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체제가 남긴 불평등이라는 유산

워커스 14호 기획연재- 한국 정치의 우상, 두 신화의 마침표

  정운 기자

재벌들이 소유한 720조 원 사내 유보금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특수부 검사 출신 변호사가 결탁된 기업인들의 뇌물 스캔들이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다. 한편 서울의 미친 전세값은 되레 탈서울 러시를 불렀는데, 결국 서울 1000만 인구 시대가 깨졌다. 이런 가운데 2009년 용산 참사와 같은 철거 난민의 이야기는 아직도 여기저기서 반복되고 있다. 이처럼 한쪽에선 정치 권력과 결탁된 누군가가 엄청난 부를 독식하고, 다른 한쪽에선 그들이 남긴 자투리를 어떻게든 챙겨 보려는 삶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2016년 한국 사회의 모습은 과거 압축 성장이 가져온 그늘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것 대부분은 40~50년 전 박정희 체제로부터 시작됐거나 심화됐다. 재벌의 정경 유착과 경제 독식, 강남 불패 신화로 표상되는 부동산 투기, 수도권 인구 집중과 주거난, 영호남의 지역 감정 등. 우리는 대부분 이것들이 비정상적이라고 인식하고 그것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한국 현대사에서 이 박정희 체제의 유산들은 더욱 철옹성처럼 단단해져 왔다. 그의 권력은 37년 전에 끝났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아직도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것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원조 경제의 그늘, 정경 유착과 재벌의 등장

한국에서 재벌의 등장은 1950년대 원조 경제부터 시작된다. 당시 미국의 잉여 농산물이 원조 물자로 한국에 대거 들어왔다. 심지어 필요량보다 더 많이 도입되어 과잉 현상까지 빚어졌다. 대표적으로 밀가루, 목화, 설탕이 있었다. 이 원료 모두 흰색이어서 이를 원료로 하는 제분, 면방직, 제당 공업을 ‘삼백 산업’이라 불렀다. 정부는 원조 물자를 기업에 매우 싸게 팔았는데, 이 덕택에 제일제당, 삼양사, 해태제과, 금성제당 등과 같은 기업이 급성장했다.

이들은 국내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투자 자금은 정부로부터 싼 이자로 융자받았고, 원료는 거의 공짜였다. 반면 그들이 독식했던 이익은 엄청났다. 이처럼 1950년대는 자본금이 없어도 권력과 선이 닿으면 누구라도 하루아침에 재벌이 될 수 있는 비정상적인 시대였다. 보통 자본주의는 시장 경쟁이 격화되어 독점 현상을 낳고 점점 독점 자본주의로 발전한다고 하는데 한국은 전혀 달랐다. 미국의 원조 물자와 이를 통제했던 정치권력 그리고 여기에 선이 닿은 특정 기업인들에 의해 재벌 체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런 비정상은 당연히 정치 자금에서 재벌 특혜로 이어지는 비밀 커넥션을 만들었다. 당시 재벌은 은행을 기업의 사적인 창구로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삼성그룹은 흥업은행(한일은행)과 조흥은행, 삼호그룹은 저축은행(제일은행)의 지배 주주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재벌의 금융 지배는 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1950년대 말 삼성그룹은 16개 계열사를 거느린 국내 최대 재벌로 성장했다.

박정희 군사 정권과 재벌의 공생

1961년 5월 쿠데타 이후, 주요 기업인 17명이 부정 축재 혐의로 체포됐다. 잡혀간 이들은 자신의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기로 각서를 썼다.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은 일본으로 도피했지만, 결국 26일 귀국하여 박정희를 만났다. 여기서 이병철은 기업인을 풀어 주는 대신 그 사람들이 낼 벌금으로 국가를 위한 사업을 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회사의 주식을 정부가 갖게 되면 더 큰 이익이 될 것이라고 박정희를 설득했다. 그리고 1961년 7월 ‘한국경제인협회(1968년 이후 전국경제인연합)’가 조직되어 초대 회장으로 이병철이 오른다.

