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좀비와 잉여, 그리고 자발적 난민

[워커스 21]자발적 청년 난민의 정치

[출처: 홍진훤]

오늘을 사는 청년은 그야말로 좀비 같은 신세다. 세대 수탈에 시달리다 쓸모가 없어지면 폐기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청년의 삶의 질곡이 여간해선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점도 특징이다. 사회적 약자 마냥 자살과 사고 같은 극단적 삶의 희생과 포기로 사회적으로 그 존재감이 드러나기 전까지 이들은 있는 듯 없는 듯 도시를 배회하는 유령과 같다. 청년은 다종다양한 생활 배경으로 엮여 있어 계급과 계층으로 온전히 부를 수 없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정치경제적 불평등 요인이 이들 청년세대와 포개지는 경향이 커진다. 즉 오늘의 ‘헬조선’ 청년들은 점차 연령 세대에서 사회적으로 계층화된 세대가 되었다.

오프라인 좀비노동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서울역〉을 보자. 좀비 감염자들은 최초 대다수 시민이 외면하는 사회적 약자, 특히 노숙자로부터 번성한다. 이들은 있으면서 없는 존재다. 사회 관심 밖에 머무르면서 전염 속도도 매우 빠르다. 노숙자는 한때 한국 사회의 기층을 형성했던 경제 인구였지만, 금융위기 여파로 기업과 정부에게 버림받아 소모품이 됐다. 서로의 살을 뜯어 먹는 좀비의 전염병은 처음에 그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증상이 밖으로 차고 넘치자마자 사회를 급속도로 위협하고 파국의 상태로 몰아간다.

경제 성공의 신화에서 탈락한 노숙자들의 아들딸이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청년 좀비가 되어간다. 청년 좀비는, 비정규직 하청 노동, 하이테크 흡혈 노동, 그림자 노동, 열정 노동, 인턴 노동, 알바 노동, 밑바닥 노동 등 산업 시대의 대를 잇는 악랄한 노동 수탈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이들이 지키려는 최저 시급은 영업장에서는 최고 시급이 되고, 현장에서 청년의 나이는 청소년과 섞이며 노동 연령대가 내려간다.

오늘의 청년은 그렇게 좀비이자 난민 아닌 난민이 되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비공식 난민이다. 국제적으로 나라를 잃거나 포기한 국제 난민의 법적 지위자만을 난민으로 봐선 곤란하다. 국가와 사회가 돌봄을 망각할 때 청년은 스스로 보트피플에 승선하려 한다. 구의역 지하철 2호선 하청 청년노동자의 죽음, ‘30분’ 신속 배달에 숨지고 다친 알바들, 삶의 희망을 잃은 투신과 자살 등은 우리 사회 내부 비공식 난민의 모습이다.

온라인 잉여노동

얄궂다. 청년의 역할은 좀비나 난민 외에 좀 더 복잡하다. 논의를 기술 영역으로 가져와 보자. 현실의 좀비 노동자는 쉬는 동안에 보통 ‘잉여’ 활동을 한다. ‘잉여’란 한 때 청년 스스로 알바, 실업이나 무직인에 처한 자신을 낮춰 부르는 말이었다. 기업은 이제 잉여의 여분 시간을 취하려 한다. 예를 들어, 10만 명의 공시족(공무원시험 준비생), 취준생, 아햏햏 폐인, 악플러, 꾸준글러, 논객, 일명 ‘병맛’ 웹툰 작가, 게임방 손님, 신상털기꾼, 후로게이(가짜 성별 행세자), 어그로꾼(관심종자) 등은 생긴 것은 달라도 온갖 잉여의 배역을 각자 맡고 있다. 즉 이들의 여가와 미취업 시간 등에 행하는 ‘잉여짓’은 또 다른 형태의 시장가치를 만드는 근거로 돌변한다. 그들 모두의 개별 시간과 활동은 표준화되고 결국에 데이터 알고리즘 기계에 먹힐 운명이 된다.

데이터 기계는 흔히 플랫폼이란 말로도 불린다. 청년의 온라인 놀이와 취향의 표현은 이들 플랫폼 브로커의 이윤을 불리는 콘텐츠가 된 지 오래다. 자발적으로 놀면서 쉬면서 막간을 이용해 벌이는 청년의 온라인 활동은 거의 모두 개성이 말소되어 데이터 공장의 이윤을 위해 불쏘시개가 된다. 청년 좀비의 빠른 확산이 산업 기계의 밑바닥 노동을 떠받치는 동안, 청년 ‘비물질’ 잉여짓은 데이터 기계를 위해 정념과 에너지를 제공한다. 청년들이 쉬며 놀며 날을 새며 하는 거의 모든 자발적 놀이와 희열은 어느새 ‘자유노동(free labor)’이요 ‘놀이노동(playbor)’으로 전환된다. 청년에게 자유노동은 경제적 보상에 대한 요청을 잊게 하고, 놀이노동은 노동을 속박이 아닌 자발적 열정과 재미로 상상하게끔 유도한다.

