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된 죽음, 20년의 재앙

[워커스] 사회주의탐구영역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1. 무엇이 그를 죽였는가

어떤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통신선에 불이 나서 전화고 카드결제고 먹통이 되어 난리가 났을 때, 고속열차가 탈선해 90도로 꺾이고 승객들에게 안전조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때, 그리고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가 발전소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어둠 속에 홀로 참혹한 죽임을 당했을 때 말입니다. 별로 접점이 없어 보이는 세 번의 잇따른 재난, 그 시작점으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 떠오른 한 사람. 바로 20년 전 대통령, 김대중이었습니다.

밀집지역을 관리하는 통신시설에 불이 붙는 동안 초기 진화도, 점검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비용을 절감하겠다며 한 곳에 통신선을 집중시키고, 관리 정비인력을 대폭 잘라냈기 때문입니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부랴부랴 강릉선 KTX를 개통한 지 1년이 지나도록 선로 안전장치가 잘못 설치되어 있던 것을 몰랐답니다. 선로를 까는 곳과 철도를 운영하는 곳이 분리돼 있어 통합적인 안전점검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수백 명이 탑승하는 열차에서 사고가 났는데 ‘공식적으로’ 승객 안전을 담당하는 직원은 단 1명에 불과했습니다. 열차 승무 업무를 철도공사가 책임지지 않고 외주화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발전소 시설을 정비하고 점검하는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고용돼, 탄가루가 날려 시야조차 확보하기 힘든 곳에서 동료인력도 없이 홀로 위험한 기계장치에 머리를 들이밀고 일하다 휘말려 들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발전소가 비용을 아끼겠다고 싼값에 정비업무를 외주화시켜 하청 노동자들을 안전조치도 없이 죽음으로 떠밀었기 때문입니다.

통신, 철도, 발전. 이 세 분야의 공통점을 찾자면, 우선 식상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시민의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공공재이자 국가의 기간산업이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하나 더,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 분야 모두 20년 전 김대중 정부가 체계적인 민영화 계획을 수립해 매각과 분할을 집행한 공기업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국가의 공적 책임은 해체됐습니다. 수익을 보전하고 비용을 줄이는 데 혈안이 된 각각의 기업들이 존재할 뿐이죠. 오늘의 재앙을 가져온 민영화의 대계, 그것을 완성한 것이 바로 김대중 정부였습니다.

잇따른 사고에 정부는 ‘통신선 안전점검을 강화하겠다, 철도 선로시설들을 점검하겠다, 위험의 외주화를 방지하고 원청 책임을 강화하겠다’ 등등 일련의 대책들을 내놓았습니다. 당연히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들입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근본 원인인 민영화에 대한 언급은 없었죠. 민영화가 뿌리내린 지 20년, 재난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오늘도 노동자들은 통신선을 연결하고, 열차를 움직이고, 발전기를 돌립니다. 공공성을 해체한 공공부문이 살인자가 되어 돌아오는 현실에서, 더 이상의 참담한 죽음을 막기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볼 때입니다.

#2. 재앙은 어떻게 뿌리내렸는가

“(한국전력공사는) 수익성과 이윤 극대화보다는 전력의 안정적 공급만을 경영목표로 중시”

2000년 12월, 김대중 정부 당시 산업자원부가 <전력산업 구조개편 추진계획>을 발표하면서 민영화가 필요한 ‘이유’라고 제시한 것입니다. 칭찬이 아닙니다. 수익성과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지 않고 안정적인 전력공급만을 중시한 게 ‘문제’라고 주장한 것이죠. 그래서 당시 정부가 내린 결론은 한국전력공사를 쪼개 민영화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한국전력은 전력생산(발전), 송 배전, 판매를 모두 포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는 이 각각의 부문을 분리하고, 부문 내부를 다시 분할해 조각조각 팔아치우는 분할민영화계획을 수립합니다. 그 시작으로 먼저 발전부문을 한전에서 떼어내 여러 개의 자회사로 쪼갭니다. 지금의 동서발전 남동발전 중부발전 서부발전 남부발전 등 5개 화력발전사, 그리고 한국수력원자력까지 총 6개의 회사를 만들죠. 비정규직 노동자 故 김용균 님이 목숨을 잃은 태안화력발전소가 바로 이때 분할한 자회사 중 하나인 ‘서부발전’ 관할입니다.

애초 김대중 정부는 이렇게 쪼갠 각 발전사들을 매각해 민영화하고, 나아가 발전 부문뿐 아니라 송‧배전부문까지 여러 자회사로 나눈 뒤 판매시장까지 완전 개방하는 3단계에 걸친 민영화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2002년 발전 노동자들이 민영화 저지 총파업에 나서면서 추가적인 분할매각은 잠정 중단되죠.

