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무가베(1924-2019)

[힙합과 급진주의] 아프리카 해방 운동의 상징에서 최악의 독재자로

[출처: 로버트 무가베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Mugabe]

자메이카의 세계적인 레게 스타 밥 말리는 1980년 4월 중순의 어느 날 밤 짐바브웨의 솔즈베리에서 열린 무대에 올랐다. 영국의 식민 통치와 그 뒤를 이은 백인 정착민 통치를 끝내고 아프리카인이 이끄는 국가가 탄생한 순간을 기념하는 무대였다. 3만 명 이상의 관객 앞에서 그의 대표곡 ‘짐바브웨’가 울려 퍼졌고, “아프리카인들이 짐바브웨를 해방할 것이다”라는 이 곡의 가사는 바람이 아닌 현실이 됐다. 자메이카까지 포함하는 범아프리카 세계 전역이 짐바브웨의 독립을 기뻐했다.

그로부터 25년 후인 2005년, 말리의 아들이자 레게 음악인인 데미언은 뉴욕 출신 래퍼 나스와 함께 ‘Road to Zion’이라는 제목의 곡을 발표했다. 음울한 기운이 감도는 이 곡에서 나스는 의미심장한 내용의 가사를 내뱉었다. “유령이나 좀비 같은 사람들. 짐바브웨에서 무가베 대통령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었지.” 데미언의 아버지가 탄생을 축하했던 아프리카인의 국가가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의 통치하에서 황폐해졌음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웠다. 두 음악인은 공권력의 폭력이 만연한 자메이카와 미국, 짐바브웨의 절망적 현실을 헤쳐나가기 위해 계속 투쟁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고, 이들의 문제의식은 몇 년 후 발매된 공동 앨범에서 더욱 분명한 메시지로 표현됐다.

그런데 미국의 혁명적 힙합 그룹 데드 프레즈의 멤버 엠원은 나스와 생각이 달랐다. 두 사람은 여러 차례 같이 음악 작업을 한 가까운 사이였다. 엠원 역시 말리에게서 영감을 얻고 있었다. 2011년 발표된 곡으로 말리의 ‘짐바브웨’에서 제목과 가사를 인용한 ‘Real Revolutionaries(실제의 혁명가들)’에서 그는 “나스는 틀렸어. 무가베가 옳았지”라는 단호한 입장을 내비쳤다. 1980년부터 계속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무가베는 2009년 미국 언론이 꼽은 세계 최악의 독재자 순위에서 1위로 꼽힐 정도로 악명이 높았지만, 엠원은 그런 평판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유로운 짐바브웨를 축하하자”라는 놀라운 가사를 남겼다.

그가 옳았다고 평가한 무가베의 행위는 2000년 강행한 백인 소유의 토지 몰수였다. 그가 보기에 토지 몰수는 백인들이 빼앗아 간 아프리카인들의 자산을 되찾는 극히 정당한 조치였다. 또한 그는 무가베의 폭정이 아닌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잘못된 정책, 토지 몰수 이후 가해진 미국과 유럽연합의 제재가 짐바브웨의 경제를 파탄시켰다고 판단했다. 2013년 그는 여전히 필요한 아프리카 해방을 위해 짐바브웨를 옹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쿠바와 짐바브웨에 대한 국제 사회의 제재 철회를 촉구하는 운동을 시작했고, 다른 아프리카계 예술가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이처럼 말리의 투쟁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는 두 정치적 래퍼는 짐바브웨의 대통령에 대해 전혀 다른 평가를 하고 있었다.

