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말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모라토리엄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말이 정부 입에서 튀어나왔다. 모라토리엄? 디폴트? 국가부도? 도대체 어떻게 국가가 부도날 수 있는 건가 의심했지만, 국가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정부 발표를 심각하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 경제 신탁통치가 시작된다며 일본 제국주의 신탁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했던 국채보상운동처럼 국민들은 금붙이를 모으는 운동을 하기도 했다.
국가 재정은 흑자도 적자도 아닌 딱 맞게 쓰는 균형재정이 가장 좋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국가도 빚을 질 수 있고 심지어 부도도 날 수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언제든 돈을 찍어 쓸 수 있는 국가는 균형재정이 아니라 계속 적자상태여도 상관없고, 빚지지도 않고 부도날 일도 없다는 화폐이론이 있어 마음을 설레게 한다.
현대화폐이론(Modern Monetary Theory, MMT)이 요즘 다시 미국에서 회자되고 있다. 민주사회주의(DSA) 소속으로 최연소 미국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된 ‘알랙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AOC)’ 때문이다. 의정활동을 시작한지 불과 두 달 만에 그린뉴딜(Green New Deal), 국가직업보장(National Job Guaranteeing), 70% 부자증세 등 굵직한 정책들을 제안하며 파란을 몰고 있다. 그는 최근 아마존 제2본사를 뉴욕시에 설립하려던 계획에 대해 젠트리피케이션, 30억 달러 세금지원, 서민의 삶의 질 악화 등을 이유로 반대했고, 결국 아마존은 이에 굴복해 제2본사 계획을 백지화하기도 했다.
코르테즈는 의회에 입성하자마자 전기에너지를 100%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고, 녹색 빌딩 전환, 탈탄소화 및 온실가스 감축 분야에 대한 대규모 투자 등을 목표로 한 그린 뉴딜 결의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결의안 실현을 위해 1)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1조 달러 이상 인프라 투자 2) 1천만 명의 일자리 창출 3) 건강보험의 전국적 적용, 대학무상등록금, 기본소득, 생활 보장 최저임금 등 포괄적인 사회보장 확보 4) 이를 위한 과감한 재정적자 정책이 필요하다는 제안도 담았다. 그린뉴딜과 함께 일자리를 희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국가가 직업을 보장해주는 국가직업보장 등을 추진하는데도 많은 예산을 책정했다. 국가 주도로 이 사업들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적자재정이 필요하다는 점과, 과거 대공황기에 루즈벨트가 진행한 뉴딜 정책이 초기에는 적자를 봤지만 이후에는 6배 이상의 성과가 났다는 사례도 제시했다. 그러면서 이 적자재정 정책의 이론적 기반을 현대화폐이론(MMT)에서 찾았다.
▲ 버니 샌더스(좌), 알랙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우) [출처: 미 의회] |
현대화폐이론(MMT)은 코르테즈에 의해 다시 불붙었지만,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2016년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출마 당시 현대화폐이론에 근거해 적자재정정책을 공약한 바 있다. 더 멀리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 직후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가 양적완화를 지속했는데, 지난 100년 동안 연준이 공급했던 달러 보다 두 배나 많은 금액을 불과 2년 사이에 풀면서 이 현대화폐이론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연준이 통화량을 전무후무하게 공급하는데도 인플레이션은커녕 디플레이션 조짐이 커졌고 이 때문에 전통적인 화폐이론인 화폐수량설, 신화폐수량설 등이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동시에 반사적으로 현대화폐이론의 내용들이 주목받았다.
