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보다 더 두려운 건 13년 해고자 삶이 계속되는 것

[연정의 바보같은사랑](102) 영남대의료원지부 해고자복직·노조원상회복 투쟁③ 고공농성 중인 영남대의료원 해고노동자 송영숙 씨 이야기

[필자 주] 대구 영남대의료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해고되어 13년째 원직복직 투쟁을 해오고 있는 박문진·송영숙 씨(민주노총 보건의료노동조합 영남대의료원지부)가 70m 높이 영남대의료원 응급의료센터 건물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이들은 태풍 ‘다나스’를 견디고, 이제는 35도가 넘는 ‘대프리카’ 폭염을 견디며 노조 기획탄압 진상조사, 책임자처벌 및 재발방지, 노동조합 원상회복, 해고자 원직복직, 영남학원 민주화,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2006년 영남대의료원 사측은 창조컨설팅 심종두 노무사와 단체교섭 수임 계약을 했다. 그리고 고의적으로 교섭을 파행시켜 노사 갈등과 노조 파업을 유도하고, 조합원 950명이던 노조를 70여 명의 소수 노조로 만드는 등 기획된 노조파괴와 노조탄압을 자행했다.

그에 대항하는 투쟁 과정에서 해고된 조합원 10명 중에 7명은 대법원 부당해고 판결로 복직됐으나 대법원에서 패소한 곽순복·박문진·송영숙 세 명의 노동자는 13년이 되도록 복직하지 못하고 있다. (영남대의료원 투쟁 관련 상세한 내용은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4125 참조바랍니다)

2012년 국정감사와 청문회를 통해 영남대의료원과 발레오만도 등 14개 노동조합을 파괴하고 168개 기업에 노조파괴 컨설팅을 해온 창조컨설팅의 만행이 드러났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영남대의료원 사측은 대법원 판결을 언급하며 복직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영남대의료원은 대구고용노동청이 제안한 ‘제3자 사적 조정’을 수용하고 대화에 나오겠다고 하였으나 아직 조정위원 선정도 안 된 상태다. 영남대의료원 사측은 고공농성장에 취하기로 한 안전조치 약속조차 10시간도 안되어 “불법농성에 그 어떤 지원도 할 수 없다”며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노동조합 측에서 부착한 현수막을 제거했다.

한 달 째 고공농성 중인 송영숙(영남대의료원지부 부지부장) 씨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이 고농농성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각오, 고공농성 생활을 나누고자 한다. 송영숙 씨는 1998년 영낭대의료원 응급실 간호사로 입사하여 근무하다가 2007년 해고되어 원직복직 투쟁을 해오고 있다.


  대구 영남대의료원 70m 고공에서 농성 중인 영남대의료원 해고노동자 박문진·송영숙 씨 [출처: 연정]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어요

“오늘 물김치가 올라왔는데, 원 샷 해버렸어요. 간이 되어있고 시원해서 속이 뻥 뚫리는 거 같더라고요. 그동안 간이 안 되어 있는 것들을 좀 먹었거든요. 처음에는 비상식량 달달한 거. 초코바, 캬라멜 과자 같은 걸 먹었는데, 날이 더우니 먹히지 않는 거예요. 너무 달아버려 가지고 당뇨 걸리겠다고.”

올라간 지 4일 째 되던 날 송영숙 씨는 아직은 잘 버티고 있다고 했었다. 공간이 좁아 먹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으니 소화가 안 된다고도 했다. 너무 더울 때는 강아지가 혓바닥 내밀고 축 늘어져있는 것처럼 몸이 축 처진다고 했다.

7월 중순, 태풍 ‘다나스’가 올 때 걱정하는 문자메시지가 쇄도했고, 위에서도 많이 긴장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텐트가 계속 들썩거리고 텐트도 사람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두 해고노동자는 밤을 꼬박 새웠다. 바로 밑에서는 영남대의료원지부 김진경 지부장이 고공농성장 안전조치를 요구하며 비를 맞고 밤새 농성을 했다. 다행히 태풍이 살짝 비껴가면서 한시름 놓자마자 폭염이 시작되었다.

거의 한 달 만인 8월 1일 오후 다시 통화를 했을 때, 송영숙 씨는 너무 더워 머리가 멍해서 말이 잘 생각 안 난다고 했다. 인터뷰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 날 대구 최고 온도는 36도, 고공에서의 체감 온도는 50도는 족히 될 것이다. 지금은 속이 부대끼고 입맛이 없어 저녁은 먹지 않고 있다고 했다. 두 끼만 먹는데도 속이 벙벙하다고 한다. 더위 때문인지 단 음식보다는 자작하게 끓인 된장이나 장아찌, 김치 같은 음식이 당긴다. 발끝차기 등 앉거나 누워서 하는 운동을 했었는데, 요즘은 더위 때문에 발끝차기 할 기운도 없다. 낮에는 이렇게 들끓다가 밤이 되면 바람이 무섭게 몰아친다. 낮과 밤 온도 차이도 크다.