지난 9월 5일 짐바브웨의 전 대통령 무가베가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한때 국제적 시각을 가지고 반식민주의 투쟁을 이끈 급진적 지도자였고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합법적으로 집권한 국가수반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결코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대파를 억압했다. 아프리카인의 해방 운동을 이끌던 그가 짐바브웨의 민중에게서 등을 돌리고 자신의 측근을 국가의 가장 큰 억압자 집단으로 만든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구축한 지배 권력에 의해 권력을 내려놓았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는 대신 마지막까지 국가 원로로서 예우를 받았다. 그는 해방 운동의 지도자이자 잔혹한 독재자로 짐바브웨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짐바브웨의 식민지화는 1888년 은데벨레인들의 왕 로벵굴라가 영국남아프리카회사에 광산 채굴권을 넘겨주면서 시작됐다. 곧 이 지역은 회사의 설립자로 영국 총리직을 맡기도 한 유명한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의 이름을 따 로디지아 또는 남로디지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금광 채굴 사업을 계기로 백인 정착민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은 인접한 남아프리카의 백인들만큼이나 강한 정치 권력과 광대한 땅을 차지했다. 1960년을 전후해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하는 동안에도 남로디지아의 백인 정착민 권력은 굳건했다. 그들은 아프리카인들에게 정치 권력을 내줄 생각이 없었고,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압박하는 영국 정부와 타협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총리 이언 스미스를 중심으로 한 백인들은 1965년 일방적으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다.

동시에 아프리카인들의 오랜 게릴라 투쟁이 시작됐다. 초창기 괜찮은 경제적 성과를 내던 로디지아의 백인 정권은 1970년대에 들어 국제적 고립이 길어지면서 경제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반면 오랜 수감 생활을 거친 급진적 지도자 무가베가 이끄는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연합의 게릴라들은 점점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고, 내외의 압력을 버티지 못한 스미스의 백인 정부는 마지못해 아프리카인들을 통치 주체로 인정했다. 1980년 실시된 선거에서 무가베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총리직에 올랐고 나라 이름을 짐바브웨로 바꾸었다. 무가베가 집권한 첫 10년 동안 짐바브웨는 문맹률을 대폭 낮추고 고학력자를 다수 배출하는 등 남아프리카 최고 수준의 교육 체계를 마련했고, 다수의 국민이 접근할 수 있도록 의료 개혁을 단행했다.

문제는 1990년대에 들어 발생했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던 무가베는 경제 상황이 나빠지자 시장 자유화를 골자로 하는 국제통화기금의 구조조정 권고안을 받아들였으나 소용이 없었고, 콩고 내전 개입 등으로 재정이 더욱 악화했다. 노동자 대규모 파업 등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무가베가 선택한 것은 백인 소유 농장의 몰수였다. 2000년 몰수를 가능하게 하는 개헌안이 부결됐지만, 결과에 관계없이 퇴역군인과 민병대 등은 백인 농장들을 습격했고 백인 농장주와 흑인 노동자 수백 명이 살해당했다. 경악한 국제 사회는 경제 제재를 시작했고 이후 짐바브웨의 모든 산업 분야가 쇠퇴했다. 2008년 재정이 고갈되자 짐바브웨 정부는 화폐를 마구 찍어내기 시작해 유례없는 초인플레이션을 발생시켰고, 결국 자국 화폐 대신 미국 달러를 화폐로 삼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가베는 위기를 맞으면서도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며 계속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자신의 부인을 정치적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은 그의 지지자들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2017년 쿠데타로 사임했다.

무가베 정권에서 발생한 최악의 사건은 백인 토지 몰수가 아니라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반정부세력 진압을 구실로 마타벨레랜드 지역에서 자행된 소수부족인 은데벨레인의 학살이다. ‘구쿠라훈디’ 학살로 알려진 이 사건의 희생자는 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국제 사회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북한 장교들이 훈련한 특수부대가 학살을 주도했고, 현재 짐바브웨의 대통령인 에머슨 음낭가과는 본인의 부정에도 학살에 책임이 있다는 의혹이 계속 제기돼 왔다. 짐바브웨가 무가베의 정치적 유산을 극복하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출처: 나스와 데미언 말리의 2010년 앨범 ‘먼 친척들’]


[출처: 짐바브웨 국기를 배경으로 한 AP2P(M1 & Bonnot)의 2011년 곡 '진정한 혁명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