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근대로의 시간여행 혹은 시간정지

[워커스 인권의 장소] 군산에서 본 전쟁과 여성

[출처: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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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로의 시간여행’ 1920년대 건축물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군산을 홍보하는 문구다. 시간은 역방향으로 흐르지 않기에 매혹적인 동시에 치명적이다. 그런 시간을 거꾸로 맛보는 여행이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러나 정작 설레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평화행진 탓이었을까. 377만평이나 되는 미군기지에서 내보낸 기름띠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정확히 말하면 거기서 만날 근현대의 방향이 나를 설레게 하지 않았다.

복잡한 마음으로 군산 고속터미널에 도착한 나를 맞이해 준 건 평화바람의 구중서 씨였다. 이번 인권기행의 길잡이이다. 그는 문정현 신부님과 함께, 군산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을 비롯해 강정해군기지 반대투쟁까지 한반도 전쟁기지화에 맞서 싸운 이다. 바쁜 그가 익살맞은 표정으로 우리를 제일 먼저 데려간 곳은 식당이었다. 뭐니뭐니해도 여행을 감미롭게 하는 건 맛집이니까. 하지만 일요일이라 그런지 문을 연 곳이 거의 없어 허탕이었다. 잡채밥과 짬뽕으로 유명한 중국집도, 지역주민들만 안다는 해물칼국수집도 문을 닫았다. 다른 데선 맛보기 어렵다는 장칼국수라도 먹으라며 영화동의 칼국수집으로 손을 잡아끌었다. 이제야 여행객의 마음이 됐다. 칼국수집 벽에는 소녀상이 걸려있었다. 주인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손님에게 알리고자 부러 주문제작한 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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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을 나와 영화동 일대의 건물들을 구경했다. 식민지의 잔재가 건물로 고스란히 남은 동네 중 하나다. 이른바 적산가옥(敵産家屋)인 일본식 주택들이 많다. 적산이란 적의 재산이라는 뜻으로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남긴 기업, 토지 그리고 주택을 비롯한 각종 부동산과 동산류를 말한다. 월명동과 영화동, 신흥동 일대는 적산가옥이 많다. 장미동에는 근대역사박물관이 있고 인근에는 조선은행, 옛 군산세관이 있다. 우리는 거기까지 가지 않고 영화동 일대의 적산가옥을 둘러봤다. 카페로 개조된 곳도 있었고 편의점이 된 곳도 눈에 들어 왔다. 1920년대, 1930년대를 건물로 만나는 건 새로운 경험이다. “일본 기모노를 입고 사진을 찍어주는 집도 있대요. 간판도 관광객을 끌겠다고 일본식 격자무늬로 했어요. 게스트하우스도 일본식 가옥을 복원하고.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하고 아픔을 수탈했던 걸 기억하지는 않는 거지.” 그의 말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건물에 홀리다가 신음했던 사람들마저 잊어버리는구나.

국가가 개입해서 유곽촌을 형성한 거지

우리는 건너편 신사(神社)터가 보이는 수덕산공원으로 갔다. 그는 신사 위치를 짚어주면서 그 밑에 있는 초등학교에 대해 설명했다. 일제 때는 그곳에서 신사 참배를 하러가는 사람들의 복장이 단정한지 검사해야만 신사에 갈 수 있었다고 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에서 달리기를 하던 초등학교로만 알던 그곳이 다르게 보였다. 그 왼편을 돌아 뒤로 가니 해망굴이 있다. 해망굴은 수산물을 좋아하던 일본인들에게 빠르게 수산물을 공급하기 위해 산을 뚫은 굴로,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이 있었다고 한다.