“땀띠가 나서 너무 쓰라려요. 사측이 먹을 생수만 올려주고 씻을 물을 안올려줘요. 머리는 안감아도 되는데 땀띠가 나니 힘드네요. 손수건에 물을 묻혀서 닦아내고 있어요.”

7월에는 비 올 때 받아놓은 물을 모아 머리를 감고 몸을 씻기도 했다.

“미끄덩거리는데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잖아요. 서울은 천둥 번개 치면서 비가 왔다고 하는데, 대구는 이제 비소식이 없어요. 땅이 진짜 넓기는 한가 봐요. 텐트 안은 너무 찜통이라 밖에 그늘막에서 더위를 피하는데, 구멍이 나있어 뜨거워요. 그냥 참아내고 견디어 내는 수밖에 없어요. 제일 무서운 건 바람과 난간이에요. 난간이 너무 낮아 어지러워 그쪽은 안 보려고 해요. 바람에 날라 갈까봐 무섭고….”

난간이 30~40cm로 무릎 아래 높이라 위험해서 난간 앞에 오래 서있기가 어려워 집회할 때도 가급적 민중의례만 하고 앉아서 참여하고 있다.

7월 중순에 태풍 ‘다나스’와 관련해 ‘영남대의료원 노동조합 정상화를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가 국가인권위원회에 고공농성장 안전조치 긴급 구제를 요청하여 사측과 노동조합이 안전조치 사항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영남대의료원은 채 10시간도 안되어 “불법농성에 그 어떤 지원도 할 수 없다”며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영숙 씨는 이렇게 위험한 난간에 대한 안전조치도 해주지 않는 영남대의료원인데, 지난 13년 동안 오죽 했겠냐고 한다. 얼마 전에는 영남대의료원이 노동조합 측에서 부착한 현수막도 다 철거 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버틸 수 있게

밤에는 텐트와 비닐이 바람에 펄럭거리는 소리 때문에 자다가 계속 깨서 아침에 눈을 떠도 몸이 개운하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선잠을 자다가 아침이 되면 햇볕 때문에 저절로 눈이 떠진다. 6시에 깨어 잠시 누워 있다가 뜨거워서 텐트 밖으로 나가 바깥 날씨를 확인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대구가 분지형이라서 사방이 산인데, 산들이 우리를 보호해주고 감싸주는 것 같아요. 영남불교대학에 금색 큰 불상이 있는데, 몇 번 씩 봐요. 불상, 교회, 성당 많은 신들에게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버틸 수 있게 해달라고 주문을 외우기도 해요.”

씻는 게 불편하지 않은지 물으니 “보시면 ‘누구세요?’ 하실 거예요.” 한다. 큰 거 작은 거 생리적인 현상이 편치 않고, 화장실 가는 게 귀찮아 물도 잘 안 먹게 된다. 화장실이라고 해봐야 농성장 구석에 강아지 배변 패드 깔고 볼일을 보는 거다.

“난간이 낮고 바람이 많아 패드가 펄럭거려요. 바람을 최대한 막으면서 볼일을 봐야 해요.”

영숙 씨와 필자가 씁쓸한 웃음을 나눈다. 고공농성자들이 볼일을 보다가 패드가 바람에 날아가는 상상을 해본다. 그 패드가 날아가 하필이면 그때 고공농성장 근처를 지나던 병원장 등 영남대의료원 관리자들에게 떨어진다면….

고공농성 초기, 영숙 씨는 무엇보다 생리 날짜 다가오는 게 두렵다고 했었다. 한 달 뒤 두 번째 통화에서 생리통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올라오기 전에는 위에서 할 일이 많이 있겠나 했는데, 막상 올라오고 나니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씻고 아침 출근선전전이 시작되면 아래 위 서로 손을 흔들고 생사 확인을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 먹고 기자회견 참여하고, 안부 응원 문자에 답장을 하고나면 오전이 간다. 그리고 충전할 핸드폰 배터리 등 물품 정리를 해서 내려 보낸다. 지지방문 하는 이들에게 인사를 하는 일도 중요한 하루 일과 중 하나다. 후다닥 저녁 먹고 투쟁문화제까지 마치면 해가 저문다. 집회 정리하고 사람들이 밑에 와서 손을 흔들면 함께 인사를 나눈다. 멀어서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걸음걸이만 봐도 누군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영숙 씨는 저녁 무렵 노을 질 때 하늘이 참 예쁘다고 했다. 밑에 있을 때는 잘 안 봤는데, 여기는 눈높이가 같으니 자연스레 보게 된다.