그런데 이후 군사 정권은 벌금도 없이 주식이나 공장도 그냥 기업인에게 넘겼다. 대신 각종 인허가 비용을 무기로 더 큰 정치 자금을 뜯어 갔다.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는 ‘혁명 정부’가 훨씬 심한 부정을 일삼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사업을 하거나 공장을 새로 건설하려면 그때마다 엄청난 정치 자금을 바쳐야만 했다. 이렇게 재벌과 정치 권력은 다시 철저한 공생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정경 유착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런데 이러던 와중에 전 국민을 분노케 했던 굵직한 사건, 소위 세 가지 가루를 뜻하는 ‘삼분 폭리 사건’이 터지고 만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정권은 수십억 원의 정치 자금을 재벌로부터 얻어 내는데, 그 대가로 설탕, 시멘트, 밀가루 세 품목의 정부 고시 가격을 풀어 줬다. 이후 설탕 값은 5배, 밀가루와 시멘트 값은 2~3배 넘게 뛰었는데, 이로써 이 물품을 매점매석했던 재벌은 막대한 폭리를 취했다.

그런데 다음해 언론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폭로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된다. 당시 삼분 폭리 사건으로 재벌이 취득한 금액은 무려 80억 원(6200만 달러)이나 되었다. 이 중 박정희 정권에 상납한 금액이 약 50억 원(3800만 달러)에 달했다. 이는 당시 정부 예산의 15분의 1에 해당한다. 밀가루 폭리로 재벌은 43억 원을 챙겼는데, 그 핵심 기업이 대한제분(주)이다. 설탕 폭리로 챙긴 이익은 25억 원인데, 이 중 60%인 15억 원을 제일제당이 가져갔다. 시멘트 폭리로 챙긴 이익은 12억 원이며, 동양시멘트가 핵심 기업이다(<경향신문> 1964년 2월 22일, 24일, 27일).

그리고 이듬해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면서 전 국민이 재벌의 민낯을 다시 한 번 똑똑히 보게 된다. 이 사건의 출발은 일본으로부터 빌린 정치 자금에서 시작됐다. 1965년 박정희는 이병철 삼성 회장을 시켜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빌렸다. 그리고 이 돈으로 3200만 달러어치 물자를 들여오는데, 국회에는 4200만 달러에 구입했다고 부풀렸다. 그렇게 해서 정치 자금 1000만 달러를 은밀히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이병철도 100만 달러를 따로 챙겼다. 그런데 이 100만 달러를 현금으로 들여오기 힘들었기 때문에, 대신 식료품 원료인 사카린을 사들여와 국내에 팔았다. 이참에 이병철은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장 기계나 건설용 기계도 몰래 갖고 들어왔다. 사카린 외에도 좌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등 당시 한국의 경제 수준으로 볼 때, 사치품에 해당하는 만여 점의 물품을 일본에서 대량 구입했다. 약 400만 달러에 이르는 물품이었다. 당시 좌변기를 3만 원에 구입해 들여와 암시장에 팔면 다섯 배의 폭리를 취할 수 있었다. 밀수 현장을 지휘했던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의 증언에 따르면, 밀수 총액은 현 시세로 2000억 원에 해당하는 막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엄청난 이 밀수 사건은 1966년 5월 부산세관에 걸리고 마는데, 이후 국회 대정부 질문 과정에서 벌어진 김두한의 인분 투척 사건을 계기로 전 국민적 이슈가 되어 커다란 공분을 사게 된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이병철은 회장직을 사퇴하고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게 됐다.

박정희 정권의 재벌 육성책의 허와 실

이렇게 권력과 유착된 재벌은 온갖 편법과 부정으로 자신의 부를 키웠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도 박정희 정권은 재벌을 더욱 육성하는 데 몰두했다. 박정희에겐 부정부패의 문제보다 성장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70년대 들어서면서 중화학 공업 육성과 맞물려 재벌의 경제 독식은 더 심화됐다. 1972년 8.3 긴급 경제 조치로 재벌의 사채 빚을 동결시켜 줬고, 1973년 중화학 공업화 정책으로 각종 특혜를 제공했다. 그리고 1974년 5.28 특별 조치로 제도 금융 시장을 정비해 투신사로 자금을 유입시켰는데, 이 제도 금융의 혜택은 주로 대기업에 집중되었다. 또한 1975년 종합 무역 상사 제도를 도입했는데, 종합 상사 자격을 부여받기 위해선 재벌 수준이 되어야 가능했다. 이들은 시중 금리(15~19%)보다 훨씬 낮은 금리(7~9%)를 이용할 수 있는 특혜를 부여받았다.

이런 정책적 특혜로 재벌은 실로 엄청난 양적 성장을 하게 된다. 1978년 기준 10대 종합 상사 그룹이 거느린 기업은 럭키 47개, 대우 41개, 삼성 38개, 현대 33개, 쌍용 20개, 국제 24개, 선경 27개, 금호 10개, 삼화 30개 등 모두 304개에 달했다.