식민지가 빼앗아간 것은 땅과 곡물 만이 아니었다. 그가 소개한 곳은 유곽 이었다. 유곽은 일본인 유흥업소로 국가가 성을 관리하는 공창제의 공식 연원이다. 유곽은 일본인 거류지 중심 으로만 있다가 1906년에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전국화됐다. “공창제라는 게 식민지 때부터 시작된 거잖아요. 성매매 합법화가 이때 시작된 거죠. 1899년도 군산이 개항하고 나서 일본인이 들어와요. 그때 유곽이 생겨요. 공식기록으로는 1902년 부산, 1904년에 서울에 신정유곽 인가 생기는데 군산에는 공식기록 보다도 일찍 유곽이 있었어요. 군산의 대명동, 명산동 같은 지역에 유곽지가 생길 때 금융자본도 힘을 썼죠. 금융업자가 돈을 빌려주거나 유곽 땅을 대는 식이었지. 윤락사업이 돈이 되니까. 당시 군산 이사청이 있었는데 거기서 유곽지역을 선정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국가가 개입해서 유곽촌을 형성한 거지.”

해방 후 미군정청으로 사용됐던 건물을 지날 무렵, 그는 미군정의 위선에 대해 말을 꺼냈다. 미군은 비인도적인 공창제를 폐지하고자 ‘부녀자의 매매 또는 그 매매 계약의 금지에 관한 법령’을 1946년 5월에 공포·시행했다. 법을 위반하는 자는 군정 재판에 의해 처벌된다고 규정했으나 유명무실했다. 유곽에 있던 여성들이 자립할 사회적 경제적 기반도 마련되지 않은 데다 포주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겨우 1947년 11월 ‘공창제도 등 폐지령’이 공포되고 1948년 효력이 생겼다. 하지만 구씨는 미군정의 공창폐지령은 허구라고 했다. “일본게이사들은 집으로 가면되지만 한국 사람들은 갈 데가 없었어. 길거리로 내몰린 셈이지. 그렇다보니 개별적으로 미군 병사들 대상으로 영업을 하기도 했대. 고급요정들은 뮤직홀로 이름을 바꾸고. 뮤직홀은 일종의 나이트클럽인데 그게 쭈욱 즐비할 정도로 많았대.”

그는 당시 유곽촌이었던 명산시장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전쟁 후 유곽은 피난민들이 임시거처로 사용되다가 시장이 형성됐다. 당시 큰 유곽 중 하나인 칠복루터를 경유했다. 1949년부터 군산 화교소학교로 사용됐는데 2002년 불이 나 새 건물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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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굴 위한 성산업인가.
대명동, 개복동 참사로 희생된 여성들


전쟁과 함께 성장한 성산업은 과거의 일이 아니다. 일제가 물러났고 미군정도 사라졌지만 여전히 군산에는 미군기지가 있고, 미군기지가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성매매 집결지가 있다. 이른바 기지촌이다. 그 잔재는 개복동, 대명동 성산업과 연결돼 여성들의 몸과 성을 빨아들였다. 징하디 징한 성적 착취의 사슬은 2000년과 2002년 여성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우리는 개복동과 대명동으로 옮겨갔다. 신창동 주공아파트 단지 언덕을 통과해 가니 유흥업소들이 보였다. 문을 닫은 듯한 건물 1층에는 통유리가 있고 2층 칸에는 녹색으로 선팅된 창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유리창 뒤에 철제로 된 방범철망이라니. 도둑을 막기 위한 것이라면 유리창 앞에 있어야 하는데. 그 옆에 있는 주택의 방범창과도 다르다. 안에 있는 사람을 나가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소름이 돋았다. 아, 저렇게 성매매 여성들이 감금되어서 불이 나도 빠져나 가지도 못한 채 14명이 죽었구나!

바로 옆에는 2002년 개복동 화재참사터가 있다. 지금은 철거된 건물 터에는 바람개비만이 돌고 있었다. 몇 개의 바람 개비에는 ‘반성매매바람이 분다’라고 적힌 리본이 흩날렸다. 매년 9월 참사현장을 방문하는 민들레순례단이 그녀들의 넋을 기리고자 두고 간 것이다. 화재 당시 건물 창문은 합판으로 막혀있었을 뿐 아니라 철제망으로 둘러져 창문을 열수도 뛰어 내릴 수도 없었다. 바로 30m 앞에는 파출소가 있었지만 포주들에게 상납 받은 경찰들은 불법 감금을 눈감아줬다. 그 후 여성단체들의 노력으로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만들어졌다.

