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나야 하는 사람들: 신아주물, 태광정밀, 광신공업사

[이슈_ 힙지로의 속사정]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3개월 만에 세운3-1,4,5구역이 강제철거됐다. 이곳에서 작은 공장을 운하던 350여 곳의 공구 상인들은 수십 년간 일해 온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 시행사는 강제철거에 저항하는 공구 상인들을 상대로 수억 원 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하겠다며 압박했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에 따르면, 쫓겨난 상인들 중 약 11%는 폐업을 선택했다.

재개발 지역에 속해있는 을지면옥(세운 3-2구역), 양미옥(세운3-3구역) 등 노포들이 철거되고 복합단지가 들어선다는 소식에 반대여론이 거세졌다. 결국 서울시는 철거 직후인 1월 23일,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정비사업을 재검토하고, 올해 말까지 종합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세운상가군 일대의 재개발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서울시가 사업시행인가를 내준 탓에, 세운3-2,6,7구역의 상인들은 여전히 재개발과 철거의 위협에 시달린다. 수십 년간 을지로·청계천 일대에서 기술 협업의 생태계를 만들어왔던 상인들에 대한 이주 대책은 아무것도 없다. 상인들이 쫓겨난 그 곳에는 고층 아파트 건설이 한창이다.


[출처: 김한주 기자]

# 신아주물

세운3구역에 위치한 신아주물은 청계천·을지로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공장이다. 창업주인 할아버지는 6.25전쟁 이후, 일본인에게 배운 기술로 신아주물을 차렸다. 할아버지부터 손주까지 3대에 걸쳐 공장을 운하다 현재의 주인에게 공장을 매각했으니, 어림잡아도 60년이 넘는 역사가 축적된 곳이다.

현재 신아주물을 운하고 있는 김학률 사장은 18년 전 공장을 인수했다. 당시 수 천만 원의 프리미엄을 붙여 신아주물을 인수하겠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신아주물 사장은 당시 주변에서 청계주물을 운하고 있던 김학률 사장에게 공장 인수를 제안했다. 평생 주물만 다뤘던 기술자에게 공장을 맡기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단 인수조건이 있었다. 신아주물이라는 간판을 보존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김학률 사장은 꽤 매력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년간 운했던 청계주물 공장을 정리하고, 수십 년의 역사가 깃든 신아주물 간판을 이어받았다.

김학률 사장이 신아주물을 인수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나 인맥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햇수로 45년간 주물만 다뤘던 전문 기술자다. 열여덟에 사촌 매형이 운하는 주물공장에 취직해, 10년간 제대로 된 돈도 받지 못한 채 일을 배웠다. 긴 세월을 견딘 후 그가 도망치듯 공장을 빠져나왔을 때, 재산이라고는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과 토큰 두 개가 전부다. 이후 이런 저런 주물공장을 거쳐, 청계천으로까지 흘러들어와 30년을 보냈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 사회생활 27년 만에 청계주물을 창업했지만, IMF 경제위기 여파가 남아있던 터라 운이 쉽지 않았다. 그 때 신아주물 사장의 제안은, 그나마 그 시절을 버틸 수 있게 한 동력과 다름없었다.

물론 신아주물을 인수한 후에도 꽤 오래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위기 전만해도 신아주물은 외상 장사를 하지 않아도 일이 려 들어오는 꽤 건실한 공장이었다. 하지만 현찰 장사로만은 살아남기 힘들어 그 후로 10년간 외상을 쌓아두며 버티고 또 버텼다. 임대료 내기도 빠듯한 시절이 이어졌다. 그래도 그 시간을 견디고 나니 남는 것들이 보다. 고정 거래처 고객뿐 아니라, 이러저러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뜨내기 손님들이 점점 늘어났다. 오래도록 한 자리에 있으니, 이를 기억하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이 입소문을 내주는 덕에, 사장이 굳이 업을 뛰거나 광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신아주물이 쌓아온 그 오랜 역사 또한, 청계천·을지로 재개발 사업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질 것이었다. 최근 신아주물 앞에는 좁디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건설기계들이 진을 치고 있다. 아침 밤낮으로 흙을 퍼 나르는 덕에 공장 안팎이 먼지와 매연으로 뿌옇다. 시행사가 골목을 통제하는 바람에 차량이 드나들지 못해 공장에 재료 반입도 힘들어졌다. 아무리 중구청에 민원을 넣어 봐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매일 굴삭기 소음과 매연, 흙먼지가 그를 괴롭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공장 문을 열면, 수십 년간 얼굴을 맞대고 살아온 공구 상인들의 낡은 공장이 좁은 골목길을 따라 줄지어 있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 앞 동네 전체가 무너져 내렸고 허허벌판만 남았다. 지자체와 시행사는 그 곳에 고층 아파트를 짓겠다며 상인들을 내쫓았다. 수십 년간 아침마다 함께 커피를 타 마시던 동료 상인들은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갔다. 지난해 겨울, 공장 앞 상인들이 이주하던 광경을 떠올리면 김 사장은 어쩔 도리 없이 가슴이 먹먹해졌다. 곧 자신에게도 닥칠 일이기에, 한동안은 공황 상태에 빠져나오지 못했다.

