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착한 시민’을 거부한다

[이제는 불복종](1) 시위의 윤리와 미학, 민중이 창조한다

[편집자 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한 100만 시위가 ‘평화시위’라는 프레임에 빠져있다. 보수언론이나 진보언론도 ‘성숙한 시민의식’을 강조하면서 경찰이 그어 놓은 선을 넘지 말라고 한다. 이런 평화시위 주장은 시위의 형태를 맹목적으로 재단해 저항과 시위 자체를 무력화하는 굴레로 작용하고 있다. 시위는 본질적으로 ‘저항’이고 ‘불복종’이다. 현재 평화시위 담론의 문제 그리고 박근혜 정권 퇴진 시위와 저항의 의미를 되새기는 목소리를 연속해서 싣는다.


지난 11월 19일 3차 민중총궐기에서 경찰 차벽에 ‘꽃 스티커’를 붙이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시위대를 향해 총을 겨눈 군인에게 꽃을 꽂아주는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시작했다는 이 퍼포먼스는 불법 차벽에 대한 반대의 표현 시위 정도로 해석되고 지나칠 뻔 했으나 엉뚱하게도 ‘경찰을 걱정해서’ 스티커를 떼어주기까지 하는 행위로까지 전개되는 바람에 지난 주 내내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놓고 설전이 벌어졌다. 이 글은 그 사건에 대해 고민하면서 쓴 글이다.

나는 교육 중에 제일 나쁜 교육이 엘리트 교육과 모범생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정치적으로 아주 나쁘다. 왜냐하면 학교는 이 두 개의 축을 통해서 ‘탁월한 사람의 지배와 평범한 사람의 복종’이라고 하는 소수 지배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반민주주의적 원리를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교과서에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내용이 적혀있어도, 삶을 지배하는 이 두 교육을 통해 학교와 일상에서의 민주주의는 날마다 무너진다.

그런데 학교의 ‘모범생 교육’은 문제라고 하면서, 우리는 왜 ‘민주주의의 살아있는 학교’라 불리는 거리의 집회와 시위에서는 다들 ‘모범생’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누가 우리의 교사인가? ‘모범시위’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 가르치고, 잘했다고 칭찬하고, 모범생에게 상을 주고 일탈자들에게 벌을 주는, 우리에게 ‘모범시민’을 가르치는 이들은 누구인가?

광장이 또 하나의 배움터라면, 지금 우리의 광장은 모범생 교육을 하는 교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만 같다. 오늘 참 잘했어요 라고 칭찬하고, 외국에서 참관 오신 분들도 칭찬하더군요, 그런 말로 으쓱하게 만들고, 청소도 잘 하고, 욕도 안하고, 선도 안 넘고 말도 너무 잘들었다고 칭찬한다. 참으로 매로 다스리는 것보다 훨씬 더 교육적 효과가 뛰어난 '칭찬의 교육'이다. 과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우리는 고래처럼 기분이 좋은가. 지난밤에 칭찬스티커를 잔뜩 받고서.

나는 칭찬이 치욕스럽다

아니다. 나는 칭찬이 치욕스럽다. 조중동 종편에서 하루 종일 ‘성숙한 시민들’을 칭찬하면서 성난 늑대들을 길들이려 하는 것은 자신들이 무섭기 때문이다. 통제할 수 없는 힘이 가장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힘을 통제하려고 그토록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시위대를 두둔하고 칭찬하고 행진을 허용해주면서. 법원이 행진을 허가하고 경찰이 폭력진압을 하지 않고 종편이 시위대를 칭찬하고 있는 이 상황조차 분출하고 있는 힘의 결과다. 그런데 진보언론, 민주세력이라 하는 집단들까지 나서서 성숙한 시민의식을 강조 또 강조하고 있다. 실은 각자 정권교체의 시나리오를 가진 그들도 극본 없이 범람하는 강물이 두려운 것이다.

