는 육지에 내린 후 도망 나왔다.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된 것이다. 다행히 성서공단노조의 도움을 받아 맞지 않고 일하고 있다. 같은 해 한국인 선원들이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 선원을 때려 숨지게 한 사건도 있었다.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 실태 조사 결과 94%가 폭언을, 43%가 폭행을 경험했다.

이주노조와 단체들은 5년 이상 충분히 일할 수 있고, 회사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으며, 가족과 결합해 정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면 조치를 실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국 노동자들이 이주노동자와 연대해 싸운 세월이 16년 흘렀다(2000년 ‘이주노동자노동권완전쟁취와이주-취업의자유실현을위한투쟁본부’ 결성). 수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함께 싸웠고, 그 결과 이주노동자의 권리는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그런데 거꾸로 이주노동자 때문에 한국인의 일자리가 줄고 있다며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추방하라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거세졌다.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는 길이 곧 나의 권리를 지키는 길이라는 계급적 각성이 더욱 중요한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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