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축 반대 5년 투쟁 끝에 들어선 포르투갈 좌파연정

[워커스 27호] 21세기 민중봉기가 끌어내린 대통령들(3)

[편집자 주] ‘21세기 민중봉기가 끌어내린 대통령들’ 기획의 마지막 차례로 포르투갈 사례를 살펴본다. 포르투갈의 정치체제는 이원집정부제로 사실상 의원내각제여서 대통령제인 국내 현실과는 크게 다르다. 또 최근 긴축 반대 시위는 정치체제가 바뀌는 혁명은 아니었으나 포르투갈 역사상 처음으로 급진 좌파 세력이 연정에 참가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이 투쟁과 정치적 변화 과정을 짚어본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우리는 여전히 재정상의 문제가….” 포르투갈 우파연합의 파수스 코엘류 총리가 의회 연단에서 입을 열자마자 2층에서부터 장중한 합창이 울려 퍼졌다. “그란돌라, 아 검게 그을린 도시, 연대의 영토여, 도시여 너의 내부를 지배하는 건, 민중이다.” 이 노래는 1974년 살라자르 독재에 맞선 좌파 군인들의 무혈 쿠데타인 ‘카네이션 혁명’이라 불리는 포르투갈 혁명을 상징하는 노래다. 그해 4월 25일 새벽 0시 20분경, 금지곡이던 이 곡이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왔고 혁명의 신호탄이 됐다. 약 40년이 지난 2013년 2월. 30여 명의 청년이 의회에서 그때의 그 노래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했다. 이 시위는 방송을 타고 전국으로 타전됐고 곧이어 다른 정치인들도 비슷한 시위대를 만나야 했다. 보건부 장관이나 부총리 모두 연설 중 학생들에게 쫓겨나야 했다.

2013년 3월 2일, 150만 명이 사는 수도 리스본에서만 80만 명이 거리로 쏟아진 대중시위를 앞두고 일어난 일들이다. 당시 포르투갈 우파정부가 긴축 노선을 강행하면서 삶과 사회,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상황이었다.

[출처: ESQUERDA.NET]

유럽의 돼지에서 모범생으로

애초 포르투갈은 1990년대에 건실한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그러나 1999년 유로존에 가입한 뒤 경제성장률은 둔화했다. 더구나 포르투갈은 EU집행위원회가 신자유주의적인 재정안정화정책을 고수하면서 2005년을 기점으로 공공예산이 삭감됐다. 2010년부터는 긴축 조치가 더욱 강화되면서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다. 2007년 세계 금융 위기가 시작된 직후에는 경제 성장률이 -4%까지 떨어졌다. 그럼에도 2010년까지 2%대로 빠르게 회복할 만큼 포르투갈 경제는 유럽의 다른 나라 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포르투갈 경제는 부패하고 투기적인 국내외 금융시장의 개입 속에서 본격적인 위기의 수렁으로 끌려 들어갔다. 위기의 진원지는 2개 국내 민간은행인 BPN와 BPP였다. 2008년 이 은행들의 부실 투자, 횡령과 사기 문제가 드러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당시 카바쿠 실바 대통령을 포함해 정치인들의 부패 연루와 은행과 기업 간 유착 등의 문제가 함께 터져 나왔고 금융시장은 요동쳤다. 당시 포르투갈 정부는 금융위기를 최소화한다는 명분으로 이 은행들에 대한 구제금융을 실시하면서 위기가 진정되는 듯했다.

하지만 부실은행을 살리기 위해 들어간 공적자금으로 정부 부채는 크게 늘었고, 한편으로는 경기가 악화해 조세수입이 감소하면서 재정적자도 늘어갔다. 더군다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등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포르투갈의 국가신용등급을 강등하면서 금융시장의 불안을 증폭시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제채권시장은 포르투갈 국채의 리스크 프리미엄을 갑작스럽게 늘렸다. 결국 포르투갈 정부는 자체적으로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할 수 없게 되자, EU집행위원회에 2011년 4월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한다.

이렇게 포르투갈은 10년 전 유로화를 채택한 뒤, 변변한 통화정책도 써보지 못하고 투기적인 국내외 금융자본의 놀음에 휘청거렸다. 미국 노트르담대 사회학자 로버스 피쉬맨이 2011년 4월 <뉴욕타임스>에 ‘포르투갈에 대한 불필요한 구제금융’이란 제목으로 “포르투갈의 구제금융은 국채 중계인과 투기꾼, 신용평가단의 불공정하고 자의적인 압력 아래 이뤄졌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이후 포르투갈은 아일랜드,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남유럽 경제위기 국가들과 함께 ‘피그스(PIIGS)’라는 치욕스런 별명으로 불리며 보다 강도 높은 긴축조치를 강요받았다. 그리고 이 피해는 고스란히 포르투갈 민중에게 돌아갔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포르투갈이 ‘피그스’에서 ‘유로존의 모범생’이 됐다고 추켜세웠지만 정부는 잔인한 삭감 정책을 밀어붙여야 했다. 2011년, 포르투갈은 부채 대금을 갚기 위해 500만 유로 상당의 국가 자산을 매각했는데, 상하수도와 항공사, 그리고 구제금융으로 구해낸 BPN 은행까지 외국자본에 팔아넘겼다. 한편, 사회복지비 축소, 소득세 인상, 연금 삭감 및 수령 연령 상향 조정을 비롯해 노동시장 유연화 조치도 강행했다.

결국 2013년을 기점으로 평균 실업률은 17.6%라는 기록적인 수치를 나타냈고 몇 해만에 15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유럽연합 통계청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당시 포르투갈 인구의 약 24%가 빈곤선 아래에서 살았다. 급기야 1,000만 명의 인구 중 50만 명이 포르투갈을 떠났다.