경찰 차벽에 꽃을 붙이고, 경찰이 힘들까봐 꽃 스티커를 떼어주기까지 하는 이 ‘착한 시민들’이 솔직히 나는 이제 좀 무섭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원한의 정치’가 ‘갈등을 소거하는 치안’ 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식의 퍼포먼스가 저항의 예술적 승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계엄군에게 꽃을 꽂아 주는 시민은 스스로 자기의 몸으로써 총이 되고 방패가 되고 꽃병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자이다. 그러나 이건 그런 비폭력 저항의 ‘패러디’일 뿐이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도 마치 총칼에 굴하지 않고 선을 넘어가는 위대한 비폭력 저항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듯한 착각과 자기의 민주주의 교양에 대한 만족감을 줄 뿐이다.

국가에 의한 불의하고 불법적인 폭력이 여전히 자행되는 가운데, 시민을 내리찍는 방패를 경찰에게 돌려주는 건, 경찰의 스피커가 되어 평화시위 구호를 외치는 건, 시위현장의 이적행위다. 부패한 권력을 지키고 있는 국가폭력의 상징인 경찰 차벽을 꽃으로 꾸며주고, 청소해주다니. 대체 이 도를 넘어선 '착한 시민 강박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동료시민들이 죽었다. 그 명백한 국가살인의 한 가운데 경찰이 있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처벌 받지 않았다. 사과도 반성도 하지 않았다. 그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 없다. 유족들은 아직 함께 거리에 있다. 모욕의 시간을 견디며. “경찰도 힘들잖아요”라는 이 말이 그 분들에게는 어떻게 들릴까. 작년 민중총궐기 때는 경찰이 차벽으로 행진 대오를 막자 유가족들이 버스 위에 올라갔다. 오죽하면, 오죽하면. 그러자 당장 ‘폭력의 오랏줄’이 그들을 포박하지 않았던가. ‘순수성’을 의심받고, 시위대에 부담을 주었다고 비판을 받았다. 경찰은 그 ‘여론’을 등에 업고 맨몸의 농부에게 물대포를 쏘아 죽였다.

그러니 지금 경찰을 존중하는 건, 죽임 당한 이들에 대한 모욕이다. 울지 말고 싸우자, 죽지 말고 살아서 싸우자, 날마다 입술을 깨물며 맹세하고 있는 이들을 모욕하는 것이다. 함께 울고 함께 욕하고 온 힘을 다해 함께 싸워줘야 한다. 그게 연대고 그게 저항이다. 경찰을 위로하다니, 도착도 이런 도착이 없다.

[출처: 홍진훤]

용서는 그들이 사과를 하고 난 후에 하는 것이다. 아량은 그들이 처벌을 받고 난 후에 생각해보는 것이다. 맨 앞에 서 있는 의경들이 무슨 책임이냐고 측은해 하지만, 그것도 정치적으로는 매우 위험한 판단이다. 광주로 진격한 계엄군도 80년대의 백골단도 모두 가난한 아들들이었다. 전두환 노태우가 제 손으로 총이나 한 발 쏘았던가. 87년에도 보수야당과 언론은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목숨을 잃은 이한열 열사의 죽음 앞에서도 그것을 ‘폭력시위가 빚은 비극’이라 했다. 그 때도 ‘과격한’ 시위 형식에 동의하지 않는 시민들은 여전히 있었다. 그래도 경찰 편을 드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 때도 경찰은 ‘어린’ 청년들이었다. 한 친구는 이 쪽에서 또 한 친구는 저 쪽 편에서 서로를 향해 돌을 던지고 최루탄을 쏘고 있었다. 모순의 날, 모순의 밤이었다. 그 모순 속에서 시민들은 더욱 분노해야 했고, 청년들은 더욱 괴로워야 했다. 그렇게 이쪽에서든 저쪽에서든 고통을 느껴야 한다. 그래야 이 모순을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양심의 갈등을 각자가 스스로 해소해버린다. 시위는 하고, 경찰은 위로해주고, 스티커를 붙이고, 스티커를 떼고, 거리를 어지럽히고, 거리를 청소하면서. 정상상태로의 복구는 시위현장 만이 아니라 개인의 심리 속에서도 아주 재빠르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지금 시민들이 경찰에게 주는 꽃과 위로는 대체 어떤 민주주의 교육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일개 의경일 뿐인 걸, 나는 시키는 대로 하고 있을 뿐이야, 시민들도 다 알아주잖아”라는 자기정당화와 위안을 주고 그 모순의 자리에 서있는 이들에게 ‘무책임의 윤리’를 전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2차 대전 이후 독일과 일본의 전범 재판에서 무수히 반복되었던 그 무책임의 윤리.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악행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고 책임을 지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트랩 안에 놓인 생쥐가 아니다. 자신이 놓인 모순적 상황과 부조리 안에서 주체적 인간, 성찰적 인간은 탄생한다.