“노을이 빨갛다가 푸르스름하다가 보라색이 되는 그때가 좋아요. 깜깜한 밤에 네온사인 반짝이는 것도 이쁘죠. 문화제 끝나고 어두우면 못하니까 고양이 세수를 후다닥 해요. 시간이 달리기 하듯이 금방 후다닥 가요. 금세 9시, 10시에요.”

고공농성 초에는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갔는데, 7월 말 폭염이 시작된 이후로는 시간이 너무 안 간다.

  지난 6월 11일, 영남대의료원 로비에서 환자들과 보호자들에게 노조파괴 실상 등을 알리고 있는 송영숙 씨 [출처: 연정]

움직이는 거 보면 부러워요

고공농성 중인 응급의료센터 건물에 걸어놓은 투쟁 요구안이 적힌 현수막 관리도 두 사람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올라와서 현수막에 물통을 달아놓았는데, 바람 불면 올라와요. 다칠 수도 있어서 너무 심할 때는 올렸다 내렸다 해요. 오늘 많이 더운데 하도 올라와서 ‘쟈들도 더운 갑다’ 했어요. 밤에는 올려놨다 아침에는 다시 내려놓고.”

이 이야기를 들은 뒤로 영남대의료원 입구에 들어서면 고공농성장에 현수막이 내려와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현수막이 내려와 있지 않은 날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인데, 그런 날이 제법 많았다.

“여기서 크게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제가 움직임이 없다보니 움직임에 눈이 가요. 새들 날아다니고 3호선 전철 왔다갔다 움직이는 거 보면 부러워요. 날아다니는 새들이랑 눈높이가 같거나 새들이 밑에 날아다닐 때도 있더라고요. 저 새들이 날면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이런 기분일까 생각하면서 새들한테 손을 흔들기도 해요.”

영숙 씨는 아래 있는 집이나 자동차, 주차장이 레고 장난감처럼 작아 한 손으로 잡힐 거 같다고 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앞이나 땅만 보고 다니는데, 밑에 있는 동지들이 아주 가끔은 하늘도 보면서 지냈으면 좋겠단다.

한진중공업이나 재능교육, 파인텍 등 다른 사업장 고공농성장에 연대를 많이 갔었지만, 정작 본인이 고공농성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나. 빨리 잘 돼서 안 다치고 무사히 내려왔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했었는데, 막상 저희가 올라오니 아래서 이렇게 많은 걱정을 하겠다 싶어요.”

노조활동 끝이 해고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3보 1배하고, 지하철 피켓팅 선전전 하러 많이 돌아다녔죠. 병원장 집 앞에서 농성도 하고, 총장실 복도도 가고, 단식도 하고, 천막 치고, 삭발도 해보고…. 병원 로비에서 거의 몇 년은 먹고 살았어요. 박근혜 그림자투쟁 하고, 3천배 절 투쟁도 하고…. 어느새 보니 13년이더라고요. 너무 아득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너무 빤한데…. ‘이래갖고 되겄노. 내가 올라가야지’ 지도위원님이 그전부터 지나가듯이 얘기했어요.”

그런데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다. 지도위원은 작년 말부터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고 이길 수 있는 극한 투쟁을 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생각지도 못했던 거라 두렵기도 하고,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처음엔 ‘고소공포증 있어 못해요’ 하다가 얘기가 구체화되면서 같은 해고자로서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어요. 투쟁 계획 잡고 올해 끝장 봐야겠다 마음가짐도 갖게 되었고요. 13년이라는 게 너무 길고, 저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 투쟁으로 할 수밖에 없겠다.”

영숙 씨는 고공농성을 반대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 건지 이해는 할 수 있다고 했다. 건강상의 이유와 장기화 되는 것에 대한 걱정, 모두 충분히 납득할 만한 내용들이다.

“고공농성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마지막 불사르는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투쟁을 계속 했지만 더 크게 싸우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었거든요.

박 지도위원처럼 영숙 씨 역시 고공농성이 장기화 될 것을 예상하고 겨울옷을 준비했다. 집에서 나올 때마다 몰래 하나씩 가방에 넣어갖고 나오면서 준비를 했다.

