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텍 ‘족벌 경영’이 끊은 노동자의 기타줄

[워커스 르포] 김경봉, 임재춘, 이인근, 오늘도 복직의 꿈을

삼성 못지 않게 족벌 경영을 펼치는 회사가 있다. ㈜콜텍의 박영호 일가다. 박영호는 1973년 콜트악기㈜를 설립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콜트악기에 노조가 생겼다. 그러자 박영호는 1988년 새 법인 콜텍을 설립해 기타를 생산했다. 콜트악기 경영은 지속해서 줄여나갔다. 노동자들은 박영호가 노조 없는 회사를 꿈꾸고 있는 것 아니냐는 오랜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콜트악기는 현재 ‘세명디엔아이’라는 이름으로 부동산 임대업만 영위하고 있다. 세명디엔아이의 주요 거래 대상자는 콜텍이다.

콜텍은 2007년 노동자 250명을 정리해고한 뒤, 회사를 분할해 ㈜기타네트와 ㈜콜텍엠아이씨를 설립했는데, 박영호의 두 동생이 각 회사의 대표를 맡고 있다. 박영호의 부인 정 모 씨는 현재 콜텍 감사다. 박영호의 아들 역시 콜텍 사내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이외에도 콜텍은 PT콜트인도네시아, 콜텍대련유한공사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다. 박영호는 한때 한국 부자 순위 120위(자산 1200억 원대)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지난해 콜텍은 매출액 1378억 원, 당기순이익 74억 원을 기록했다. 콜텍은 지금도 동종업계 1위다.

하지만 콜텍은 오랜 시간 해고자들의 복직을 거부하고 있다. 콜텍 노동자들은 2007년 4월 정리해고를 당했다. 당시 콜텍의 순이익은 76억 원이었다. 동종업계 부채비율이 168%에 달했는데, 콜텍은 30.4%로 재무가 탄탄했다. 1996년부터 2007년까지 누적흑자만 878억 원에 달했다.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상 정리해고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며 해고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법원은 콜텍 경영상황 감정을 직접 전문가에 의뢰했다. “㈜콜텍의 재무구조가 건실하고 통기타 사업의 수익성이 양호하므로 대전공장의 영업손실 상황이 경영상의 긴박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2012년 12월 파기환송심에서 “미래에 다가올 경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정리해고는 유효하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며 노동자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 그해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최악의 판결’로 꼽힌 이 사건의 배경에는 박근혜와 양승태의 재판거래가 있었다. 2015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에는 콜텍 정리해고 유효 판결이 언급돼 있었다. 재판거래 사건으로 양승태는 구속됐지만, 콜텍 해고자들은 여전히 서울 강서구 콜텍 본사 앞에서 농성하고 있다. 햇수로 13년째다.

  2월 18일 콜텍 해고자들이 콜텍 본사에 진입해 박영호 사장을 만났다. [출처: 김한주 기자]


박영호 사장실에 들어서다

2월 18일. 콜텍 해고자들은 사장을 만나기로 했다. 지난해 말부터 해고자 복직을 위한 교섭을 네 차례 이어갔지만 진척이 없었다. 사장은 교섭에 나오지 않았다. 사장 위임을 받은 이희용 상무는 자기 선에서 해결할 게 없다고 했다. 해고자들은 사장에게 직접 교섭을 요구하기로 했다. 해고자들은 이날 직원이 문을 연 틈을 타 본사에 진입했다. 곧장 사장실이 위치한 3층으로 올라갔다. 사장실에 박영호가 앉아 있었다. 2009년 뮤직메세가 열린 독일에서 마주친 뒤 10년 만의 재회였다. 해고자들은 솟구치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우리는 수년 동안 사장님의 해결을 원했습니다. 사장님이 연말마다 말씀하셨죠. 여러분은 내 가족이라고. 회사는 여러분의 것이라고. 사장님은 아들, 딸을 길거리로 내몰아 봤습니까? 이게 가족에게 할 짓입니까? 사장님 없이 이희용 상무와 교섭을 진행했는데 아무것도 나올 게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장님과의 직접 교섭을 요구합니다. 대답을 들을 때까지 이곳에서 나가지 않을 겁니다.” (이인근 금속노조 콜텍지회장)

“사장님, 가슴에 손을 얹고 한 점 부끄러움 없습니까? 대체 노동자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우리라고 이렇게 (본사 진입을) 하고 싶어서 하겠습니까? 제 아이들이 한창 크고 돈 들어갈 시기에 사장님이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익을 위해서면 뭐가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까? 재판거래 문건까지 다 나왔는데 정말 정당한 해고라고 생각하십니까? 세계 속의 명품 기타 만들겠다고 하셨지요. 평생 기타만 만들던 노동자를 해고해서 어떤 명품을, 명예를 얻겠다는 겁니까?” (김경봉 콜텍지회 조합원)

