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도록 따라가고 싶었다

워커스 15호 이슈 탈북 청소년

  사진/홍진훤 127번 송전탑 농성장, 밀양


반질반질한 종이 교과서에 놀랐다. 그리고 그곳에 아무렇지 않게 필기를 하는 아이들에게 놀랐다. 교과서에 직접 글씨를 적어도 되나 싶어 고민했다. 북한 이탈 청소년인 A(20) 씨는 처음 교과서를 받아 들고 놀랐다고 말했다. 다음 학년에 물려줘야 하는 북한의 교과서에는 무언가를 적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유치원, 소학교와 중학교가 모두 무상 교육이다. 교과서부터 필기도구, 교복, 급식 등 교육 전반을 국가에서 지원한다. ‘나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인 셈이다. 반면 남한의 교육은 형식적으로 의무 교육이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은 ‘각자의 것’이다. 무상 급식 논란이 보여 준 것처럼 학생들의 급식도 선별인지 보편인지를 두고 의견이 갈린다. 필기구는 물론이고 교복과 문제집, 수학여행 등 대부분의 교육 활동에 개인의 돈이 든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초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북한 이탈 청소년이 받을 수 있는 공식적인 지원은 입학금과 수업료 정도다. 이마저도 교육 보호 대상자 증명서를 제출해야 가능하다.

<북한이탈주민의보호및정착지원에관한법률> 제24조에 교육 지원을 명시했다. 교육 보호 대상자를 증명하면 초중고등학교에 재학하는 북한 이탈 청소년은 입학금, 수업료를 지원받을 수 있다. 공식적으로 이들이 받을 수 있는 보편적인 지원은 여기까지다. 학업을 위한 지원이나 탈북 과정에서 겪은 심리적 안정을 위한 정서적인 지원은 없다. 지자체나 남북하나재단 등 북한 이탈 주민을 지원하는 각 단체의 정책 중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찾아 신청해야 한다. 교과서 필기도 낯설어하는 이들이 찾아 나서야만 받을 수 있는 혜택이다.

수업도 못 따라가는데 진로 캠프?
학교에 다니는 북한 이탈 청소년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수업 시간이다. 대한민국 교실은 전쟁터다. 옆이나 뒤를 돌아볼 겨를을 주지 않는다. 남한의 교육 현장은 앞서 나가야 살아남는 곳이다. 북한 이탈 청소년들의 적응을 방해하는 것 역시 학교 수업이다. 모르면 묻고 부족하면 채우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 북한이탈주민재단이 2011년 북한 이탈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이들이 학교생활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문제는 ‘학교 수업 따라가기’였다. 약 50% 이상의 학생이 수업 시간의 어려움을, 17.9%가 문화와 언어 적응을, 10%가 친구 관계를 꼽았다. 심리적 위축에 앞서 눈앞에 닥친 ‘공부’라는 현실적 문제에 적응을 어려워한 것이다. 남한에서 중학교 3년과 고등학교 3년을 다닌 B(21) 씨 역시 가장 어려운 점을 ‘공부’로 꼽았다.

