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의 지난 세기를 밀어버릴 재개발 깃발

[워커스 기술문화비평] 청계천 을지로 세운상가의 기술과 문화 생태계의 보존을 위해

  1968년 세운상가 모습(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출처: 서울시]

지난 연말 연구소 동료들과 을지로 근방에서 회의를 하고 세운상가 탐방을 위해 이동하던 중 낯설면서도 어쩐지 낯익은 풍경들을 만났다. 철물상이나 공구점, 가구점 등이 빽빽하게 마주하던 골목에서 몇몇 건물은 이미 철거 중이었고 여러 가게들의 닫힌 철문에는 ‘단결 투쟁’과 ‘재개발 결사반대’ 같은 글자들이 스프레이로 뿌려져 있었다. 이 근방의 거리가 오래 전부터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돼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한겨울 매서운 추위 속 반 쯤 부서져 내린 건물 틈새에 잔뜩 웅크리고 있던 길고양이의 불안한 눈빛은 그러한 조치로 누군가는 오래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또 어디론가 내몰려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운상가로 불리는 이 공간은 서울 구도심의 종로에서 을지로를 지나 퇴계로까지 남북으로 길게 위치한다, 지도를 보면 정말 ‘세상의 기운이 모이는’(世運) 곳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종묘의 남쪽에서 시작해 남산자락까지 곧게 이어진 이 특이한 형태의 건축물은 마치 낡은 조선의 역사가 끝나는 곳에서 근대화된 한국의 새로운 역사가 뻗어나가기라도 하는 듯 보인다. 세운상가가 위치한 장소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역사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도 특별한 공간이다. 세운상가는 60년대 말 박정희 시대에 김현옥 시장이 추진하고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이었다. 서울 도심에서 주거와 상업시설, 공원과 놀이터까지 복합적으로 뒤섞여 당시의 이상적인 도시 건축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말하자면 개발을 핵심 동력으로 삼은 한국의 산업 근대화 시대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였던 이곳은 80년대 이후 슬럼화되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낙후되고 침체된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명박, 오세훈으로 이어지는 민선 서울시장은 무늬뿐인 녹지와 문화재 복원을 앞세우며 대규모 재개발 사업을 추진했다. 그리고 박원순 시장 이후에는 개발 논리 이외에 전통과 현대의 아름다운 공생을 꿈꾸는 듯한 ‘도시재생’이라는 개념이 들어섰다. 도시재생은 인구 감소, 산업구조 변화, 도시 확장 등으로 노후하여 흉하게 버려진 구도심에서 다양한 사업을 벌임으로써 그곳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 것을 의미한다. 재사용(reuse)이나 재활용(re-cycle)이 쓸모 없어진 것을 쓸모 있는 것으로 되살려내는 것처럼, ‘재생’(re-generation)이라는 것도 쓸모 없어진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어 다시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재생이라면 그것은 낡은 공간을 완전히 밀어버리고 그 터에 전혀 새로운 공간을 세우는 기존의 재개발과는 달리, 지역 주민들의 참여를 기반으로 도시 공간을 재개념화하는 사업일 것이다.

그렇다면 세운상가 주변의 도시재생이란 어떠한가? 서울시는 그동안 세운상가 일대를 제조업의 전통을 살리면서도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런 저런 사업들을 진행해왔다. 예컨대 2015년에 추진한 ‘다시 세운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플랫폼’이라는 과장된 구호는 그렇다 치더라도, ‘메이커시티’라는 명칭에는 세운상가의 역사적 의의와 현재성 그리고 미래의 잠재력까지 안아낼 수 있는 상당히 구체적 아젠다가 엿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세운상가 일대의 장인들이 평생 숙련해온 기술을 젊은 스타트업 창업자들과 협업을 통해 전수하는 일이나 여러 다양한 메이커들과 예술가들이 함께 모여 창의적인 작업들을 해내는 것은 이 장소의 역사적 상징성에도 어울리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의 행태를 보면 이러한 도시재생이 단지 구도심의 토건 재개발에 ‘문화’와 ‘창의성’과 ‘역사 보존’이라는 당의정을 발라 내놓은 이름일 뿐, 젠트리피케이션과 무엇이 다른지 의심스럽다. 창업이 필요한 청년 혁신가들과 공간이 필요한 예술가들을 지역의 문화적 가치와 경제적 잠재성을 높여 놓는 대리인들로 앞세워 놓고 이젠 그들을 내쫓을 셈인가? 허름한 세운상가 건물만 남긴 채 그것을 둘러싼 공구상이며 노포며 다양한 도시 제조업 전초기지들을 철거해버리고 몇 십 층짜리 주상복합아파트나 오피스텔을 채우고 나면 대체 무엇이 재생될 것인가? 누구를 위한 도시재생이란 말인가? 역설적이게도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이었던 세운상가와 그 주변의 기술문화 생태계는 토건 재개발에 따른 브랜드 주상복합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사라질 운명에 처해있다.

세운상가는 기술과 문화, 사물과 인간이 상호작용함으로써, 다양한 분야의 기술자들이 서로 연결되고 협업함으로써 형성돼 온 한국 근대 기술문화의 특징적 장소이다. 비록 외국의 기술들을 복제하거나 재설계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습득하기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독자적인 노하우를 축적하고 창의적인 역설계의 방식으로 원래의 기술을 넘어서기도 했던 공간이다. 현재 중국의 기술 저력이 산자이 문화를 거쳐 선전 등지에서 활성화된 메이커 문화가 그 기반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세운상가와 같은 곳을 지금까지 황폐화되도록 내버려둔 것도, 갑자기 재개발하려하는 것도 대단한 실책으로 보인다. 최근 반대 목소리가 커지자 서울시가 사업 추진을 중단하고 보존하는 방향으로 정비계획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국가의 제조업이 몰락해가는 상황에서 허황되게 4차 산업혁명을 부르짖는 것은 모래성을 쌓는 일만큼 부질없지만, 허황된 구호를 외치면서라도 오랜 시간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온 기술과 문화의 생태계를 지키고 재생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제인 제이콥스가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지적했듯이, 도시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 만날 수 있으며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거리와 골목 그리고 공원이다. 도시 혹은 지역이라는 생태계는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깨끗이 밀어버린 뒤 멋진 고층건물을 짓는다고 되살아나지 않는다. 을지로 골목의 구석구석에 수십 년간 공존해온 허름한 가게들과 노포 식당들에 젊은이들이 왜 열광하고 있는지 우선 이해해보라. 지난 1월 20일은 용산 참사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삶의 터전에서 밀려난다. 청계천 공구거리의 닫힌 가게 철문에 새겨진 글자들이 다시 보인다. “용산참사 잊었느냐.” 과거를 말끔히 지운 공간에서 미래가 어찌 꽃필까.[워커스 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