박 사장은 눈을 감은 채 말을 아꼈다. 사측 관리자가 박 사장 앞에서 해고자들의 말을 되받아쳤다. 관리자는 양승태 재판거래를 두고 “사법농단이라고 어떻게 결론을 내리느냐”, “(재판거래) 문건이 나왔다고 정확한 내용이 아니지 않으냐”고 맞섰다. 박 사장은 “이 상황에서 얘기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박 사장이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했다. 박 사장은 2008년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소송에서 “노동부에서 지랄 같은 법을 만들어 골탕 먹인다”고 말한 바 있다. 2011년 국정감사에서는 “법원이 부당해고 판결을 내려도 해고자 복직은 할 수 없다”며 사법체계를 부정하는 발언까지 한 인물이다. 박영호 사장은 10년 만에 만난 해고자를 또다시 문전박대했다.

  2월 18일 콜텍 본사에 진입한 시민들 [출처: 김한주 기자]


콜텍 본사 앞 농성장, 3명의 해고자

해고자들은 다시 농성장으로 돌아왔다. 박영호가 다음 교섭에 직접 참여하고 전향된 안을 제시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였다. 이인근 지회장은 10년 만에 만난 사장을 두고 “어쩜 늙어도 저렇게 늙었을까”라는 짧은 소회를 밝혔다. 13년 투쟁의 세월, 박영호는 73세 노인이 돼 있었다. 해고자들 또한 머리가 희고 주름이 깊어졌다. 박영호 자본과 싸우는 해고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조합원은 김경봉이다. 그는 올해 정년을 맞았다. 정년이 되기 전에 복직해 콜텍 사원으로 명예롭게 퇴직하는 것이 현재 목표다.

김경봉은 숫자 ‘7’과 악연이 깊다. 그는 2000년 콜텍에 입사하기 전, 대전의 한 피혁회사에 다녔다. 하지만 피혁회사 근처에 아파트가 세워지자 대전시가 공장을 옮기라고 해 7년 만에 문을 닫았다. 다른 피혁회사에 취업했는데 역시 7년 만에 부도가 났다. 그리고 온 곳이 콜텍. 콜텍 정리해고 이후 대법원 판결까지도 7년이 걸렸다. 한 가지 더. 그는 콜텍 투쟁으로 끊었던 담배를 7년 만에 다시 피우게 됐다. 그가 원하는 것은 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난 2월 4일 아들이 제대했다. 그는 홀로 농성장에서 두 딸과 아들, 아내가 집에서 춤추며 노래 부르는 동영상을 자꾸만 돌려 본다.

“가족들에게 미안한 것이 많습니다. 아이들이 한창 학교 다닐 때 정리해고를 당했거든요. 제가 돈을 벌어오지 못하니 큰딸은 대학교 2학년 때 휴학을 했어요. 학자금 대출받고 복학하기를 반복했어요. 둘째도 마찬가지였고요. 아내도 아내대로 일하고 있으니 마음이 아주 아파요. 그때는 아이들이 저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제는 이 투쟁을 끝내야죠. 나이가 이렇다보니 제 건강 걱정만 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요.” (김경봉)

  김경봉 금속노조 콜텍지회 조합원 [출처: 김한주 기자]


임재춘은 다른 건 몰라도 기타 공정만큼은 절대 잊지 않았다고 한다. 농성장에서 기타를 꺼내 기자에게 한참을 설명했다. 합판을 기타 모양으로 자른 뒤, 상판 안쪽에 십자상목과 소리 높낮이를 담당하는 보조상목을 붙이고, 측판을 휜 뒤 후판과 이음새를 붙이는 과정까지. 1400개에 달하는 기타 공정은 대부분 사람의 손으로 이뤄진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그는 22세부터 성음악기, 삼익악기, 덕영악기에서 기타를 만들었다. 콜텍이 1980년대 후반 덕영악기를 인수하면서 콜텍 노동자가 됐다. 그는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악기 회사를 거치며 어쿠스틱 기타부터 전자기타까지 모든 기술을 섭력했다. 30년 동안 기타만 만든 그야말로 ‘기능공’이다.

이인근 지회장은 1998년 콜텍에 입사했다. 이인근은 2006년 4월 노조 설립 초기부터 지회장을 맡아 왔다. 콜텍 투쟁을 이끈 장본인이다. 노조가 없던 시절, 콜텍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시달려 왔다. 10년 넘게 일해도 일급은 2만5천 원. 당시엔 모든 노동자의 임금이 비밀에 부쳐졌다. 회사가 마음에 드는 사람은 임금을 더 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덜 줬다. 실제로 호봉표는 없었고, 연차는 무용지물이었다. 특히 여성 노동자 차별이 심각했다. 대전공장엔 여성 노동자가 꽤 많았는데 임금은 남성보다 현저히 낮았다. 또 관리자들의 성희롱, 성추행이 비일비재했다. 이에 항의하면 임금이 동결됐다. 이인근은 문제를 제기하며 회사와 싸웠다. 콜텍 대전공장 노동자 67명 전부가 노조에 가입해 뜻을 같이했다. 노조는 2006년 12월 노동부에 박영호 사장을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2011년 박영호 사장은 이 사건으로 1000만 원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동료 앞에서는 여간해서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그가 이렇게 말했다.