1973-1978년 GDP 성장률은 연평균 9.9%였지만, 같은 기간 46대 재벌 회사의 성장률은 무려 연평균 22.8%에 달했다. 더구나 하위 25개 재벌의 연평균 성장률은 12.8%인데 반해, 상위 5대 재벌의 성장률은 연평균 30%를 넘었다. 그 결과 현대, 삼성, 럭키, 대우 등의 상위 5대 재벌들은 6년 만에 규모가 다섯 배나 커졌다. 현재 720조 원의 사내 유보금 대부분을 5대 재벌이 독식하고 있는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

이런 재벌 체제의 구축은 연예 기획사가 아이돌 그룹을 육성하는 방식처럼 될 놈에게 모든 자원을 몰아준 결과다. 덕분에 한국 경제는 박정희 정권의 계획대로 재벌 중심의 양적인 성장을 거뒀으나, 국민은 불균형 성장 전략으로 인한 여러 사회적 갈등을 겪게 됐다. 심각한 빈부 격차 문제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수출 중심의 산업화는 도시의 공장으로 사람을 불러 모았고,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인구는 갈수록 늘었다. 특히 서울로 인구가 계속 집중되면서 심각한 주거난이 발생해 곳곳에 판자촌이 들어섰다. 정부는 이 판자촌을 정기적으로 철거했는데, 이로 인해 도시 빈민의 생존권은 항상 위협받았다. 한편 대규모 산업 공단이 집중되어 있는 영남 지역이 산업화의 과실을 독식했는데, 이로 인해 지금까지 뿌리 깊게 내려오는 영호남 지역 갈등의 씨앗이 만들어졌다. 심지어 박정희는 이 갈등을 통치에 활용하기도 했다.

강남 개발과 정치 자금

이런 사회적 위계 갈등과 불균형 성장의 후과는 부동산 개발 과정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중화학 공업과 중동 특수라는 수출 부문과 달리 내수는 마땅한 게 없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중동 특수로 들어온 막대한 돈은 주거난과 고물가의 배경 속에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갔다. 예금 금리보다 높은 물가 상승률은 부자들로 하여금 재테크 수단으로 부동산을 선택하게 만들었고 그들은 막대한 시세 차익을 취했는데, 이런 부의 축적과 성공은 전 국민으로 하여금 어떤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부동산으로 한몫 잡아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만들었다. 요즘 초등학생의 꿈이 “건물주가 되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이는 이미 40여 년 전 박정희 체제의 유산으로부터 시작된 뿌리 깊은 사회적 트라우마의 발현인 셈이다.

이런 부동산 불패 신화의 시작은 1960년대 말 강남 개발에서부터 시작됐다. 영화 <강남 1970>에 드러나는 모습에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당시 시대적 상황이 서울의 인구 증가로 인해 도시 기능의 확대가 필요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1967년 초 제3한강교(한남대교)도 이런 서울의 도시 기능 확대 방안으로 착공됐다. 그리고 곧이어 강남 개발 구상이 발표됐다. 다리가 놓이면 자연스레 한강 밑으로 권역이 확대되고, 서울 서남부에 완공되는 구로공단처럼 주택과 경공업 단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여기에 ‘경부고속도로’ 사업이 발표되면서 강남 개발을 자극했다. 서울시는 ‘토지 구획 정리’를 내세워 900만 평의 거대한 강남 땅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 방식은 먼저 땅 주인이 자신의 토지 일부를 공공 용지로 정부에 헌납하고, 공공 용지를 받은 정부는 그 땅에 각종 공공 시설을 건설해 땅값을 올리는 방법이다. 그리고 남은 땅을 개발 비용 충당을 위한 판매용 토지로 만들어 나중에 이를 팔아서 개발 비용으로 충당했다.