MMT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면 화폐의 기원과 역사, 화폐의 가치부터 정리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간략하게만 살펴보자. 첫째, MMT는 정부가 자신이 발행하는 화폐로만 지불할 수 있는 조세의무를 부과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둘째, 세금 납부자는 세금으로 납부해야 할 정부 발행화폐를 얻기 위해 자신의 재화와 용역을 판매한다. 셋째, 정부는 이러한 재화와 용역을 구입하기 위해 자신의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 넷째, 화폐는 조세의무를 부과한 국가에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가치를 갖는다. 다섯째, 국가는 민간에서 생산된 상품의 구매량을 통해 화폐의 가치를 결정할 재량이 있다. 여섯째, 민간은행의 신용화폐는 국가 발행 화폐를 기초로 삼는 레버리지 자산으로 규정한다.1)
MMT가 주장하는 핵심은 화폐는 국가가 발행하는 것으로(화폐국정설) 본질적으로 채무를 청산하기 위한 결제수단이며 그중 가장 중요한 채무는 국가에 내는 세금이라는 것이다. 이때 세금에 대한 채무는 국가가 정하는 계산단위로 산정됐고 결제수단 역시 국정화폐( at money)로 지정됐다. MMT에 가장 열성적인 랜덜 레이는 “모든 현대 화폐 시스템은 국가 화폐 시스템으로서, 주권자가 계산화폐를 선택하고 그것을 단위로 하여 조세의무를 부과한다. 다음으로 주권자는 세금을 지불하는 데에 쓸 통화를 발행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2)
이처럼 MMT는 국가의 무제한적인 화폐발행(영구적인 적자재정)이 가능하고 이를 통해 완전고용을 실현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경제 위기 시에 일시적인 적자재정 정책을 추구하는 케인스 화폐이론과 달리 MMT는 영구적인 적자재정을 추구한다. 화폐라는 것은 정부가 지급을 보증한 증서와 같은 것이므로 화폐 발행 주체인 정부는 원하는 만큼 법정통화를 발행할 수 있다. 여기서 쟁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부의 화폐 발행권으로 화폐 가치와 상품의 가격을 조절 또는 결정할 수 있는지의 문제다. 또 다른 하나는 화폐를 너무 많이 발행해 화폐 가치가 폭락하는 인플레이션을 막을 수 있는지 여부다(둘 다 가치결정이라는 점에서 같은 문제다).
MMT는 조세기반 화폐로서 화폐 가치가 형성되고, 국가의 화폐 공급량에 따라 화폐 가치를 결정할 수 있다고 본다. MMT 경제학자인 체르네바는 화폐공급이 국가독점이기 때문에 정부는 가치를 결정할 직접적인 수단을 가진다고 강조한다. “국가가 외생적으로 중요한 (재화나 서비스) 가격을 수립하고 다른 모든 가격에 대해 고리(앵커) 역할을 하는 완전고용 정책을 제안한다. 이같은 제안은 실업이란 통화 발행 제한의 결과이며, 국가는 재정적 제약에 직면하지 않으며, 정부가 외생적으로 가격 책정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3)
또한 MMT의 지지자이자 2016년 버니 샌더스 선거캠프에서 경제보좌관 역할을 맡았던 스테파니 켈튼은 정부의 통화량 조절과 세금 징수 등으로 이를 조절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경제를 싱크대라고 하고 싱크대에 차오르는 물을 화폐라 치자. 정부가 스토퍼로 싱크대 배관을 막고 수도꼭지를 열어 통화를 공급하면 싱크대에 물이 차오른다. 여기서 인플레이션은 싱크대에 물이 넘치는 것인데, 이를 해결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싱크대에 공급하는 물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다. 즉, 정부는 통화공급의 지출 속도를 줄일 수 있다. 그래도 물이 넘치려고 하면 배수관을 열어(세금 징수를 늘려서) 물(화폐)을 뺀다.
이처럼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전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할 능력이 있는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서 정부는 필요시 얼마든지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 정부는 자국 통화로 가치가 매겨진 채무에 관한 한, 만기가 돌아올 때마다 언제든 모두 지불할 능력이 있다. 특히 이러한 국가의 지출 능력은 세입 규모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통화량 조절만으로 화폐 가치를 결정할 수 있을까? 우선 내생화폐이론을 따르고 있는 MMT의 기본 전제가 통화공급은 외생적인 것이 아니라 내생적인 요인, 즉 화폐의 수요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통화 공급 독점과 화폐가치 결정은 이 전제가 파괴되는 모순을 안고 있다. 화폐의 가치와 이를 반영하는 상품의 가치와 가격이 괴리되지 않도록 일치시켜야 하는데, 정부의 통화량 조절만으로 이것이 가능하다면 기존의 화폐수량설을 받아들이면 된다.