“사실 4~5년 전이 가장 힘들었어요. 제가 가장 역할을 못 하다 보니까 가까이 있던 사람이 저를 떠났어요. 해고가 가정을 갈라놓았지요. 정리해고 뒤에 금속노조에서 최저임금 수준으로 1년간 생계비를 지원했는데, 한 달 90만 원 정도였어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어요. 지금 아이들은 엄마와 같이 지내요. 딸은 충남대병원에서 간호사를 하고, 아들은 청주에서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어요. 가끔 지부 운영위원회 참석차 청주에 가면 아들을 만나요. 이렇게밖에 볼 수 없는 게…. 조합원들도 싸움이 길어지니까 활동을 더 못하고 생계 투쟁을 나갔어요. 지금은 저를 포함한 3명만이 남아서 복직 투쟁을 하는 상황입니다. 이젠 정말 끝장을 봐야 합니다.”

[출처: 김한주 기자]


13년 해고기간, 1억5천만 원으로 ‘퉁’ 치려는 회사

이인근, 임재춘, 김경봉은 복직을 조건으로 회사와 교섭 중이다. 13년의 복직 투쟁 끝에 지난해 12월 26일 첫 교섭이 열렸다. 사측은 “교섭에 나올 이유가 없다”면서도 “도의적 차원으로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노조는 해고자들이 양승태 재판거래로 희생됐고, 이에 따른 명예회복도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해고자들이 정년을 맞았으니, 복직 후 6개월 뒤 퇴사하겠다는 안을 꺼냈다. 농성자 3명을 포함한 조합원 극소수만이 복직을 요구할 것이라고도 전했다. 하지만 사측은 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측은 ‘당일 복직 당일 퇴직안’을 꺼냈다가, 법리적으로 어렵다며 스스로 철회했다.

13년간의 해고기간 보상금을 놓고도 이견이 갈렸다. 현재 콜텍지회 전체 조합원 25명의 투쟁 기간은 3년, 5년, 13년으로 나뉘어 있다. 노조는 평균 연봉 2천만 원에 물가상승률과 해당 투쟁 기간을 반영한 금액을 요구했다. 반면 사측은 5억 이상 보상할 수 없다고 밝혔다. 사측은 정리해고 당시 단체협약으로 규정한 퇴직위로금 이상 줄 수 없다고 했다. 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조합원 25명의 퇴직위로금은 1억5천만 원이다. 여기에 사회적일자리 방식의 기금을 2억5천만 원 규모로 출연하겠다고 했다. 퇴직위로금과 기금 출연을 합쳐 5억 미만을 설정한 것이다.

사측은 정리해고 사과 요구를 두고서도 “사과라는 표현을 쓸 수는 없으나 합의에 이를 시 합의에 준하는 표현을 쓰도록 고려하겠다”고만 말했다. 입장 차만 확인한 뒤 2월 14일 교섭이 결렬됐다. 현재 사측 교섭위원을 담당하는 이희용 상무이사는 인도네시아 출장 중이다. 이 상무가 3월 초에 귀국하면, 박영호 사장과 함께 다시 교섭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노조에 따르면 박 사장은 지난 18일 노조와의 비공개 면담에서 자신이 교섭에 직접 참여하고, 전향된 안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노조 또한 전향적인 안을 제출해 달라는 조건을 달았다. 이인근 지회장은 “우리는 처음부터 홀딱 벗고 교섭에 나섰다”며 “노조 요구는 더 이상 낮출 것이 없다. 지금은 사장의 결단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출처: 김한주 기자]


악순환 막기 위해 싸워 온 세월

노조에 따르면 박영호 사장은 2011년 대법원 판결 이후 지인들에게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간의 노조 주장이 잘못됐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노조는 재야 노동세력과 함께 회사 건물 야간 기습 점거, 한강 철탑 시위, 공장 장기 점거, 콜트 기타 불매 운동, 수십 차례 불법 폭력 시위로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고 회사를 괴롭혔다. 결국 회사가 최후의 선택으로 공장폐쇄를 결정하게 됐다.”

이인근 지회장은 이 문자 때문에 13년 동안 투쟁을 멈출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지회장은 “노조가 포기한다면 문자 내용처럼 모든 책임을 노조에 돌리는 짓을 다시 반복할 것이다. 악순환을 막아야 한다. 비록 이 나라 법은 박영호에게 정당성을 부여했지만, 우리는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또 우리 투쟁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 수많은 시민이 있다. 끝까지 박영호의 사과를 받아낼 것”이라고 말했다.(워커스 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