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는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일해야 한다

[기획연재] 모든 노동에 바칩니다②

<모든 노동에 바칩니다> 연재를 시작하며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노동자의 권리는 점점 박탈됐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정규직이 되면 행복해지는 것일까? 지금은 정규직 노동자들도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미래의 희망을 잃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벌기 위해 장시간 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차별과 위계화에 익숙하여 비정규직을 폄훼하기도 한다. 때로는 비정규직을 고용의 안전판으로 삼으려고 한다.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가 노동자들의 권리를 훼손하고 있지만 비정규직 운동의 목표는 단지 고용형태만 정규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네트워크와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는, 노동자들에게는 어떤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지 비정규직의 눈으로 바라보고 함께 토론하면서 '비정규직 사회헌장' 18개 조항을 만들었다. 그 내용은 <모든 노동에 바칩니다>(오월의 봄 출판사)라는 단행본으로 발간됐다. 그 중에서 네 개의 조항에 대해 독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사회헌장 제8조

모든 노동자는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일할 권리가 있다.

20년 전에 나는 펜을 만드는 공장에 다녔었다. 펜심에 잉크를 주입하고 박스로 포장을 하는 일까지 8가지 공정을 거치는데, 공정 하나를 일주일씩 번갈아가면서 작업을 했다. 그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 세척작업이었다. 조립과정에서 더러워진 펜심을 세척제로 닦아내는 일이었다. 시너, 톨루엔, 메틸알코올, 벤젠, 자일렌 등을 혼합세척제가 가득했던 5평 남짓했던 작업공간에는 제대로 열리지도 않는 작은 창문 하나와 작동이 되는지 안 되는지도 알 수 없는 닥트(DUCT) 하나가 설치돼 있었다. 때가 잔뜩 낀 방진마스크는 낡은 서랍 속에 방치되어 있었고, 면장갑 두 짝과 얇은 위생 비닐장갑이 지급된 보호구의 전부였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세척실 가득 코를 찌르던 시큼한 화학물질 냄새를 기억한다. 처음 그 공정에 투입되고 3일 동안은 취한사람마냥 눈이 풀려서 다녔는데, 3일 지나고 나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면장갑을 두 겹씩 끼고 일을 해도 한 시간도 안 되서 장갑은 세척제로 홀랑 젖어버리곤 했었는데, 마침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오른손 중지에 코딱지만 한 티눈이 세척작업 몇 번으로 깔끔하게 없어져서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언니들 중 몇 명이 연속으로 유산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몇몇 사람들이 회사에 닥트시설을 추가로 설치하거나 제대로 된 보호구 지급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고, 서로 그 일이 하기 싫어서 눈치만 살폈다.

2000년 초반, 공장에 구조조정 바람이 불었다. 몇 개의 부서들이 분사되어 나가면서 인원이 정리됐고, 작업자가 모자란 곳에는 촉탁직들이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촉탁직들에게 세척실 업무가 떠맡겨졌다. 우리에게 더 이상 세척실의 작업환경 개선이나 보호구 지급 여부는 관심 대상이 아니었고, 우리가 요구해야 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비정규직들은 오래 다닐 것도 아니고, 어찌됐든 우리는 유해물질로부터 우리의 ‘안전’을 지켜냈으니까.

노동자들이 직접 만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사회헌장 제8조>는 노동자들에게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일할 권리’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유해하고 위험한 업무는 안전장치를 해야 하고, 안전장치를 ‘대신’해 비정규직을 투입하면 안 되며, 위험하다고 생각할 때 언제라도 작업을 중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20년 전 우리는, 제대로 된 작업환경 개선이나 보호구 지급을 대신해 촉탁직이 그 자리를 메울 때 그것을 반대하고 싸웠어야 했다. 비정규직을 위험으로 내몰면서 지켜내는 안전은 진짜 안전이 아님을, 그렇게 방치되고 눈감아버린 안전하지 않은 일터는 결국 우리 모두를 위험으로 내몰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