예상대로 앞 동네가 무너지자마자, 신아주물을 비롯한 뒷 동네가 다음 철거의 타깃이 됐다. 몇 달 전부터 감정평가사가 공장들을 드나들기 시작했고, 곧 철거가 시작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집주인은 오는 12월 안에 건물이 시행사로 넘어갈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왔다.

한때는 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모이면 동네를 지킬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서울시가 이미 세운36구역의 재개발을 승인한 터라, 이를 취소하지 않는 한 철거는 불가피했다. 그 와중에도 중구청은 관광객들을 모아놓고 ‘을지유람’이라는 골목 투어 행사를 이어갔다. 그들은 신아주물이 서울의 문화유산이라며 취재해 가기도 했다. 김학률 사장은 화가 나서 그들에게 물었다. 한 쪽에서는 문화유산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또 한쪽에서는 그것을 부수려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돌아온 대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말뿐이었다.

왜곡된 사회 구조는 그들이 쌓아 올린 공동체와 기술 협업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대량 생산이 아닌 소량 제작, 기계가 아닌 손이 하는 작업, 작은 아이디어로 기술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던 세운3구역은 자본주의 개발 광풍에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하지만 김학률 사장은 여전히 협업의 힘을 포기할 수 없다. 그는 작업을 하다 풀리지 않는 기술적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주변 상인들을 찾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묻고 답하면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었다. 촘촘하고 넓은 관계망을 이용해 그들은 함께 기술적 해답을 찾아 나갔다. 굳이 술 한 잔 하지 않아도, 애써 읍소하지 않아도 그들은 늘 새로운 기술을 공유했고,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냈다. 청계천·을지로에 조성된 기술적 협업 생태계는 꼭 지켜져야 하는 것이었다.

김학률 사장은 아직 철거 이후의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45년간 지켜온 주물공장을 놓아버리자니 허망하고, 그냥 들고 있자니 무겁기만 하다.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고 해도 전체 고객의 60%를 차지하는 뜨내기 손님들이 사라져 버리니 공장 운이 만만치 않을 터다. 6개월만 버티면 오래 버티는 것이라는데, 그 시간을 견딜만한 맷집이 아직 남아 있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이 바닥을 친다. 그래도 만약 다시 주물공장을 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는 신아주물이라는 간판만은 꼭 달아놓고 싶다. 어떤 것도 함부로 사라지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다.


[출처: 김한주 기자]

# 태광정밀

두 달 전 태광정 조무호 사장은 집주인으로부터 내용증명을 받았다. 계약만료일이 다가오니 10월 30일까지 건물에서 나가달라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집주인이 아직 시행사에 토지를 넘기지 않아, 조무호 사장은 지금껏 장사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강제 퇴거 압박이 언제 닥칠지 몰라 여전히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청계천·을지로 일대의 공구 상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철거와 재개발은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조무호 사장은 8개월 동안 상인들이 시위를 했는데도, 방송 한 번 나오지 않는 것이 못내 답답했다. 시행사는 나이든 집주인들에게 강제수용을 운운하며 횡포를 부렸고, 감정평가사는 골목을 돌아다니며 세입자들의 이사비용을 책정했다. 감정평가사들은 공장을 한 번 쓱 둘러보고는 대충 가격을 매기고 돌아서곤 했다. 세입자들은 감정평가사를 고용할 권리조차 없기에, 그저 그들의 눈대중에만 매달려야 한다.

