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직업병 문제 물꼬 트여…“조정위 중재안 무조건 따른다”

반올림 “중재 방식 아쉽지만 직업병 문제 해결 위한 소중한 한 걸음 되길”

  황상기 반올림 교섭단 대표(왼쪽), 김지형 조정위 위원장(가운데), 김선식 삼성전자 전무(오른쪽)가 서명서에 싸인한 뒤 포토라인에 섰다.

“1000일 넘게 대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아주 세부적인 것을 고집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어떻게 보면 배수진을 친 것이다. 삼성과 반올림 모두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정말 지혜로운 안이 나오길 바랄 뿐이다. 한쪽이라도 못 받는다면 비극이 될 것이고, 조정위에도 대단한 실패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공유정옥 반올림 교섭단 간사가 이번 삼성전자-반올림 간 제2차 조정(중재)재개를 위한 중재방식 합의 서명식을 두고 한 말이다.

삼성전자 직업병이 수면 위로 오른 지 11년,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큰 걸음이 다시 시작됐다.

지난 21일 삼성전자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이하 반올림)’가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이하 조정위)’가 내놓은 중재안을 무조건 수용하기로 한 데 이어 삼성전자와 반올림이 제2차 조정(중재)재개를 위한 중재합의서에 최종적으로 서명했다.

조정위의 중재안은 오는 9월 중, 늦어도 10월까지는 나올 것으로 보이며, 이날의 서명은 삼성과 반올림이 이 중재안을 무조건 수용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조정위가 만드는 2차 권고안은 그동안의 조정방식이 아닌 조정위가 거의 모든 전권을 갖는 중재방식으로 이뤄진다. 삼성전자와 반올림 모두 조정위원회가 만드는 조정안에 개입할 여지가 없고, 제시하는 중재안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

서명식은 24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서대문구 법무법인 지평 10층 대회의실에서 이뤄졌다.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를 대신해 김선식 전무가 참석했고, 황상기 반올림 대표, 김지형 조정위원회 위원장이 중재권한을 조정위에 위임한다는 중재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동안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삼성전자와 반올림 간 조정이 공식 재개되는 순간이었다.


모두 발언에서 황 씨는 준비한 편지를 낭독하며 결국 눈물을 보였다. “우리 유미가 백혈병에 걸린 지 꼭 만 13년이 넘었다. 대기업이 자기 회사에서 일하다가 화학약품에 의해서 백혈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을 버리면 안 된다. 병들어 죽은 노동자 문제를 10년이 넘도록 해결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섭섭한 일이다. 그래도 삼성직업병 문제가 해결에 실마리를 찾은 것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환영한다. 우리나라 노동현장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김지형 조정위 위원장은 서명에 앞서 “조정위원회를 믿고 백지신탁에 가까운 중재방식을 조건 없이 받아들여 주신 삼성전자와 반올림 측에 감사드린다”면서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원칙과 상식에 기반하여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중재안을 만들 것”을 약속했다. 이어 “이번 중재안은 단지 삼성 반도체나 반올림 피해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보고, 불확실한 영역의 직업병에 대한 지원이나 보상의 새로운 기준이나 방안을 수립하는데 이정표가 될 수 있도록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중재안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면서 이를 위해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들의 자문을 받아 중재안을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선식 삼성전자 전무는 “중재방식을 수용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완전한 문제 해결만이 발병자 및 그 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라 판단했다”면서 “향후 일정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서명식 직후 반올림은 같은 장소 기자회견을 열고 “농성 1022일, 지난한 시간을 거쳤음에도 당사자들의 직접 대화가 아니라 중재라는 방식으로 마무리하게 된 점은 아쉽다”라면서도 “하지만 이조차 길고 힘든 시간들이 없었다면 결코 내딛지 못했을 소중한 한 걸음”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또 “노숙농성을 함께한 지킴이들, 고통 속에 인내해온 피해 노동자와 가족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연대의 힘으로 1,022일의 농성 끝에 삼성 직업병 문제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고 삼성에 의해 중단된 협상을 열었다”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조정위원회는 곧바로 △새로운 질병 보상 방안 △반올림 피해자 보상안 △삼성전자 측의 사과 △재발 방지 및 사회공헌 방안에 관하여 중재안을 마련에 착수한다. 삼성전자와 반올림을 비롯해 정치권에서도 조속한 해결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최대한 속도를 높여 9월 중, 늦어도 10월 중으로는 완전 타결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중재안이 마련되는 과정, 논의 등은 비공개하기로 했다. 개인별 지원과 보상 내역 역시 공개되지 않는다.