2001년부터 2016년까지 산재 사고로 죽어간 노동자가 33,902명이다. 방패막이 없는 전쟁터가 따로 없다. 그 중 하청비정규직 노동자의 산재사망률은 월등히 높다. 실제로 중대형 산업재해를 살펴보면 사망자의 90%가 하청업체 소속이다. 지난 2월 20일 현대제철 당진공장에서 외주업체 노동자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사망했다. ‘죽음의 공장’으로 불리는 이 공장에서는 지난 12년 사이 35명의 노동자가 사고로 숨졌다. 그 중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는 29명이다. 고 김용균님이 일했던 충남 태안 화력발전소도 마찬가지다. 5개 발전사에서 2012년부터 5년간 발생한 사고 346건 가운데 337건이 하청에서 발생했고, 2008년부터 9년 동안 산재로 사망한 40명 가운데 37명이 하청 소속 노동자였다. 조선소도, 건설현장도 마찬가지이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하청노동자의 산재 발생률이 높다는 것은 대부분의 위험작업들이 하청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들 노동자들의 죽음의 진짜 책임자들이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청 대기업은 자신들이 부담해야 할 안전 등의 책임을 하청업체로 떠넘기는 방식으로 책임에서 빠져나간다. 2008년 이천 냉동 창고에서 공사 중 불이 났다. 40명의 건설노동자가 사망했지만 해당 기업에 대한 처벌은 2천 만 원의 벌금이 전부였다. 2011년 인천공항철도에서도 5명의 하청노동자가 선로작업 중 열차에 치여 사망했지만 원청 기업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2017년 5월1일에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골리앗크레인과 타워크레인이 충돌하면서 휴게실을 덮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로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 6명이 목숨을 잃고 25명이 다쳤다. 엄청난 중대재해가 발생했음에도 당시 처벌받은 이는 골리앗크레인 신호수 1명이 과실치사상 혐의로 구속된 것이 전부였다. 삼성중공업 사장은 입건조차 되지 않았고, 사고 발생 1년여 만에 삼성중공업 조선소장 등 14명이 불구속 기소됐다. 노동자의 죽음의 진짜 책임자가 누구인가를 묻는다면, 누가 가장 많은 이윤을 가져가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책임은 그에게 있다.

그렇다고 하청업체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2016년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휴대전화 부품업체에서 일하던 노동자 5명이 메탄올에 중독돼 실명을 했다. 사고가 난 사업장은 모두 삼성전자와 엘지전자의 휴대전화를 생산하는 3-4차 하청업체였다. 하청업체는 영세성을 이유로 산재를 예방할 만한 여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했고, 비용절감을 위해 불법 파견 노동자를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당연하다. 원청 대기업과 상생 구조가 정착되지 않은 이상 납품기일을 맞추고, 단가인하 압박을 견뎌내기 위해선 노동자들을 더 열악한 환경으로 내몰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업의 영세성이 노동자들을 병들게 하고, 죽음으로까지 내 몰수 있는 위험한 환경을 방치해도 되는 면제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들은 “안전에 관한 조치와 법을 다 지킨다면 지불능력이 안 되는 기업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수년간 해오고 있다. 1970년대 미국에서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하는 법이 제정되자 자본가들은 “영구적인 대량 실업을 초래할 것”이라고 겁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안전교육을 시킬 비용이 없다면, 보호 장비를 갖출 여건이 안 된다면, 최저임금도 안 되는 임금을 지급하면서 산재처리 조차 꺼리는 기업이라면 망하는 게 맞다. 노동자의 안전 따위는 관심조차 없는 기업라면 말이다.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일할 권리는 당연한 권리이다. 그 당연한 권리는 기업의 보다 많은 이윤창출을 위해서 묻히고 내팽개쳐지고 희생을 감수 당한다. 그 희생이 노동자의 목숨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윤창출이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 보다 중요하다는 인식, 그 인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는 계속해서 죽고, 다치고, 병들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