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사라진 사람들

[워커스] 4월호 이슈(1)

  [사진] 故 이정원, 노동자역사 한내 제공

Episode. 1
항상 우리 민주 광장에서 지켜볼 것이다


2003년 1월 9일 새벽. 그는 아내와 딸의 배웅을 받으며 여느 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검은색 프린스를 단조공장 쿨링타워 화단 옆에 세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닐곱 개의 담배를 태웠다. 전화를 만지작거리다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배가압류로 6개월간 월급을 받지 못했을 때 도와줬던 사람이었다. 아내에게 건넨 마지막 생활비 45만원도 그가 건넨 돈이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동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 말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어떤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는 트렁크를 열고 휘발유 한 통을 꺼냈다. 차가운 휘발유를 몸에 끼얹었다. 그리고는 불을 붙였다.

우짜면 좋노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가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었던 말은 화염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전화를 받았던 동료도, 그를 기다리던 가족들도 듣지 못한 말이다. 그가 남긴 두 장의 유서만이 생전의 피맺힌 삶을 전하고 있다.

‘출근을 해도 재미가 없다.’ 열사는 유서 첫마디에 이렇게 썼다. 관리자들의 눈치를 보고, 해고를 걱정하는 게 일상이었다. 노조에 균열이 생기자 서로 간의 반목도 심해졌다. 열사는 변해버린 현장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발단은 민영화였다.

전대동 당시 두산중공업지회 부지회장은 민영화 후의 회사를 ‘악마의 소굴’이라 불렀다. “두산이 들어오고 나서 악마의 소굴로 변했지. 그 당시 한국중공업 노조라 하면 소위 말하는 강성 노조였지. 대단했잖아. 95년엔 48일간 죽기 살기로 싸워서 일방 중재 조항(파업권을 침해하는 대표적 독소조항)까지 단협에서 빼버리지 않았나. 두산은 노조라 하면 질색을 하니까 용역을 붙여 노조 깨기에 나선 거지.”

공기업이던 한국중공업은 1997년 외환위기 때 1차 민영화 대상으로 지정됐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두산그룹에 인수됐다. 근로조건은 악화됐고, 노조 활동은 탄압을 받았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김창근 당시 금속노조 위원장(두산중공업 해고자)은 한국중공업 시절 배달호 열사의 ‘호루라기’ 소리를 잊지 못한다. 배달호 열사의 호루라기 소리만 들리면 아침, 점심으로 조합원들이 집회를 하러 모여 들었다. 협업이 많은 보일러 공장의 특성 때문인지, 조합원들의 단결력도 유별났다. 공장 슬로건도 생생히 기억난다. ‘앞서가는 보일러 공장’. 하지만 두산은 그들의 협업과 단결을 무너뜨리고 싶어 했다.

“두산중공업으로 바뀌고 생산과장이 집회 나가는 사람을 잡아. ‘오늘 나가면 회사가 징계
올린다던데…해고도 될 수 있어’ ‘곧 있으면 진급인데 뭣 하러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그런 소릴 하고 다녀. 미적거리는 사람 잡아서 ‘집회 가자’하면 생산과장이 어디서 튀어나와. ‘안 가겠다는 사람 왜 데려가냐’고 팔을 질질 끌어. 실랑이하다 욕도 날아가고, 주먹도 날아가고. 상황이 이러니 출근해도 다들 긴장해서 웃지도 못해. 거기다 1,000명 정리해고 한다는 소문을 내니 목 날아갈까 얼마나 조심하겠냐고.”

김 전 위원장은 열사가 분신하기 몇 주 전 그를 만났다. 배달호 열사가 그에게 먼저 만나자고 했다. 당시 수배자 신분이었던 김 전 위원장은 사람의 눈을 피해 창원으로 왔다. 배달호 열사와 마산역 앞 횟집에 마주 앉았다. “배 형이 한숨을 쉬면서 ‘우째야겠습니까?’ 몇 번을 물어. 현장이 완전히 장악돼서 사람들이 꽥 소리도 못한대. 답답하고 속 터지고 자존심 상하는 거지. 현장 조직을 되살려야 하는데 사람들이 꽥 소리도 못 한다고 하소연을 하더라고.”