그렇다고 민영화를 멈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항이 큰 직접매각 대신 한전과 발전자회사들은 외주화를 확대합니다.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故 김용균 님이 일하던 발전설비 관리와 정비업무입니다. 발전소 운영에 필수적인 업무이지만 그 비용이 아깝다고 업무 자체를 별도 회사로 떼어내 하청으로 맡긴 것이죠. 고인이 속한 회사 ‘한국발전기술’은 이렇게 2011년 자회사로 분리됩니다. 그리고 2014년에는 ‘공기업 자회사 민영화 1호’라는 타이틀을 달고 민간자본인 태광실업에 매각되죠. 한국전력을 쪼개고, 거기서 또 업무들을 외주화하는 다단계 발전 민영화 속에 故 김용균 님을 포함한 수백 명의 하청노동자들이 희생당했습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김대중 정부는 철도에서도 한국전력과 유사한 단계적 민영화 계획을 수립합니다. 20년 전만 해도 철도담당기관은 ‘철도청’이라는 관청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1999년 <철도산업 구조개혁 방침>을 발표하고 철도청을 철도시설공단과 철도운영회사로 분할한 뒤, 철도운영회사를 민영화한다는 구상을 내놓습니다. 이로써 철도청이 통합 관리하던 선로 건설 및 시설관리(한국철도시설공단)와 철도운행(한국철도공사)이 쪼개집니다(이 계획에 따른 실제 분할은 2004년 노무현 정부가 완성하죠).

시설과 운영의 분리, 혹은 ‘상하분리’라고도 부르는 이 민영화 1단계 조치로 인해 철도공사는 시설공단에 매년 막대한 ‘선로 이용료’를 지불하게 됩니다. 통합조직이었다면 발생하지 않을, 불필요한 비용이죠. 이 자체도 낭비이지만, 이번 강릉선 KTX 탈선사고에서도 드러나듯 시설과 운영이 분리되다 보니 선로 안전에 근본적 문제가 생깁니다. 시설공단은 선로를 완성해 공급하고, 철도공사는 그저 이를 제공받아 운영하는 것으로 분할돼 있으니 통합적이고 온전한 안전점검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라는 것이죠.

철도공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역무, 열차승무, 차량정비 등 각종 업무를 외주화하는 자회사들을 만들었죠. 발전소에서 정비업무를 외주화한 것과 똑같습니다. 대표적으로 KTX 승무원들은 형식적으로 철도공사 소속이 아니라 그 자회사인 ‘코레일관광개발’이라는 회사 소속입니다. 철도공사는 자신들의 고용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승무원들의 업무가 필수적인 생명안전업무가 아니라고 강변하면서 안전교육에서도 배제하죠. 이 때문에 1천 명이 탑승하는 KTX에서 공식적으로 승객안전을 담당하는 철도공사 정직원은 1명뿐이고, 승무원들은 실제 안전업무를 수행하면서도 ‘너희는 안전업무 인원이 아니’라며 직접고용을 거부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여 있죠. 강릉선 탈선사고는 민영화 1단계였던 철도의 시설운영분리, 그리고 분할 이후 지속된 철도공사의 외주화가 만들어낸 재앙이었던 것입니다.

발전과 철도가 아직 완전민영화에는 이르지 않았다면, 통신은 김대중 정부가 직접 완전민영화시킨 분야입니다. 원래 공기업이었던 ‘한국통신공사’는 1990년대 들어 지속적인 민영화 압력을 받다가, IMF 이후 김대중 정부가 주식시장에 상장해 5년만인 2002년 정부 보유 주식을 전량 매각하며 민영화를 완료했죠. 그렇게 오늘날의 KT가 탄생했습니다. 이후 KT는 15년간 4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을 쫓아내면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자행했고 자회사나 하청업체로 대거 외주화했습니다. 수익을 내기 위해 국가자산인 인공위성을 팔아치우는 기행을 선보이는가 하면, 한국통신 시절 공적 자산으로 확보한 부지를 바탕으로 부동산 장사를 하면서 정작 필수적인 안전투자는 대폭 축소했죠. 현재 KT아현국사 화재를 수습하고 복구하는 노동자들도 대부분이 하청업체 노동자들입니다.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만 받으면서 전신주, 맨홀에서 통신선 작업을 하다 죽어 나가는 바로 그 노동자들이죠. 민영화로 만든 KT, 노동자들이 ‘죽음의 일터’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3. 죽지 않기 위해, 주인이 돼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공공재를 국가와 공동체의 책임으로 공적인 소유와 운영, 통제 하에 생산하고 공급할 것을 주장합니다. 전기가, 철도가, 통신망이 공동체 전체를 위한 것이라면, 거기에서 왜 수익을 내야 합니까? 앞서 언급했듯 김대중 정부는 “수익성과 이윤극대화 보다는” 공공재의 “안정적 공급만을 경영목표로 중시”하는 게 잘못이기 때문에 민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의 생각은 딱 정반대입니다. 공공부문은 이윤이 아니라 바로 공공재의 안정적 공급만을 경영목표로 중시하는 게 맞다는 겁니다. 아, 그 경영목표에 반드시 한 가지가 더 있겠군요.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은 그 어떤 ‘비용’에 앞서 우선적으로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죠.

