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이탈 청소년의 ‘나 홀로 전투’

알아서 살아남으라

  사진/주용성

무너진 공교육과 사교육 열풍, 너를 눌러야만 내가 살 수 있는 경쟁 체제, 성적으로 미래를 결정하는 곳이 대한민국 교실이다. 나고 자란 이들도 익숙해지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지는 현장이기도 하다. 지난 10년간 OECD 회원국의 아동·청소년 자살률이 15.6% 감소하는 동안 47%가 증가한 것이 우리의 교육 현실이다. 이 교실에서 ‘나 홀로 분투’를 이어 가야만 하는 또 다른 청소년이 있다. 체제의 변화에 적응할 시간 없이 스스로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들, 북한 이탈 청소년을 만났다.

“모르면 웃음거리 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탈북 청소년 교육지원센터는 탈북 청소년을 ‘북한에서 출생해 현재 한국에 사는 만 6세 이상 24세 이하의 북한 이탈 주민’으로 규정한다. 교육 지원 대상이 되는 청소년 연령은 초중고등학교 연령과 <청소년기본법>이 규정하는 만 24세까지다.

북한 이탈 주민의 입국이 늘면서 청소년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 통일부는 전체 북한 이탈 주민 중 학령기 청소년의 비율을 20%가량으로 파악하고 있다.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에 따르면 남한에 정착한 북한 이탈 청소년(초중고 재학생 기준)은 2014년 기준으로 약 2,200명에 달한다. 2007년 총 690여 명이었던 이들은 2009년 1,000명, 2013년 2,000명을 넘어서는 등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북한 이탈 청소년들은 입국 후 적응 교육을 거친다. 적응 교육이란 국정원 조사 후 하나원에서 받는 3개월간의 교육을 말한다. 청소년의 경우 ‘하나원 하나둘학교’에서 교육을 받는다. 국어, 영어, 수학 등 기초 과목 수업과 정보화 교육 등이다. 나이와 학습 수준이 다양한 이들을 대상으로 한 3개월간의 수업은 맞춤형으로 진행되기 어렵다.

2009년 한국에 도착한 A(20) 씨는 북한에서 중학교 1학년까지 마쳤다. 현재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A 씨는 하나원의 수업이 이후 학업을 이어 가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당시 ‘하나원 하나둘학교’에서 초등학교 6학년 과정의 수업을 받았다. 하나원은 국어와 수학, 영어 등 기초 학력 수업을 진행하지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진 않는다. 실제 그가 배운 것은 컴퓨터 작동법 정도다.

3개월 후 하나원을 나와 한국 사회에 발을 디딘 북한 이탈 청소년들은 홀로 적응을 시작한다. 북한의 중학교에서 알파벳도 다 배우지 못하고 온 A 씨는 영어 수업 시간에 원어민 교사의 질문을 받았다.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그에게 옆자리에 앉은 남학생은 그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면 된다고 조언했다. A 씨는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반 아이들은 웃었다. 찡그린 선생님의 표정과 웃음바다가 된 교실에서 그는 홀로 당황했다. 그는 난생처음 수치심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때 처음 수치심이라는 걸 느꼈다. 그 전까지는 창피하다는 게 뭔지 잘 몰랐다. 북한에서 학교는 함께 공부도 하고 어울려 놀고 일하는 곳이었다. 북한에선 모른다고 조롱당하지 않는다. 남한에선 모르면 무시당하고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그날 이후 영어에 매달렸다.”

사회와 역사 수업 역시 이들에게는 혼란의 연속이다. 북한에서 역사 수업은 김일성, 김정일의 연대기로 이루어진다.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배우고 장군님의 업적을 기린다. ‘북침으로 발발된 한국 전쟁’을 학습하고 이를 머리에 새긴다. 탈북 이후 중학교 1학년으로 남한 학교에 입학한 B(21) 씨는 역사 수업이 가장 어려웠다고 말했다.

“남한이 쳐들어왔다고 배운 한국 전쟁이 이곳에서는 북한의 도발로 시작됐다고 했다. 당시 북한에서 배운 게 각인돼 노력해도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어떤 말이 맞는 걸까 혼자 헷갈렸지만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물어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북한의 교육은 한국과 맥을 달리한다. 학제도 다르다. A 씨가 북에 있던 당시 북한의 소학교는 4년, 중학교는 6년으로 통합돼 있었다(2013년부터 2년 과정이던 유치원의 높은 반 1년이 소학교에 포함돼 소학교가 4년제에서 5년제로 바뀌었다). 국어, 수학 등 기초 학문은 초등학교 때 배우지만 영어는 중학교 1학년 때 시작한다. 이들이 겪은 북한 학교는 남한의 학교와 주제가 달랐다. ‘공부’는 큰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김일성, 김정일 세대까지의 역사가 가장 중요했고 나머지는 못한다고 혼나거나 잘한다고 뽐낼 일이 없었다.