노무현 차기 대통령께

열사가 불을 댕긴 2003년 1월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 직후였다. 열사의 아내 황길영 씨는 노 전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을 잃고 비로소 남편이 유서에 남긴 더러운 세상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습니다. 새 대통령께서는 모든 국민이 기대하는 만큼 평범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스스로 불사르는 일이 없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노무현 정부의 첫 노동부 장관은 권기홍 영남대 교수였다. 권 장관은 2003년 3월 10일 창원으로 내려와 열사의 빈소를 방문했다. 그리고 회사와 열사대책위 사이를 중재했다. 이틀 후인 3월 12일 밤샘 협상 끝에 합의에 이르렀고, 14일 열사의 장례를 치렀다.

합의안 타결 다음날에는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권 장관은 열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 손배가압류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민사상 사용자의 법적 권리에 대한 판단은 법원이 하는 것으로, 정부가 입장을 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배달호 열사 사망 후, 사용주가 무분별한 손배가압류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말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해 10월 기준, 44개 사업장 노동조합에는 1,700억 대의 손배가압류가 걸려 있었다. 정부가 직접 철도파업에 손배가압류를 청구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까지. 손배가압류는 ‘노동자 잡는 무기’로 정착됐다.

당시 노동자들은 김대중 정부가 전술적으로 활용했던 손배가압류 탄압을 기억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5월 10일 청와대 비서관회의에서 “불법폭력 노조운동을 용납해서는 안 되지만 구속만이 최선은 아니다” “불구속기소나 민사소송 등 여러 가지 방안에 대해 검토해주기 바란다”라고 지시했다. 김 전 위원장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민주 정권 이름을 달고 구속된 노동자가 이전 정권보다 많으니 손배가압류 같은 민사소송을 때리라는 게 김대중의 방안이었거든. 국제적으로도 논란이 되니까 본인 이미지 생각한 거야.”

배달호 열사가 시작이었다

살아서 더 싸워야 한다는 사람이었다. 열사와 가장 친했던 김건형(당시 대의원) 씨는 마치 자기를 대신해 그가 죽은 것 같아 죄책감에 시달리곤 한다. 김 씨는 2002년, 파업 찬반투표를 독려하기 위해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을 시도했었다. “그때 형이 ‘네가 왜 희생을 해. 살아서 더 싸워야지’하면서 어깨를 부여잡았어. 형 죽고 나서 나도 죽으려고 했지. 34일 단식을 했는데 중간에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어. 그때 분통한 마음이 그대로야.”

그런 배달호 열사를 살려내지 못했다. 민주주의도, 개혁대통령도. 그래서 동료들은 민주당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다. 김창근 전 위원장도 마찬가지다. “나는 전혀 기대 안 했어. 동지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이른바 민주정부에서 손배 가압류를 쥐어짤 만큼 쥐어짜서 노동자들이 목숨을 건 상황이었다고. 김대중이고, 노무현이고 무슨 기대가 있었겠어. 민주당에서 대통령 두 번 냈지만, 민중 편에 선 적이 있었나?”

열사가 떠난 지 24년. 여전히 열사가 바란 세상은 오지 않았다. 강웅표 배달호열사정신계승사업회 회장(당시 두산중공업지회 지회장 직무대행)은 촛불의 앞에 선 열사를 떠올린다. “다시 한 번 촛불 들 각오를 해야 한다고 다짐했어. 열사가 그랬거든. ‘나는 항상 우리 민주광장에서 지켜볼 것’이라고. 열사라면 광장에서 횃불을 들었을 걸? 1,600만 촛불도 환히 밝혀주지 못하는 곳을 찾아가 호루라기를 불고 여기 모여야 한다고 소리쳤을 걸?”

Episode. 2
나의 주검이 있을 곳은 85호 크레인입니다


2003년 10월 17일 아침. 부산 영도조선소 앞바다가 곡소리로 가득 찼다. 비상연락망을 통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조합원들은 85호 크레인을 황망하게 바라봤다. 고공농성 125일 만에 주검이 된 김주익 열사가 남긴 것은 오랜 번민을 눌러 담은 유서 4장. 동료들은 김주익 열사가 조합원들에게 남긴 한 유서를 읽고 또 읽었다. “동지들, 나의 죽음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나의 주검이 있을 곳은 85호기 크레인입니다. 이 투쟁이 승리할 때가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입니다.”