사회주의에서는 민영화 조치 때문에 분할되고 외주화됐던 공기업들을 다시 하나로 온전히 합칠 겁니다. 매각된 기업들 역시 국유화로 전환하겠죠. 이로써 공공재의 안정적 공급을 위한 통합적 관리의 기반을 만들 겁니다. 노동자들 역시 원청, 자회사, 하청업체로 쪼개져 생명조차 차별받는 구조를 깨고 단일 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로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죠.

그렇다면 그저 20년 전의 한국전력, 철도청, 한국통신으로 복귀하면 문제없는 것일까요? 소유구조를 온전한 국유화로 되돌리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이 빠졌죠. 사회주의는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민주적인 통제권이 핵심입니다. 국유화나 공동체의 소유는 이 민주적 통제를 위한 중요한 기반이지만, 그 자체가 곧 사회주의인 것은 아닙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결정권을 갖지 못한다면, 다른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 억압받을 수밖에 없겠죠. 형식상 국유기업인 공기업들은 관료기구의 통제 하에 놓여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들이 바로 노동자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비용절감을 강제한 장본인들이죠. 발전소 노동자들은 이전부터 작업공정이 위험하다고, 더 이상의 죽음을 막을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지만 다시 희생자가 나온 지금까지 ‘공기업’인 서부발전과 한전은 묵묵부답입니다. KTX 승무원을 직접 고용하라는 요구를 무시하고 안전인력이 부족한 위험천만한 열차를 내달리게 하는 것도 ‘공기업’인 철도공사입니다.

사회주의의 목표는 노동자들이 겉치레가 아니라 자기 일터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지시나 명령을 받는 게 아니라, 생산방식과 노동과정을 포함한 일터의 문제들을 집단적으로 함께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는 점에서 말이죠. 특히나 공공부문의 경우 비용 절감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지 최우선으로 해 노동자들이 스스로 작업공정을 결정하고 변화시킬 권한을 갖게 될 겁니다. 이를 위해 발전소에서, 철도에서, 통신사에서 기업 전체 차원의 노동자 평의회는 물론이고 업무, 부서에 따라 소규모 평의회들이 조직돼 더 나은 일터를 위해 필요한 개선사항들을 정하고, 기업 전체의 평의회에 대표를 파견해 이를 요구하고 함께 결정하고 실제 이행하는 것이죠. 가령 발전소에서 사고가 우려되는 공정이 있다면, 비용이 들더라도 안전설비를 완비하고 작업 중지를 비롯한 안전조치를 취하도록 작업자들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공공재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만큼, 공동체 전체의 통제도 필요할 겁니다. 가령 전력을 얼마나 생산해야 하는지, 어디에 선로를 더 확충하고 열차 배차를 늘릴지 등을 전력 노동자들끼리 혹은 철도 노동자들끼리만 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적어도 공공재는 수익이 목적이 아니라는 대원칙 하에서, 사회적 필요와 노동자들의 생명안전을 결합하는 방안 역시 얼마든지 민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 겁니다. 직장과 부서에서 평의회를 조직하듯이 그 상위에는 각 평의회의 대표들이 모이는 지역과 전국, 공동체 전체의 평의회를 만들 수 있죠. 발전소, 철도, 통신사의 노동자 평의회는 당연히 이 전체 평의회의 일원입니다.

물론 시시콜콜 모든 문제를 전체 평의회에서 논의할 수는 없겠죠. 사회적으로 필요한 공공재의 공급 수준과 거기에 노동자들이 투입해야 하는 노동, 그에 따른 보상 수준을 거시적으로 정하는 것 정도는 전체 평의회가 결정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이후에는 실제 생산과정에 통제권을 발휘하는 기업 차원의 노동자평의회에 공공적 통제를 담보하는 차원에서 전체 평의회의 위임을 받은 대표자가 역으로 파견될 수도 있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이 집단적, 민주적으로 자신들 스스로의 생명안전을 지킬 수 있는 결정권을 행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비전과 구상이 나온들, 이미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을 돌이켜 불러올 수는 없겠지요. 그것이 안타까운 날들입니다. 故 김영균 님과, 스러져간 노동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워커스 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