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이른 일들

[워커스] 레인보우


어느 충성 서약

“저는 동성애는 법적으로 허용하고 말고 할 사항이 아니라고 보고요. 동성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나라 상황에서 이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범적인 답변이다. ‘몇 분의 목사님들’이 우려를 표해 왔기에 동성애와 동성혼에 대한 견해를 묻는다던 의원도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는 듯 지체 없이 군형법 제 92조의6 추행죄에 관한 질의로 넘어간다. 이번에도 물론, 합의된 성관계를 형법으로 처벌하는 문제의 본질에 대한 지적 없이 영내와 영외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식의 능란한 답변이 나온다. 지난 9월 6일 열린 법무부장관 후보자 국회 인사청문회의 한 장면이다. 지난 2017년 4월 대선 후보 방송 토론회에서 한 후보가 (동성애에 반대하느냐는 상대 후보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가 뒤늦게 덧붙이며) “동성혼을 합법화할 생각은 없지만 차별에는 반대한다”고 말했던 것의 반복이다.

이 질문은 언제부턴가 고위공직자 청문회에 어김없이 등장하지만 가부를 가르는 리트머스지 같은 것은 아니다.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법제화는 이르다는 수준의 영리한 대답을 형식적으로 하고 넘기는 것으로 서로 만족할 수 있다. 애초에 이것은 상대의 정치관이나 신념을 묻고 검증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이성애중심주의라는 기존의 가치 체계에 감히 도전하지 않겠다는 충성 서약을 받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도 이 장치를 두고 말을 바꿨다. 그는 한때 “군인 간 동성애는 원칙적으로 비범죄화하고, 군형법 제92조의5의 구성요건을 ‘위계·위력에 의한 추행죄’로 개정하여 군대 내 성폭력에 대한 처벌의 공백을 채울 필요가 있다”고 분명히 주장한 바 있다. 조국, 「군형법 제92조의5 ‘계간 그 밖의 추행죄’ 비판 - 군인간 합의동성애 형사처벌의 당부(當否) -」, 314쪽, 『형사법연구』 제 23권 제4호, 한국형사법학회, 2011, 291-316쪽. 이 논문이 발표된 후인 2013년의 군형법 개정시 제92조의2 유사강간죄가 추가됨으로써 추행죄는 제92조의5에서 제 92조의6으로 이동되었고 조문의 용어는 ‘계간(鷄姦)이나 그 밖의 추행’에서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으로 변경됐다.

이런 그는 “내무반에서 근무 중의 동성애의 경우에 있어서는 보다 강한 제재가 필요하다면 휴가 중[의 …] 경우까지 형사 제재를 하는 것은 조금 과한 게 아닌가 해서 좀 세분화해야 된다는 입장”이라는 말로, 이를테면 수위를 조절했다. 이번 경우에는 전향 선언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이르다는 말

‘아직 이르다’는 말은 안전하다. 특히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같은 말과 함께 쓰이면 더더욱 그렇다. 부정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점진적으로, 느리게나마, 그러나 꾸준히, 언젠가는 이루겠다, 와 같은 숨은 의지로 읽을 여지를 남겨 두니 말이다. 무조건적인 지지까지 갈 것도 없이 약간의 기대나마 있다면 더 큰 일을 도모하기 위한 거짓 항복쯤으로 여기며 오히려 안타까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갖기에 ‘이르다’는 말은 개인의 역사에서도 사회의 역사에서도 너무 많고 분명한 용례를 가지고 있다. 청소년에게 투표는 너무 이르고, 장애인에게 탈시설은 너무 이르며, 공무원에게 노동조합은 너무 이르다. 이 모든 이르다는 말들은 실질적인 변화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시간을 가리켜 쓰인 것이 아니라, 그저 요구와 저항을 무마하고 미루기 위해 쓰여 왔다. 투표권 없이는 국회의원들을 움직일 힘을 가질 수 없으므로, 자립생활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회에서 시설을 폐쇄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노동권 없이는 노동조합을 만들 준비조차 할 수 없으므로, 이 모든 이르다는 말들은 아무런 쓸모 있는 시간을 벌어주지 않는다. 그저 기약 없는 기다림을 강요할 뿐이다.

기다리지 않고 뛰어넘은 사람들이 있었다. 저상버스를 도입하기엔 재정이 부족하다는 말에 물러나지 않고 휠체어에서 내려 버스 계단을 기어 올랐던 사람들, 여자가 밥이나 지을 줄 알면 되지 글은 배워 무엇하냐는 말에 아랑곳 않고 야학에 모여 책을 읽었던 사람들, 노동 시간을 줄이기엔 경제가 위태롭다는 말에도 단호히 공장을 멈춰 세웠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아직은 이르다는 말로 시간을 벌고 뜸을 들인 사람들이 아니라 당장은 무리이거나 오히려 스스로에게 해가 될 수 있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미루지 않고 실천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어 왔다. 권력은 불평등하게 분배되지만 그 불평등을 통해 안정적이게 된다. 무언가는 지금 가능하고 무언가는 아직 이르다는 말로 순서를 매기고 편을 가르는 일은 그 불평등의 안정에 기여할 뿐이다.

이르거나 혹은 뒤늦거나, 그 너머에서

불평등한 세상에서 힘없는 이들이 꾀하는 변화는 그러므로 언제나 시기상조다. 하지만 그 언제라도 이룰 일이라면 이르다는 말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또한 그것은, 적어도 인권이나 평등, 인간의 존엄 같은 것들이 선언된 이래로 여전히 실현되지 못했던 것이므로, 실은 언제나 뒤늦은 일이다. 인권의 시계는 1초씩, 1분씩 차곡차곡 쌓이며 흘러가지 않는다. 이미 있어야 했던 것, 그러나 여전히 이르다는 말로써 지체되고 있는 것을 이 세계에 갑작스레 불러들이는 것, 그러한 도약과 비약이 변화의 시계가 움직이는 방식이다.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사회적으로 아직은 이르다는 말에 숨은 선의를 갖다 댈 수 없는 이유다. 그들이 아직 이르다며 어르는 바로 지금, 우리의 삶은 단숨에 이루어질 것이다― 미루지 않고 미래를 살아 냄으로써 말이다. [워커스 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