어느 인권변호사의 노래

뜨거웠던 2002년 겨울, 극적이던 16대 대통령 선거. 노무현의 당선 소식에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이제 조금이나마 나아지겠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노무현 대통령은 꽤 인연이 깊었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노무현, 문재인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변호인이기도 했다. 1994년 LNG선상파업으로 구속된 김주익 열사를 변호한 것도 그들이었다.

한 한진중공업 노동자는 94년의 인권변호사 노무현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단상
위로 올라가 조합원들 앞에서 노래를 선창했었지 아마. 그 민중가요가 뭐였더라.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 모순덩어리 억압과 착취 저 붉은 태양에 녹아 버리네’ 이런 노래였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즐겨 불렀다는 그 노래의 끝자락은 이랬다. ‘우리의 승리 죽어간 동지의 뜨거운 눈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두려움 없이 싸워나가리.’

하지만 나아진 내일은 오지 않았다. 여전히 노동자들은 정리해고와 임금동결, 노조탄압, 7억4000만 원의 손배가압류가 존재하는 오늘을 살았다. 2003년 6월 12일, 결국 김주익 한진중공업 지회장이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고공농성 129일 동안, 회사는 노동조합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고, 노무현 정부는 침묵했다.

그리고 그 짧은 기간 동안, 정부는 많은 노동자들을 감옥으로 불러들였다. 노무현 정권 취임 7개월 만에 구속된 노동자들만 110명에 달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노동자들이 구속됐다.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정권 첫 해에 구속된 노동자는 각각 80명과 87명. ‘아는 놈이 더 무섭다’라는 옛 말만 뼈저리게 절감한 시대였다.

“노무현 대통령 각하! 노동자의 가련한 처지를 팔아 따낸 권력의 맛이 꿀맛입디까?” 김주익 열사 사망 후, 부산역 추모 집회 연단에 오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물었다. 부산역을 메운 인파 속에서 또 다시 오열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잊은 개혁대통령

“목이 터져라 사람 죽는다고 소릴 질러도 꼼짝도 안 해. 고공농성 129일 동안 정부는 암 것도 안했어. 창수 형까지 죽고 나니까 그제야 움직인 거지.”

김주익 열사 사망 14일 째인 10월 30일. 한진중공업 곽재규 열사가 깊이 11미터 도크에 몸을 던졌다. 보름 만에 두 명의 열사가 나왔다. 그제야 회사와 정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 다른
한진중공업 노동자는 “두 명이 연달아 죽으니 정부가 회사를 압박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 해, 한진중공업지회는 노동조합의 요구 다수가 반영된 단체협약을 따 냈다. 두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내어 놓은 대가였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노동자들을 향한 강공책. 정부의 노동 정책은 여간해서 바뀌지 않았다. 김주익, 곽재규 열사 사망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동계를 향한 날 선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그 해 11월 5일, 노 전 대통령은 “지금과 같이 민주화 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돼서는 안 되며, 자살로 인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의 발언이 빌미가 돼, 노동자들이 서울 도심으로 모였다. 경찰의 진압에 충돌이 일었다. 노동자들은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들었고, 경찰은 방패와 진압봉을 들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한 번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는 “민주노총은 더 이상 노동운동단체가 아니다”, “폭력시위로는 해결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역사를 보면 미래가 보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정치인을 믿을 이유가 없지요.” 129일 동안 85호 크레인 김주익 지회장에게 꼬박 식사를 날랐다는 한 조합원이 말했다. 10여 년 전의 역사가 그에게는 아직도 생생하다.

현실의 터널이 솔밭산 묘역만큼 길어 보입니다

“노무현 씨가 대통령이 됐을 때 너무 믿었나 봐요.” 91년에 의문사로 사망한 한진중공업 박창수 열사의 부친이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91년, 박창수 열사 사망 당시 ‘사인규명 진상조사단’에서도 활동한 전력이 있다.