결국 같은 이야기인데, 설사 통화량으로 화폐 가치를 조절할 수 있다하더라도 MMT로 인플레이션을 해결할 수 있는가? 국가는 화폐 공급을 통제할 수는 있지만, 기술과 노동조건, 노동강도에 의해 결정되는 상품의 가치와 수급상황에 따라 변동하는 시장가격을 조절할 수단은 없다. 정말로 이를 실현하려면 국가는 화폐 공급뿐 아니라 화폐의 수요 측면인 생산과정(상품의 생산량과 수급조절)도 직접 통제해야 한다. 이론적으로 보더라도, 화폐의 공급조절만으로 가치와 가격의 괴리를 막을 수 있다는 방법은 없다. 화폐 가치를 정부가 인위적으로 고정시키게 되면 시장가치와의 괴리로 인해 암시장이 형성되는 등 이에 따른 상당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실질 화폐 가치의 변동이 시장 가치의 변화와 결합하면서 초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MMT는 균형재정론과 위기 시에 오히려 긴축재정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하며 등장했다는 점에서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균형재정이 물가안정에 필수적이고 통화량 관리를 통해 물가 수준을 결정할 수 있다는 공리를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화폐의 공급과 재정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화폐에 대해 더욱 사회화된 접근을 시도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주류경제학의 화폐이론은 현실 정합성과 설명력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지난해 3월 한국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통화정책체계가 금리 중시로 변한 기간에 통화증가율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물가 상승률에 대한 설명력은 모두 나타나지 않았다.4) 전통적인 통화정책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미 미국 등 기축통화국의 양적완화가 물가나 성장률의 관계를 상실한 채 이어져왔던 점을 고려하면, 주류경제학에서 화폐와 통화이론은 적절한 설명력을 상실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국가의 화폐 통제로 인플레이션과 실업을 둘 다 해결할 수 있다는 MMT의 주장도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그렇게 낯선 것도 아니다.
아직 역사적으로 MMT에 따른 재정정책이 구사된 경험이 없고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날지도 불명확하다. 하지만 화폐에 대한 접근으로서 MMT는 케인스주의적인 화폐의 사회화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국가의 화폐에 대한 통제권만으로는 시장 가격을 통제할 수 없다는 딜레마가 존재하고 그런 점에서 반쪽짜리 사회화다. 하지만 이윤 주도의 생산이 아닌 사회적 필요에 따른 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생산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다면, MMT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고려될 수 있고 현실화 할 수 있는 실물적 기반을 갖게 될 것이다.
버니 샌더스와 오카시오 코르테즈 등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급진적인 정치인들이 MMT에 기반해 국가 직업 보장이나 그린 뉴딜 등을 주장하는 것도 생산의 사회화를 제쳐놓은 반쪽짜리다. 다만 우선은 상대적으로 손쉽고 긴급한 화폐 공급부터 사회화하고, 뉴딜을 거쳐 생산의 사회화로 나아가려는 단계적이고 전술적인 대응이라 이해하려 한다. [워커스 52호]
1) 민병기 외, 통화정책체계 변화와 통화공급의 내생성 점검, 경기연구원, 2018.02.
2) 랜덜 레이, 홍기빈 역, “균형재정론은 틀렸다”, 책담, 2015
3) Pavlina Tcherneva, The Nature, Origins, and Role of Money: Broad and Specific Propositions and Their Implications for Policy, Working Paper No. 46 July 2005.
4) 통화정책체계 변화와 통화공급의 내생성 점검, 한국은행 조사통계월보, 201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