“도대체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국어나 수학은 북한에서 배운 과목이었지만 남한에서 배우는 방식이 아니었다. 북한에서 국어는 시 낭송이 중요했다. 감정을 실어서 시를 읊는 걸 수업 시간에 많이 했다. 수학도 큰 차이가 있었다. 소학교에서 배운 수학은 덧셈, 뺄셈, 나눗셈 등 기초적인 부분이었다. 중학교에서 배운 수학은 한 문제를 갖고 응용하는 방식이었다. 한 문제에 깊이 있게 들어간다. 기계적으로 공식을 외우고 빨리 많은 양의 문제를 푸는 남한의 방식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B 씨는 남한에서 겪은 중학교 3년을 ‘암흑’이었다고 표현했다. 다른 무엇이 아닌 수업 시간, 공부를 따라가지 못해 생긴 어려움이었다. 열심히 하지만 잘되지 않는 과목에는 영어도 포함된다. 북한에서 배운 알파벳과 주어, 동사, 목적어 등 기초적인 문법으로 이곳의 영어 수업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정채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연구원은 <북한 이탈 고등학생 영어 학습 실태 조사 및 지원 방안 탐색>이라는 연구 보고서를 통해 북한 이탈 청소년이 겪는 영어 학습의 어려움을 밝히기도 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이탈 청소년의 86%가 ‘영어 수업 시간에 열심히 듣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수업 내용의 이해’를 묻는 질문에는 절반에 못 미치는 학생만이 긍정적으로 답했다. ‘영어 수업의 어려운 점’을 묻는 항목에서는 대부분(82%)의 학생이 ‘영어의 기초가 부족해서 어렵다’고 말했다. 정 연구원은 보고서에서 “많은 북한 이탈 청소년이 남한 말을 익히고 새로 배우는 동안 영어 학습에 지장을 받는다. 이들은 영어 학원에 다니고 싶지만, 형편이 되지 않아 다니지 못한다고 대답을 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많은 학생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지만 지원책은 미비하다. 있다고 해도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정책이 아닌 경우가 상당수다. 현재 교육부의 정책은 진로 교육과 한국어 교육, 멘토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교육부는 ‘2016년 탈북 학생 교육 지원 사업 계획’을 발표하며 탈북 학생 일대일 맞춤형 멘토링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동시에 탈북 학생의 실질적인 사회 정착을 지원하기 위해 탈북 학생 학부모 대상 자녀 진로 교육을 하고, 진로·직업 캠프 운영을 확대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교육부 역시 전국 초·중·고에 재학 중인 탈북 학생의 증가와 이들의 학업 중단율을 낮추는 방안을 고심했다고 전했다. 문제는 이들이 가장 어려움을 겪는 교과목 학습에 대한 지원이 없다는 것이다. 진로와 취업을 위한 캠프에 예산을 투자하지만, 이는 학업을 무사히 마친 이후의 과정이다. 매일의 수업을 따라가지 못한 상황에서 진로와 취업에 대한 방향을 잡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학습 지원을 표방하지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정책도 있다. ‘북한 이탈 주민 자립 정착과 통일 기반 조성에 기여’를 사명으로 삼는 남북하나재단은 청소년 교육 지원을 진행하고 있다. 재단은 만 3세부터 초등학생까지의 탈북 아동, 북한 이탈 주민 자녀를 대상으로 학습 지원을 한다고 밝혔다(홈페이지에 안내된 대상은 초등학생까지였지만 재단 관계자는 고등학생까지 지원한고 말했다). 신청자들이 희망 하는 1개 과목에 한해 학습지 지원을 하는 것이다. 대상자는 주 1회 가정으로 방문하는 강사의 개별 학습 관리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은 약 15분이다.

모르는 것을 묻고 배우는 개별 학습 관리를 하기에는 15분이 짧은 것 아니냐는 질문에 재단 관계자는 “학습지를 주고 과제를 알려 준 다음 무엇이 맞고 틀렸는지를 확인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매년 약 1,300명이 수혜를 보는 정책이다. 청소년이 학습지를 받아 풀면서 실제로 학습 능력이 향상되고 있다고 본다. 만족도를 매년 평가하는데, 학습 능력이 향상됐다는 평가가 많다. 효과성이 높은 정책”이라고 말했다. 어떤 만족도와 효과성인지는 내부 자료라 확인할 수 없었다.

좀 더 가까이, 보다 쉽게

전문가들은 북한 이탈 청소년에게 ‘눈높이 정책’, 실제로 도움이 되는 맞춤형 정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부분을 파악해 나이부터 학습 수준, 탈북 과정에서 겪은 일의 개별적 차이가 큰 만큼 최대한 이를 고려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허수경 무지개청소년센터 남북통합지원팀장은 “학생들이 당장 필요한 것은 학교 공부에 도움이 되는 학습 지원이다. 대상자를 고려한 실효성 있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정책을 시행하는 방식도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허 팀장은 “정책의 방향이나 실효성도 중요하지만, 정책을 진행할 때도 방식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이를테면 탈북 청소년의 학습을 지원한다고 학교에서 이들을 모아 따로 보충 수업을 하는 방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생들을 모아 놓고 수업을 하는 경우 원치 않게 탈북 사실이 드러날 수도 있는데, 이는 곧 낙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청소년의 부모와 교사 등 주변인들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김성민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장은 “북한 이탈 청소년이 이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적응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인식과 시선이 변해야 한다. 우선 청소년들이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고 이들 가까이에 있는 교사들부터 변화가 필요하다. 교사들도 똑같이 탈북에 대한 편견이 있거나 정보가 부족할 수 있다. 이들의 인식이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삶을 지원하고 꼼꼼하게 챙길 수 있는 정책이야말로 북한 이탈 청소년의 정착에 필수적이다. 좀 더 가까이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원책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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