진상조사단은 지속적으로 타살의혹을 제기했지만 사건은 26년 간 미궁 속을 맴돌았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 ‘이제는 밝혀지겠지’라고 기대도 해 봤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그냥 나중에, 아주 나중에 세상이 바뀌면 그때서야 밝혀지겠지요.” 유족들이 기다리는 것은 ‘정권’이 아닌 기약 없는 먼 ‘미래’다.

이제 85호 크레인은 없다. 2011년 김진숙 지도위원의 85호 크레인 고공농성 후, 회사는 그 지긋지긋한 흔적을 없애버렸다. 개혁대통령의 노동탄압도 잊은 지 오래다. 이제 남은 것은 정리해고와 손배가압류, 그리고 노조 탄압뿐이다.

김주익, 곽재규 열사는 양산 솔밭산 공원에 묻혔다. 인적 드문 평일 오후, 그들이 잠든 묘역을
찾았다. 노동자들이 남기고 간 편지들이 투명 플라스틱 상자에 포개져 있다. 누군가는 “잘 살고 있는지, 최선을 다해 투쟁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봅니다”라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열사 앞에 부끄럽다”고, 또 다른 누군가는 “현실의 터널이 솔밭산 묘소만큼 길어 보인다”고 말했다.

한진중공업 박창수 열사도, 김주익 열사도, 곽재규 열사도, 최강서 열사도 모두 이곳에 안장 돼 있다. 그리고 그 곁에 계속 새로운 열사들의 무덤이 생겨난다. 최강서 열사 묘역 옆에는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 염호석 열사가 잠들어 있다. 모두 같은 염원을 가진 사람들이다. 열사가 죽어서라도 지키고 싶다던 투쟁의 광장. 우리는 지금 그 투쟁의 광장 어디쯤을 서성이고 있는 걸까.

Episode. 3–4
모금은 하지 말아주세요.
전부 비정규직이니까


2005년 11월 24일, 여의도 광장이 피로 물든 날. 쌀 개방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던 농민들은 경찰의 폭력진압에 넋을 잃었다. 그 날 여의도 광장에 있던 농민 전용철 열사도 경찰 방패로 폭행을 당했다. 뒤통수에 피멍이 들고, 눈이 부어오른 채 겨우 귀향 버스에 올라탔다. 곧 의식을 차리지 못한 채 구토를 시작했다. 9일 후 그가 사망했다. 사인은 두부손상이었다.

아직도 의문이야. 왜 그랬는지

“아직도 의문이야. 1001 기동대가 대규모로 투입되고 사정없이 농민을 때렸어. 토끼몰이로 강경 진압했고. 대다수 농민이 노무현을 기대했는데 말이야. 용철이가 그렇게 희생됐어. 전용철만 그랬나. 노무현 정권 때 열사가 너무 많았어. 좋은 친구였는데.”

전용철 열사와 함께 버섯 농사를 지었던 동갑내기 친구 김영석 씨가 말했다. 보령농민회 주교면 지회장이던 전용철 열사. 김 씨는 지난해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보며 전용철 열사를 생각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폭력의 현장, 그리고 비슷한 죽음들.

“한 달 넘게 용철이 장례를 못 치렀어. 나는 대천역에 커다란 분향소를 차리고 그곳에서 진상규명 투쟁을 했어. 백남기 농민 때도 경찰이 사인을 왜곡하고, 진상규명을 막았지? 용철이 때도 같았어. 십 몇 년이 지났는데 책임자는 처벌 받지도 않았어. 노무현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주요 경찰 간부들이 옷을 벗긴 했지. 근데 당시 경찰청장이었던 허준영은 옷을 벗으면서까지 잘못이 없다고 했어.”

허준영 전 경찰청장은 2009년 한국철도공사 사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검찰은 3년 후 기소를 중지했다. 그는 최근 용산역세권 개발사업 뒷돈을 챙긴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열사가 많다는 게 문제야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 씨는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찍었다. 대다수의 농민들도 그와 같은 기대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내 농업정책 만큼은 과거 정권과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대가 실망으로, 실망이 분노가 돼 거리를 덮쳤다. 농사를 끝낸 농민들은 서울로 상경해 대규모 투쟁을 벌였다. 살고 싶어 투쟁을 했지만, 동료들은 주검으로 돌아왔다. 이제 누군가에게 기대를 갖는다는 건 무서운 일이 돼 버렸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야. 문재인만 그럴까. 이 나라 아류들이 다 완고한 개방론자야. 전용철이 쌀 개방 반대하며 죽은 지 10년도 더 넘었어. 그런데 달라진 게 하나도 없잖아. 오히려 지금은 쌀 우선지급금을 환수하고 있어. 이건 농업 문제에서 부차적인 건데도 주요 쟁점이 됐어. 어느 정부건 농업 인식은 똑같아. 농민은 국민의 일부가 아닌 거지. 물건으로 얘기하면 ‘끼워 파는 부속품’이야.”