박정희 정권은 선심성 정책으로 강남 개발에 불을 붙였다. 강남에 땅을 사거나 건물을 사들이면 취득세도 면제해 주겠다는 식의 정책을 쏟아냈다. 심지어 서울의 중심지를 영동지구(강남)로 만들겠다고 말하면서, 시청과 관공서를 강남으로 옮기겠다는 공수표도 남발했다. 반면 강북에는 각종 억제 정책을 동원해 시설 금지 구역을 설정했고 유흥 업소의 신축과 허가를 전면 금지했다. 강북에 있던 명문고를 대거 강남으로 이전시켜 소위 ‘8학군’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런 특혜성 개발 사업의 효과는 대단했다. 1년 사이 평당 200원짜리 땅이 3,000원으로 뛴 것이다. 이 때문에 강남의 농민도 자기 땅의 70%를 공공 용지로 내줄 만큼 태도가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여기엔 1971년 대선을 대비해 정치 자금을 마련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의도도 존재했다. 청와대 경호실과 중앙정보부가 나서 땅 매입을 비밀스럽게 진행했다. 강남 땅 900만 평 중 200만 평을 사들이면 그 차익은 약 100억 원이다. 당시 1971년 대선으로 박정희가 사용했던 선거 자금은 1년 예산의 15%인 700억 원이었다. 정치 자금 마련을 위해 땅 투기뿐만 아니라 개발 이권을 빌미로 기업에 돈을 뜯는 방법도 동원했다. 1969년 김학렬 부총리는 재계 인사를 소집해 정치 자금을 요구했는데, 박정희 정권은 그 대가로 잠실섬 매립으로 생긴 땅을 주기도 했다.

부동산 불패 신화에 가려진 그늘, 한국판 게토

1971년 대선 이후, 강남 땅 장사의 주역은 정권에서 복부인으로 바뀌었다. 아파트 분양권 현장에는 분양권 프리미엄으로 시세 차익 실현하고자 달려드는 ‘있는 사람’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1977년 당시 9급 공무원 월급이 6만 원이었는데, 분양권 프리미엄은 150~200만 원을 호가했다. 게임에 참여할 수 있으려면 분양 딱지를 살 수 있을 만한 재력이 있어야 했다. 부동산 투기는 특권층과 부유층만의 전유물인 셈이었다.

반면 급격한 도시화로 생겨난 도시 빈민의 주거 난은 매우 심각했는데, 흔히 ‘달동네’라 불리는 대규모 집단 판자촌이 서울에 곳곳에 들어섰다. 심지어 이들은 외국인이 보기에 창피하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강제 철거를 당하기도 했다. 농촌에서 이들을 도시로 불러들였던 건 정부였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저임금 희생을 강요당했던 그들은 변변한 주거 환경조차 제공받을 수 없었다.

실제 박정희 정권은 1969년 5월부터 청계천 일대를 비롯한 서울 곳곳의 판자촌을 대거 철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1970년까지 경기도 광주군(현재 성남)에 35만 명의 서울 빈민을 수용하는 대규모 택지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한 가구당 20평씩 평당 2,000원에 분양하고 돈은 입주 후 3년 뒤부터 3년간 분할 상환 조건이었다. 빈민은 서울의 집값과 물가 인상률을 생각하면 괜찮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아무런 공공 시설이 없는 허허벌판에 빈민을 내팽개친 것과 다름없었다. 정부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광주에 모인 15만 명의 빈민은 정부가 나눠준 천막 한 개로 또다시 고된 삶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이들에게 일감이 없다는 것이었다. 약속했던 공장도 지어지지 않았고, 서울로 가는 버스 노선은 1개만 존재했다. 점점 광주 대단지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거대한 난민촌이 되어 갔다. 외부와 강제로 격리된 1970년대 한국판 ‘게토’였다. 굶주림으로 죽은 시체가 매일 발생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강남 개발 소식이 전해지자 광주 일대도 땅값이 뛰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정부는 약속과 달리 분양가를 여덟 배나 올렸다. 당시 공무원 2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돈을 일시불로 내라고 강요했다. 사실상 퇴거 조치인 셈이었다. 결국 1971년 8월 분노한 5만 명의 빈민이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었고, 이후 관공서가 불타는 등 심각한 소요 사태로 번졌다. 이 사건은 당시 학생이 아닌 시위로서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로 기록되었다.

박정희 유산과 대면하기

이처럼 한국 현대사에서 부동산과 주거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매우 민감한 사회 문제였다. 거기엔 일확천금을 노리는 뒤틀린 욕망이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개인의 실패와 욕망만으로 해석할 수 없다. 앞서 지적했듯, 도시 빈민의 주거난과 부동산 투기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정책의 후과였다. 그리고 그 뒤엔 재벌 중심의 불균등 성장과 성과 제일주의에 젖은 박정희의 통치 스타일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이제 그의 경제 신화의 껍질을 벗겨 내고 그가 남긴 유산을 있는 그대로 대면해야 할 시점에 왔다. 그 유산은 아직도 한국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린 채 유지되고 있다. ‘경로 의존성’이라는 사회 심리학 용어가 이에 어울릴 것 같다. 한번 일정한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말이다. 이제 이 경로를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 사회에 뿌리박혀 있는 이 줄기를 하나씩 뜯어낼 때다.(워커스 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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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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