청년 자신이 좀비처럼 밑바닥 노동을 하면서도 마지막 가상의 은신처로 여겨왔던 온라인 공간은 결국 기업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실세계 청년 좀비의 증가는 온라인 잉여력의 증가와 정비례한다. 현실과 가상은 그렇게 청년의 삶을 갉아먹는 공모를 벌인다. 때론 온라인 ‘덕후’들의 생뚱맞은 잉여짓이 그 지배적 질서 속에서 사뭇 일탈을 모의하고 데이터 노이즈를 만들어냈지만, 여전히 또 다른 삶을 위한 동력이 되기에 힘에 부친다.

모바일 감정노동

청년의 현실계 좀비 노동과 가상 세계의 잉여 노동을 일관되게 묶으려는 시장 지배의 의지는 노동 작업장 안팎을 관리할 수 있는 신종 기술력에 또 한 번 크게 의존한다. 모바일 스마트 기기가 그것이다. 좀비, 난민, 잉여는 부유하는 청년 노동의 현존태다. 이들의 노동을 효과적으로 흡수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노동 시간과 상관없이 늘 이들의 신체에 접속하는 일이 중요하다. 실제로 모바일 환경에서 청년 노동은 휴식과 작업장 바깥에서도 외부자의 통제력에 크게 노출되어 있다.

스마트폰과 같이 몸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모바일 기기들은 주로 비정규직 청년의 일상에 대한 통제 장치 노릇을 자처한다. 예를 들어, 고용주는 모바일 기기를 통해 청년노동자의 일과 시간은 물론이고 그들의 일과 외 동선과 감정을 원격 관리하려는 욕망을 지닌다. 예컨대, 업주, 점주, 매니저 등은 근무시간 외에도 알바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내 수시로 일과 관계된 감정노동을 강요하고 작업장 밖에서도 상황을 관리 감독하려 한다. 바로 전날 근무 성실도, 청소 상태, 과업 수행, 조직 윤리 등 고용주들은 쉴 새 없이 문자, 카톡방, 모바일 앱 등의 경로를 통해 노동성과를 통제하려 한다. 일상에서도 일의 연장이 이뤄지고 문자 스트레스 등 감정상의 노동을 계속해 유발하는 것이다.

청년노동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의 행태들, 예컨대, 근무 중 ‘농땡이’나 친지에게 ‘카톡 문자 보내기’ 등은 관리자에 대한 소심한 저항에 해당한다. 매분 단위로 관리되는 현실에서 반항의 최대치란 영업장 내부 CCTV와 점주의 시선을 잠시 피할 수 있는 곳에서 행하는 소소한 문자 보내기나 뉴스 검색 등의 일탈 정도다.

자발적 청년 난민의 정치

한국사회 청년이 동시대 기술과 맺는 결합 방식은 크게 뒤틀려 있다. 테크노 공간은 이제까지 청년의 재기발랄함이 분출하는 탈주의 영역이기도 했지만, 청년의 온라인 잉여력의 수취나 감정노동의 강화를 위한 ‘유리감옥’으로 탈바꿈 중이다. 기업은 노동과 활동, 놀이와 노동, 물질계와 비물질계 등 경계들을 뒤흔들어 그것을 시장의 가치로 거칠게 통합한다. 동시대 첨단의 모바일 기술은 이들을 매끈하게 잇고, 그나마 자기 재생을 시도하려는 청년들의 숨통까지 턱 막아버린다.

모든 것이 노동으로 환산된 채 좀비와 잉여가 되고 모바일로 관리 통제되는 청년들이 어떻게 스스로 자립과 자율 활동의 시간을 되찾을 수 있을까? 알다시피 청년의 존재는 해당 사회의 성숙도와 연계되어 있어서 그 통제의 시간을 제거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우리가 기술 과잉에 의해 형성된 청년 수탈의 거품만이라도 제거하는 수준에서 몇 가지 실마리를 던져볼 필요는 있겠다. 먼저 청년의 전방위 노동 수취에 대한 사회적 증여와 호혜적 배분의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른바 청년배당과 기본소득 같은 논의가 청년에 대한 사회적 증여의 구체적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보상 없이 자발적으로 잉여 활동을 수행하는 청년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보상책이 마련돼야 한다.

다음으로 데이터 기계의 일부가 되어가는 청년 삶의 무게를 덜기 위해서는 권력 장치의 사슬과 굴레를 벗어던져야 한다. 적어도 온라인 잉여노동을 수탈하는 플랫폼 의존을 벗어나 자율과 협력의 전자 공유지들을 여기저기에 만들어야 할 것이다. 청년 자신의 자율 활동과 협력 속에서 상호 우애와 공통의 가치를 만들어나갈 여백의 시·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청년의 사회적 지위를 누가 규정하는가는 대단히 중요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청년 위로의 슬로건은 ‘열정페이’와 ‘노오력’의 기업 사기술을 은폐해왔다. 하지만, 이제 많은 청년은 ‘노오력의 배신’을 말하기 시작했다. ‘버티기’, ‘노답’, ‘헬조선’, ‘흙수저’ 계급론은 스스로 깨치며 밑에서 올라오는 방언들이다. 이제 청년은 자기 자신을 난민으로서 바라보려 한다. 외부자의 정의가 아닌 청년 자신이 내리는 ‘자발적 난민화’의 경향을 곱씹어 봐야 할 이유다. 그래, 내가 바로 이 사회가 쓰다 버린 난민이다, 좀비다! 자, 이 미친 세상이 내 목에 건 전자 족쇄를 내 방식대로 끊어버리련다. 이렇게 말이다.[워커스 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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