강산이 두 번 변하고, 열사가 늘어나도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았다. 김 씨는 박근혜 탄핵 소식에도 크게 기쁘지가 않다. 1,600만 명의 촛불도, 대통령 탄핵도 농민의 삶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직감 때문이다.

“1987년 6월 항쟁 때도 죽 쒀서 개 줬잖아요. 민주주의 완성에 아직 우리 과제가 많아. 농민은 희망 자체도 없어. 자식들에게 ‘농사지어라’ 자랑스럽게 얘기를 못 해요. 국가 정책은 늘 대농 중심이야. 소농이 탈락하고, 나이 든 사람이 못 버티고, 갈수록 부자 중심이지. 노무현 정부도 쌀 개방, FTA로 세계 자본에서 자유롭지 못했잖아. 그래서 민중의 저항이 거셌고, 열사는 많아지고…. 열사가 많다는 게 문제야.”

그리고, 열사 허세욱

한미FTA 협상이 진행 중이던 2007년 4월 1일 오후, 서울 하얏트 호텔 앞. 한 남성이 “노무현 정권 퇴진하라”, “한미 FTA 폐기하라” 구호를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옷은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을렸다. 그 남성은 응급차에 실려 가면서까지 노무현 정권 퇴진을 외쳤다. 그날 분신으로 사망한 남성은 택시노동자, 허세욱 열사다.

허세욱 열사는 죽기 전 동료에게 “장롱에 편지가 있으니 챙겨서 집회 때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편지를 발견한 동료는 불안한 마음에 민주노총에 이를 알렸다. 민주노총은 허세욱 열사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허세욱 열사는 유서를 통해 “망국적 한미FTA 폐지하라. 굴욕 졸속 반민주적 협상을 중지하라”, “모금은 하지 말아 주세요. 전부 비정규직이니까”라는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겼다.

허세욱 열사와 10년 넘게 동고동락 했던 유종대 한독운수분회 부위원장은 허세욱 열사의 죽음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같이 술 한 잔 할 때마다 “나는 택시를 떠났어”라고 말하던 열사의 이야기가 왠지 가슴에 남는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 말이 몸을 불사르겠다는 각오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약자 편에 서는 걸 자부심으로 느끼던 사람이었거든. 세욱이 형은 참 대단했어. 택시 일이 참 힘들거든. 일 끝나고 잠도 못 잤을 텐데 항상 광장에 나갔어.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도 자주 했고. 항상 앞장서는 스타일이었지. 민주노총 선전 전단지도 시민들한테 나눠주려고 자주 거리로 나갔고.”

그가 속한 한독운수 노동조합은 한국노총 사업장이었다. 허세욱 열사는 민주노총으로 조직형태를 변경하는 것에도 발을 벗고 나섰다. 그래서 허세욱에게 ‘민주노총 조합원’이라는 명찰은 자랑이었다.

“노동계도 많이 변하지 않았어요? 국회에서 목소리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약자를 위해 싸우는 것도 중요하잖아. 세욱이 형이 항상 약자를 향하는 민주노총의 슬로건을 좋아했어. 그래서 유서에 다들 비정규직이니까 모금하지 말아 달라 쓴 거야.”

‘저 멀리 가서도 묵묵히 꾸준히, 민주노총과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허세욱 열사가 유서를 통해 남긴 마지막 바람이었다[워커스 29호].
덧붙이는 말

* 3월 31일 <워커스> 이슈 두 번째, “‘변절’과 ‘연대’, 그 사이에서 - 정권교체의 바람은 강하고 우리의 기억은 약하다”가 이어집니다. * <워커스> 구독·구입 문의 : 02-701-7688, workers@newscha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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