“정부가 무너질 때까지 거리에서 떠나지 않겠다”

“정부는 부채를 줄인다는 명분으로 국가 자산을 팔아치우고 우리에게서 빵과 물까지 빼앗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인들을 보세요. 그들은 은행을 지원하면서 떵떵 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라도 변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부가 무너질 때까지 거리에 남아 있을 겁니다.”

포르투갈은 대중시위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나라였다. 그러나 2011년 3월, 20만 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를 기점으로 포르투갈 시민들은 약 35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민들은 리스본 중앙에 위치한 호시우 광장을 점거했고, 30개 이상의 사회운동 세력이 정부의 긴축에 맞서 투쟁본부를 만들었다. 스페인 ‘분노한 사람들’의 시워였던 15M 운동과 함께 서로를 고무했고, 남유럽 노동자들과의 총파업도 진행했다. 지속적인 시위가 이어지면서 2012년 9월에는 50만 명 이상이 거리에 나왔다. 서부 해안도시 아베이루에서는 20대 청년이 분신할 만큼 사람들의 절망은 심각했다. 대통령궁 앞에서는 2만 명이 밤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2013년 3월 2일, 역사상 가장 큰 전국 150만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시민들은 ‘긴축이 사람을 죽인다’, ‘트로이카(EU, IMF, 유럽중앙은행)는 꺼져라’, ‘충분해’, ‘물러가’ 등의 문구를 들었다. 집회를 앞두고 리스본 시청이 도로의 돌조각들을 모두 거둬낼 정도로 시위는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경찰과 시위대는 의회 앞에서 충돌했고 도심 대로변에는 혁명적인 문구가 나붙었다. 은행 앞에는 쓰레기 더미가 쌓이기도 했다.

시민과 사회운동의 시위와 함께 대학생과 노동자도 점거와 파업으로 맞섰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큰 노총인 노동자총연맹(CGTP)이 주도한 2010년 11월 총파업은 약 20년 만에 가장 큰 규모로 발전해 전국을 마비시켰다. 2012년 11월 전투적인 항만노동자 파업과 총파업이 일어나면서 긴축반대 운동은 더욱 고조됐다.

역사상 처음으로 들어선 좌파연정…계속되는 거리의 압력

이러한 포르투갈 유권자들의 시위는 정치적 지각변동으로 이어졌다. 당초 포르투갈은 우파연합인 사회민주당(PSD)와 중도좌파인 사회당(PS)이 지난 30년 이상 교대로 집권해 왔다. 그러나 첫 번째 긴축조치가 발표된 2010년 이래 두 차례 치러진 선거에서, 2015년 말 역사상 처음으로 좌파연정이 들어섰다. 중도좌파 사회당과 함께 좌파블록(BE)과 포르투갈공산당(PCP), 녹색당 등 급진 좌파 정치세력이 결속한 것이다. 좌파블록은 1999년 다양한 포르투갈 좌파 세력이 민주적 사회주의와 생태사회주의를 내걸고 연합한 정당이다. 포르투갈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애초 2015년 10월 4일 실시된 포르투갈 총선에서 승리한 것은 우파 선거연합인 사회민주당이었다. 주류 언론은 개표 과정에서 우파가 선두에 서자 국민이 긴축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이는 곧 착각으로 드러났다. 우파의 득표율은 크게 줄었고 대신 좌파에 대한 지지가 늘어났다. 좌파블록은 역사상 가장 많은 10.2%를 기록했고 공산당도 8.2%를 얻었다. 의회 의석의 약 20%가 긴축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정당에 돌아간 것이다. 이런 상황은 포르투갈 정치사에서 새로운 현상이었다. 트로이카가 구제금융에서 ‘졸업’시키면서까지 우파를 밀어주었지만, 그들에게 이미 신물 난 유권자의 마음을 돌릴 순 없었다. 중도좌파 사회당은 실력 있는 야당으로 역할하지 못했다. 이들은 긴축조치를 약화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 이상의 대안은 없었다. 애초 2010년에 긴축조치를 처음 도입한 것도 이 정당이었다. 급진 좌파는 높은 실업률과 불안정한 일자리, 사회복지 해체에 초점을 맞췄다. 또 당시 그리스 좌파의 쓰디쓴 경험을 토대로 유럽연합 탈퇴와 부채탕감 문제를 정조준하며 지지율을 늘렸다. “유로화를 위해 더 이상 어떤 희생도 치를 수 없다”는 것이 선거 모토였다.

결국 포르투갈 여론은 과연 좌파연정이 수립될 것인가에 쏠렸고 곧 좌파블록이 먼저 좌파정부를 지지하겠다고 밝히면서 기선을 잡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연금 인상, 추가적인 사회복지 삭감과 노동시장 유연화 중단이라는 3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포르투갈 우파연합은 소수정부를 수립했지만 총선 한 달 만에 정부 의안이 의회에서 부결되며 무너졌다. 그후 사회당이 주도하는 소수정부를 좌파블록, 공산당이 지지하면서 좌파연정이 수립됐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좌파연정이 들어선 뒤에도, 긴축 철회는 더디기만 하고 부채탕감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정당 간 입장차로 난관에 봉착해 있다. 임금 삭감, 대중교통 민영화 등의 긴축조치가 일부 철회되고 있지만, 한편에선 트로이카가 긴축 공세를 펴며 으르렁 거리고 있다. 하지만 격렬한 시위로 정부를 바꾼 포르투갈 시민과 노동자도 이 상황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좌파연정 수립 2달 만에 포르투갈 공무원들은 다시 파업에 나섰고, 시위도 계속되고 있다. 포르투갈의 노동자 시민의 긴축반대 운동은 좌파연정 아래에서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