그러니 경찰은 시위 현장에서 위로의 말이 아니라 분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시민들은 경찰차에 꽃스티커를 붙이며 내면의 불화를 화해시킬 것이 아니라 그 불의의 벽 앞에서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분노와 좌절을 느껴야 한다. 경찰 차벽에 고작 폭력경찰 물러가라 살인경찰 물러가라 쓰는 것도 ‘폭력적’이라 이런 아름다운 ‘모범사례’를 주시는가. 아름다운 것도 맥락을 상실하면 추해지는 법이다. 이 정도면 가히 형식미학의 극단적 모순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모범생’을 거부하자, 시위의 윤리와 미학은 우리가 창조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칭찬스티커를 주고 가르치려 드는 사회의 교사들에게 속지 말자. 언론과 제도야당과 지식인들. 그들도 노동자 민중을 압살한 이 정권의 종범이요, 공범이요, 부역자들이다. 그들이야말로 민중의 정당한 분노를 분쇄하고, 통제하고, 길들이려고 하는 반민주주의의 교사들이다. 민주주의를 배우는 이 실천교육의 현장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모범생’을 거부하는 것이다. 엘리트 지배의 암묵적 지지자들, 반민주주의의 교사들이 제시하는 모범 답안과 모범 시민과, 모범 시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시위의 윤리와 미학은 우리가 창조한다. 오늘 시위가 ‘모범적’이라고 평가할 권리를 대체 누가 그들에게 주었단 말인가.

시민들이 침을 뱉고, 욕을 하고, 긁히고 부서지고 그을리고, 시위대가 스프레이로 쓴 구호를 지우기 위해 검은 스프레이를 마구 뿌려버린 그 경찰버스가 차라리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오물로 뒤덮인 경찰버스는 그 자체로서 국가 폭력에 맞서는 저항을 형상화한 ‘예술 작품’이었다. 억압된 진리와 미학을 드러내주었다. 그래서 아름다웠다. 이 땅에 민주주의가 절반이라도 온 것이라면, 그것은 그 불타고 부서진 버스로부터 왔다.

그래서 나는 80년의 버스가 더 아름다웠고, 87년의 버스가 더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경찰버스에 꽃 스티커를 붙여주고, 심지어 떼어주고, 또 그걸 칭찬하는 풍경 속에서 성숙한 시민의식의 증표가 아니라 반대로 시민의식의 퇴조를 알리는 상징을 본다. 그래서 나는 집회와 시위의 현장을 ‘교양’ 시민과 ‘모범’ 시민과 ‘성숙’한 시민의식의 전당으로 만들려고 하는 시도에 반대한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박제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과 살아남은 이들을 영원히 슬프고 외롭고 아프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우아한 시민교양과 바꿀 수 없는 타자의 절대적 고통이 여기 있음을, 우리는 살아남은 자들로서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원래 살아남은 자들에겐 용서의 권리도 없는 법이다. 이제 그만 해도 되었다고, 충분하다고, 고맙다고, 죽은 이들의 목소리가 우리를 구원해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