지난 3년, 무엇이 바뀌었나?

조정위원회는 제2차 조정(중재) 제안서 등을 통해 △1차 조정 당시 양측의 요구사항과 쟁점 △1차 조정결렬 이후 양측의 주장과 요구사항 △반도체 관련 3사(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에서 기(旣)실시한 지원보상방안 등을 검토한 결과를 바탕으로 큰 틀에서 중재안의 방향은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았다고 밝혔다.

특히 SK하이닉스나 LG전자가 독립기구를 만들어 직업병 피해 문제를 해결한 사례는 반올림에서도 꼽는 성공 사례다. 공유정옥 간사는 “조정위가 타사에서 직업병 문제를 해결한 사례 등을 거론하며 이 방향대로 일정한 사회적 합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작년에 법원이나 근로복지공단도 보상 승인을 많이 하면서 물꼬도 트였고, 이 방향대로 안이 나온다면 삼성전자의 기존 보상 시스템도 개선이 될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반도체는 2015년 11월 산업보건검증위원회 제안에 따라 ‘산업보건 지원보상위원회’ 설립하고 기업 내부 보상 체계를 만들었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해 7월 산업보건학회 제안 따라 ‘LG디스플레이 산업보건 지원보상위원회’를 설립 후 가동 중이다. 두 반도체 회사가 보상위에 전적으로 권한을 위임한 것은 삼성전자가 조정위의 조정권고안을 거부하고 2015년 9월부터 돌연 자체 보상을 강행한 것과 대비된다.

SK하이닉스 지원보상위원회는 2016년 보상 신청을 받은 뒤 이를 토대로 가장 많은 질병들을 공식 발표했다(갑상선암 46.1%, 자연유산 13.5%, 유방암 8.9%, 기타 위암, 비호지킨림프종, 백혈병 등). 1년 후엔 하이닉스 사업장 내부로 이전해 산업보건 지원보상위원회를 계속 운영 중이다.

LG디스플레이의 경우 디스플레이 업계 최초로 질병에 대한 지원보상 계획을 발표했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해 5월 28일 ‘LG디스플레이 산업보건 지원보상 위원회’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한국산업보건학회에서 선정한 전문가로 구성된 제3자 기구를 운영하며 이들이 독자적으로 지원대상과 지원규모를 결정하도록 하겠다고 하면서 회사는 100억 원의 재원을 들여 향후 10년간 운영하되 추후 필요에 따라 재원을 증액하겠다고 밝혔다. 지원보상제도는 약 230명이 신청해 지금까지 검토 및 보상절차가 이뤄지고 있다. 이 두 사례를 선례로 삼아 삼성에도 이 기준에 따른 일정한 변화가 요구될 것으로 보인다.

산재를 다루는 법원의 판례 역시 괄목할 만한 변화를 이뤘다. 지난해 대법원은 삼성LCD 희귀질환 산업재해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반올림 사건이 대법원에서 승소한 첫 사례였다. 지난해 열린 ‘반올림 10년, 변한 것과 남은 과제’ 토론회에서 임자운 반올림 활동가는 “여전히 산재신청 숫자와 산재인정 숫자 사이의 간극이 크지만 반도체 노동자의 질병을 산재로 인정한 판결들은 시간이 갈수록 대상 사업장과 질병을 확장했을 뿐 아니라, 판정 논리 면에서도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왔다”고 평가했다.

다만 일각에서 나오는 ‘10년 직업병 투쟁 종지부’ 같은 이야기는 아직 섣부른 것으로 보인다. 공유정옥 간사는 “삼성전자 디스플레이부문 직업병 피해자 보상 문제와 그분들에 대한 사과 문제가 풀리는 것이다. 남아 있는 과제는 많다”고 했다. 삼성전자가 산재 여부를 판단하는 데 결정적 근거가 되는 작업장의 작업환경측정 결과 보고서를 법원의 공개 판결에도 불구하고 공개하지 않고 있는 등의 문제 등이 남아 있는 것이다.

2015년 10월 7일부터 서울 강남역 8번 출구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올바른 직업병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천막농성을 시작한 반올림은 오는 25일 해단 문화제를 연 뒤 농성을 마무리한다. 반올림은 “앞으로도 독성화학물질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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