여성인권단체들은 그 터에 여성인권 센터를 만들고자 했으나 쉽지 않았다. 국가는 쉽게 성산업을 포기하지도 인권 유린을 기억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결국 감금된 여성들이 원했던 소망, 새나 나비가 되어서라도 벗어나고 싶어 했던 그이들의 마음을 상징한 조각상은 아직 산돌학교에 있다. 감금된 창문에 나비가 하나 얹힌 모습이 외로워보였다. 이어서 2000년 참사가 있던 대명동으로 옮겼다. 바로 길 건너편이다. 대명동 화재 참사가 있던 건물은 새 건물이 들어서 흔적 조차 찾을 수 없다. 미군기지가 있어서인지 이름도 양키시장인 그곳에는 군복을 파는 가게가 유난히 많았다. 앞에는 시장건물들이지만 한 골목 뒤로만 가도 유흥업소들이 즐비하다. 낮이라 불 꺼진 업소에 얼핏 보이는 전신 거울이 영업 중임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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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타운, 국제문화마을로도
가릴 수 없는 미군 위안부


우리는 성산업 활성화에 기여한 미군 기지촌이라 할 수 있는 아메리카 타운(A타운)으로 이동했다.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누군가의 눈물처럼 비가 뚝뚝 내렸다. 그 전에 미군기지에 들렀다. 휴일 이라 삼엄하기보다는 황량했다. 어렵게 사진 한 장 찍고 아메리카타운으로 이동했다. SBS 방송 <그것이 알고 싶다>에도 나왔듯이 군산아메리카타운은 국가의 적극적 협조로 만들어졌다. 미군 기지촌 수입은 1960년대에 GNP의 25%에 달했고, 클럽이 벌어들이는 수입이 한국 전체 외화 수입의 10%에 육박했다. 박정희는 달러를 벌어들인다고 표창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들어가는 입구에 놓인 기둥에는 국제문화마을로 소개됐다. 2008년인가 2009년에 A타운의 이름을 바꾸었단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인가,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느껴서인가. 그런데 또 이름을 바꾼 곳이 있었다. 국제 문화마을 건강증진실. 구씨는 2007년만 해도 성병 검역소라 돼 있었다고 했다.

1969년 아시아 지역 미군 감축 계획이 담긴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이후 미군 감축을 우려한 정부는 강제 성병 관리에 들어갔다. 1971년 청와대는 주한미군 철수 억제를 위해 ‘기지촌 정화위원회’를 만들어 관리했다. 올해 1월 1심이지만 재판부는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미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했고 이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일부 인정했다.

아메리카타운 건설에는 박정희 군사 정권의 측근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구씨는 “516쿠데타에 가담했던 백태하가 군산에다 주식회사 옥구를 만들어. 옥구가 아메리카타운을 조성해. 주식 회사가 만든 민간인 기지촌이지. 원래는 이곳이 농사하던 곳인데 A타운 만드느라고 강제수용된 거야. 집과 농토를 빼앗아서 타운을 조성하고 지금은 관리를 하고 있지.” 국가의 계획으로 성적 폭력과 착취의 대상이 된 존재가 기지촌 여성, 미군위안부의 실체다. 그리고 그 중간에 성산업이 자리한다.

아메리카타운 안으로 들어갔다. 클럽과 상점들을 지나 언덕 끝에 도착하니 폐허가 된 건물들이 보인다. 구씨는 과거에 여성종사자들이 살던 거주지라고 했다. 벌집이나 달방으로 불리던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그 뒤에 담이 있다. 담 위에는 유리가 박혀있다. 어떻게 여성들을 통제했는지는 짐작된다. 지금은 러시아나 동남아 여성들이 있다고 한다. 국적만 바뀌었지 여전히 전쟁과 국가, 성산업은 여성을 성적 도구로 수탈하고 있었다.

어느새 빛 한 자락 없는 저녁이 됐다. 군산에서 쳇바퀴 도는 여성들의 시공간을 경유하느라 정작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영화동에서 개복동, 명산동을 거쳐 산북동까지 그곳에서 마주한 여성들의 삶은 그대로였다. 이름만 유곽에서 뮤직홀로 아메리카타운으로 유흥업소로 바뀌었을 뿐. 이것은 시간여행인가, 시간정지인가.[워커스 38호]

[출처: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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