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이상 지각한 법,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국사회 차별의 현주소와 그 대안’…세계인권선언 70주년 토론회 열려

극우 세력의 저항과 정치권의 눈치 보기로, 한국에선 10년 넘게 차별금지법 제정이 미뤄지고 있다. 차별 요소들이 중층으로 겹쳐 한 사람이 겪는 차별이 만들어진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이런 차별의 교차성을 인식하고, 규율할 수 있는 통합적인 법제가 필요해 논의되기 시작했다.


올해는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내년 3월 정부는 차별금지법 제정 등에 대한 유엔 사회권위원회 권고 이행 보고를 앞두고 있다. 이에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4일 오전 국회의원회관 3간담회실에서 토론회를 열고 한국 사회 차별의 현주소와 그 대안을 살펴보는 토론회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차별 당사자들의 다양한 증언이 나왔고, 10년 넘게 차별금지법 제정을 미루고 있는 제도 정치권에 대한 규탄이 이어졌다.

사월 경기지역 이주노동자 공동대책위원회 집행위원은 여성 이주노동자가 겪는 강제추방, 성폭력 문제를 짚었다. 사월 집행위원은 “여성 이주노동자의 경우, 여성과 이주노동자라는 정체성으로 복합적 차별에 놓여있다. 이들의 주거는 문에 잠금장치 하나 없고, 침실도 따로 없을 정도로 취약하다. 화장실 또한 문이 안 잠기거나 남녀 구분 없이 사용한다. 이런 취약한 주거 환경 위에서 사장이 함부로 들어와 ‘오늘은 나랑 자도 되겠냐’ 등의 모욕적인 말을 듣기도 한다”라며 관련 상담이 꾸준히 접수된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여성 이주노동자 A씨(29)는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50대 남성에 의해 살해당해 싸늘한 주검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갔다. 피의자는 성폭행을 시도하다 A씨가 저항하자 살해했다고 경찰에 자수했다. A씨의 지인들에 의하면 당일 피의자는 출입국관리소의 불법체류 이주노동자 단속이 있으니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주겠다’라며 A씨를 차에 태워 어딘가로 데려갔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6년 실시한 ‘제조업 분야 여성 이주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385명 가운데 45명(11.7%)이 성희롱, 성폭행을 겪었다고 대답했다. 응답자들은 피해 경험도 1회에 그치지 않고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성폭력에 취약한 이주 여성노동자들이지만,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월 집행위원은 “이주 여성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은 10인 미만의 영세한 사업장이 많다. 이런 곳들은 강사지원이 되지 않아, 교육자료로 대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이주 여성들에게 물어보면 예방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이들이 다수”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2016년 공감 실태조사에서도 성폭력 대처 방법과 관련해, 한국이나 본국에서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가에 대해 76.2%가 ‘교육 경험이 없다’ 고 답했다. 미등록 이주 여성은 이같은 위협과 사고에도 신고조차 어려운데, 소통이 어려워 피해 입증이 힘들고, 등록되지 않은 미등록 이주 여성노동자의 경우 이들을 지원하는 기관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2018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이 아직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우려하며 “여성에 대한 직간접 차별을 비롯해 빈곤 여성, 민족·인종·종교·성 소수자에 속하는 여성, 장애여성, 난민 및 난민신청 여성, 무국적 및 이주여성, 농촌여성, 비혼여성, 청소년, 여성노인 등 취약집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교차적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것”을 권고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이자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에서 활동하는 조혜인 변호사는 “정부는 그동안 차별금지사유를 둘러싼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거나 사회적 논란이 있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반복함으로써 이러한 반인권적인 주장들을 경청할 가치 있는 하나의 ‘사회적 의견’으로 승인해줬다”라며 “이러한 정부의 태도는 현재 각종 인권 관련 법률과 전국 지자체의 인권조례 등 인권, 평등에 관한 모든 법령들에 대한 공격이 횡행하게 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됐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단일 사유를 기반으로 한 차별금지법만으로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통합적으로 인식하기 어렵고 현실의 복합적인 차별 상황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발전하였다”라며 “10년 이상 지각한 법,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한편, 차별금지법은 지난 17~19대 국회에서 정부안을 포함해 6건의 법안이 발의됐으나, 4건은 임기만료로 폐기되고, 2건은 자진 철회됐다. 오늘 토론회의 공동 주최를 맡은 김종대 의원(정의당)은 “차별금지법에 대한 정치권의 의지가 부족했다고밖에 설명되지 않는다”라며 “정치권, 시민사회, 노조가 공론의 장을 형성해 법안 발의까지 이어지는 체계적인 과정을 밟아나가자”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