“나는 노조 활동을 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되는 걸 납득할 수 없어요. 노조활동의 끝이 해고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돌아간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당연히 걱정되고, 더위 그렇긴 한데요. 근데 고공농성이 장기화되는 것보다 더위보다 더 두려운 건 13년 해고자 삶이 끝나지 않고 계속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정한 거죠.”

고공에 올라오고 했던 첫 번째 발언에서 영숙 씨는 “살기 위해 올라왔다. 노동조합을 살리고 노동자를 살리기 위해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가족들에게 끝내 얘기하지 못 하고

올라오기 전 주말을 집에서 가족들과 보냈음에도 끝내 얘기하지 못하고 왔다. 영숙 씨의 고공농성 계획을 모르는데, 한동안 못 먹을 걸 어떻게 알았는지 주말 집에서 고기 요리가 많이 나와 배불리 먹었다고 한다. 엄마와 함께 마트에 장을 보러 갔는데, 입이 안 떨어졌다. 고공농성을 목전에 둔 6월 말쯤, 한번은 집에 가니 엄마가 타워크레인 고공농성 뉴스를 보고 있었다.

“어쩌노. 밥은 우야노.”

“올려 보내야지.”

간이 철렁했다. 결국 엄마에게는 영남대의료원에서 농성할 거라 당분간 집에 못 올 거라고 얘기했다.

“집에 안 오나? 병원 농성해도 늦게 들어오거나 며칠에 한번은 빨래 하러 오겠지.”

“모르겠다. 마무리 지어야 안 되겠나.”

엄마가 걱정할 까봐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었다. 고공에 오르기 전 주말에는 잠을 푹 잘 계획이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토요일 날 잘 자야지. 했는데, 몸이 토요일인 걸 아는지 ‘안자도 되잖아’ 하면서 잠이 안와요. 저녁때 캔 맥주 먹고 알딸딸해져서 잤어요. 일요일 날도 잠이 안 오는데, 맥주 마셨다가 알람 못 들을까봐 못 마셨어요.”

자정이 지나고, 새벽 1시 2시가 넘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이젠 잠을 자면 못 일어날 것 같았다. 그때부터 자는 걸 포기하고. ‘에이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몰아서 봤다.

고공농성에 들어가기로 한 7월 1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씻고 가족들 몰래 가방을 메고 방에서 나왔다. 등산화를 신고 나가려고 하는데,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하마(벌써) 가나?”

“예.”

대답하자마자 바로 현관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영남대의료원으로 향했다.

  7월 22일, 저녁 투쟁문화제를 마치고 고공농성 중인 해고노동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연대동지들 [출처: 연정]

여기서도 그렇게 묵묵히 하려고 합니다

송영숙 씨는 고공농성 일정이 확정되고 난 후에는 잘 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올라가는 것만 생각 했다. 고공농성 일주일 전에 박문진 지도위원과 함께 영화 <체게바라>를 보면서 이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체게바라> 보면 엄청난 배낭을 메고 험난한 정글을 헤치고 다녀요. 다 버리고, 마지막에 또 버리고, 묵묵히 가는 걸 보니 슬프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고.. 왜 이렇게 밖에 안 되는 건지….”

송영숙 씨에게도 박문진 지도위원과 전생에 어떤 관계였을 거라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절친? 나이 차이 남에도 불구하고 잘 맞는 편이에요. 좋아하는 거나 그런 거 생각해보니 아주 친한 절친 인 거죠. 절친. 지도위원님이 좀 더 빨리 태어나시고, 제가 좀 더 늦게 태어나서...”

“절친인데 내려오시면 야자 타임 한 번 꼭 하세요.”

필자의 농담에 영숙 씨가 웃는다. 절박한 고공농성 중이지만,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게 조금은 다행이다 싶다. 영숙 씨에게는 이번 고공농성이 영남대의료원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모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도 있다. 더 바람이 있다면 조합원이 더 많아지는 거다.

“조합원들에게 힘내라는 지지 문자가 많이 와요. 탈퇴한 예전 조합원들한테도 연락이 오고요. 각자 일 하면서 노조를 믿고 함께 해주는 문자를 보면 안 먹어도 힘이 불끈 솟고 감동 받아 울먹이기도 해요. 잘못은 노조파괴 노무사 고용해서 노조 탄압한 사측이 했는데, 피해는 노동조합만 보고 있잖아요. 많이 나빠진 노동 조건과 노사 관계를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영남대의료원이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조급해하지 않고 지지지 않고 13년 온 것처럼 여기서도 그렇게 묵묵히 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