B 씨는 남과 북의 교육의 차이점을 묻자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고 씁쓸해 했다. B 씨는 북한에서 공부에 흥미가 있었다. 장래 꿈도 학교 교사였다. B 씨는 북한에서 공부가 재밌었던 이유가 노력하는 만큼 잘할 수 있어서라는 걸 남한에 와서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서도 등수는 있다. 다만 북한에서는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었다. 노력에 따라서 등수가 결정된다. 공부를 잘하고 싶으면 학교 수업만 열심히 하면 됐다. 그런데 남한에선 학교 수업 시간에 열심히 한다고 다른 학생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과목마다 과외를 하고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대하지 않는 남한 사회

다른 체제와 환경에서 학교를 경험하고 있는 이들이 놓인 또 다른 어려움은 차별과 편견이다. 신체적 정서적으로 큰 변화를 겪는 사춘기에다가 새로운 환경에 홀로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마저 더해진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교실에서 학업과 또래 관계 문제 등으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지만 해소하는 방법을 배우지는 못한다. 허수경 무지개청소년센터 남북통합지원팀장은 “남한 학생들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북한 이탈 청소년은 피해 의식이 있을 수 있다. 편견과 차별에 대한 어려움을 느끼지만 이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해 방치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A(20) 씨는 당시 나이에 비해 한 학년을 낮춰 중학교 1학년으로 입학했다. 수업을 좇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학년을 낮춘 것이다. 또래 친구들보다 한 살이 많은 셈이었지만, 친구들에게 이를 밝히지 않았다. 차별을 받을까 봐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에게는 중국 연변에서 왔다고 했다. 하지만 한 학기가 끝날 무렵 한 친구가 교무실에서 A 씨의 생활기록부를 봤다. 1997년생 아이들 가운데 1996년생인 A 씨의 나이를 보고 “너 왜 한 살이 많아?”라고 물었다. A 씨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얼굴이 붉어졌다.

“나이가 알려질까 봐 걱정만 하고 있었지 누군가 알게 되면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한국에 온 지 1년도 안 됐을 때였다. 너무 당황해서 사실대로 말했다. 결국 내가 북한에서 왔다는 소문이 전교에 퍼졌다.”

다른 반 아이들이 ‘북한에서 온 애가 너냐’고 A 씨의 얼굴을 보러 왔다. 당당하고 싶었지만 자꾸 고개가 숙여졌다. “북한에서는 정말 사람들이 굶어 죽어?”, “진짜 잘못하면 막 총으로 쏘고 그래?”, “너는 김정일이 좋아, 싫어?” 북한에 대한 편견과 무지함으로 던진 질문이 가슴에 꽂혔다. 전교생에게 탈북 사실이 알려진 후 A 씨는 북한 관련 뉴스만 나오면 움츠러든다고 말했다.

“미사일 시험 발사 등 북한 뉴스가 나오면 반 분위기가 뒤숭숭한 것처럼 느껴졌다. 2011년에 김정일이 죽고 나서는 당장 전쟁이 나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전쟁을 걱정하면서 자기들끼리 말을 하는데, 자꾸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실제로 그런 건 아니었을 수도 있는데, 혼자 눈치를 봤다.”

‘탈북자니까 도와줘라’라는 식의 일방적이고 시혜적인 관심에 마음을 다치기도 한다. C(22) 씨는 2012년 한국 땅을 밟았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으로 학교에 들어갔다. 담임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소개할 것인지 물었고, C 씨는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선생님은 그의 의견을 존중했다. 따로 문제집을 챙겨 주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고 하기도 했다.

문제는 2학년 때였다. 2학년 담임 선생님은 학기 첫날 “C는 북한에서 와서 너희가 잘 보살펴 주고 돌봐 줘야 한다”고 말했다. 반장을 따로 불러 “C에게 잘해 줘라. 어떻게 학교생활을 하는지 잘 보고 돌봐 줘라”라고 말했다. C 씨에게는 “내가 반장에게 널 잘 도와주라고 했는데, 너한테 뭘 도와줬니?”라고 확인했다. 친구들과 동등하고 평범하게 지내고 싶었지만 이미 도움을 받고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수혜자가 된 후였다.

“그때 정말 상처를 많이 받았다. 어떻게 나의 개인적인 상황을 반 아이들에게 알리고 나를 도와주라고 하나.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중간중간 수업 시간에 ‘너희 얘 잘 도와주고 있냐’고 확인도 했는데, 끔찍한 순간이었다.”

C 씨는 2학년 내내 강제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보살핌과 도움을 강요받은 채 아이들과 평등한 우정을 쌓기란 어려웠다. C 씨는 반에서 말 없는 아이가 됐다.

학업 스트레스 그리고 편견과 차별로 받은 상처는 학업 포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북한 이탈 청소년의 학업 중단율은 남한 학생보다 최고 10배가 높다. 2014년 교육부의 학업 중단 현황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한 초등학생의 학업 중단율은 0.1%, 중학생은 0.32%, 고등학생은 1.1%였으나 북한 이탈 청소년의 학업 중단율은 초등학생 0.6%, 중학생 3.1%, 고등학생 7.5%로 나타났다.

학업 중단은 단지 교육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학교에서 배제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다. 스펙의 사회, 대학 졸업자도 취업의 문턱을 넘어서기 어려운 현실에서 학업을 중단한 북한 이탈 청소년에게 돌아오는 일자리의 한계는 분명하다. 불안정한 일자리는 삶의 전반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안정된 생활은 손끝에서 멀어진다. 화합과 평화, 통일을 향한 시금석이라는 거대한 대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소외나 차별이 아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교육의 테두리에서 제공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북한 이탈 청소년의 자리는 얼마나 있을까.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신나리 기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