서울시는 청계천 공구상가 일대를 허물어 청년들에게 아파트를 공급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조무호 사장은 그들의 진짜 의중이 의심스럽기만 했다. 이곳에 새로 들어설 아파트의 평당 가격은 3200만 원 선. 게다가 평당 시세가 계속 높아지고 있는데 과연 어떤 청년들이 이 아파트에서 살 수 있을까. 그저 부동산 투기꾼과 있는 사람들 배불리는 정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장 두려운 것은 청계천 일대에 조성된 산업 생태계가 무너지는 것이었다. 이곳이 철거되면 주변의 인쇄, 전기전자, 주얼리, 미싱 가게들도 타격을 받을 게 분명했다. 대학교 연구소와 학생들, 연구 개발자들에게는 소규모 생산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사라지는 것이기도 했다.

태광정밀에는 대학생 손님이 많이 드나들었다. 얼마 전에는 어떤 학생이 찾아와 의자 도안을 내었다. 문래동부터 청계천 일대를 다 돌아다녔는데도 제작을 맡아주지 않아 이곳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조명이나 가구를 디자인하는 학생들은 도안을 가지고 종종 태광정을 찾았다. 금속 공예를 하던 한 대학생도 기억에 남는다. 조무호 사장은 그에게 졸업작품에 들어갈 손잡이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가 지금은 어엿한 대기업 회사원이 된 것이 이상하게 자랑스러울 때가 있다.

조무호 사장은 탁자와 의자, 조명과 같은 가구부터 낚싯대, 커피머신, 피자메이커까지 형태나 크기와 관계없이 다양한 물품을 만들어냈다. 병원 의료기계나 LG화학 같은 대기업이 의뢰한 기계 부품들도 만들었다. 사막에서 돔을 팔 때 쓰이는 구리스 펌프도 제작했다. 그가 의뢰받은 물건들은 주변 상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완성품의 모양을 갖췄다. 구리스 펌프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방에서 재료를 공급하고, 칠방에서 색을 입히고, 빠우방에서 광내는 작업을 두루 거쳐야 했다. 이 모든 공정은 500m반경에서 이뤄졌다. 이곳 공구 상가들이 철거된다는 것은, 청계천의 협업시스템이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시절에는 ‘가든파이브’라는 건물을 재개발 대체부지로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술자가 몇 없어 협업이 이뤄지지 않는 그곳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분양가가 저렴한 것도 아니었다. 이명박 전 시장 시절, 8000만 원에 분양하겠다던 가든파이브는 오세훈 전 시장 시절 2억 원으로 올랐다. 호텔처럼 화려하게 지은 그 건물은 땅을 파 기계를 놓고, 쇳물을 끓이는 공구 상인들의 작업장으로는 맞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는 상인들이 함께 이주할 수 있는 대체부지를 고민하긴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번듯한 고층 아파트 건설에만 혈안이 돼 있을 뿐, 상인들의 이주 대책은 뭐 하나 나온 것이 없었다.

조무호 사장은 84년 청계천에 들어온 뒤, 36년간 이곳에서 기술자로 일했다. 주변의 다른 기술자들도 대개 30~40년의 경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오래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을 상상하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는 장인들이었다. 조무호 사장 자신도 여러 도전을 경험해 왔다. 1995년에 그가 만든 로봇이 코엑스에 전시돼, 당시 삼성 부회장이 500만 원에 그것을 사가기도 했다. 그들은 동네의 외관처럼 낡고 녹슨 기술자들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이 오래된 기술을 이어받기를, 그래서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의 그들이 옛 상인들의 기술을 전수받았던 것처럼, 조무호 사장은 청년들에게 다양한 기술을 알려주고 그들과 협업하는 미래를 상상하곤 한다.


[출처: 김한주 기자]

# 광신공업사

광신공업사 이건 사장은 최근 눈물이 부쩍 많아졌다. 청계천 공구상가에서만 30여 년. 그 긴 세월의 자취가 한 순간에 무너질 것을 생각하면 눈물부터 났다. 아직 한국사회가 독자적인 기술력을 확보하지 못했던 시절, 그는 지금의 대기업들과 함께 세운상가 주변에서 기술을 익히고 개발했다. 지금에 와서야 사람들은 청계천·을지로 일대의 제조업 공장이 시대에 뒤처진 죽은 산업이라 손가락질 하지만, 이는 사정을 모르고하는 소리다. 청계천·을지로는 예나 지금이나 제조업의 기틀을 다지고 새로운 기술을 상상해내는 실험실이었다. 이건 사장은 어린 시절부터 쇠를 만지는 것이 좋았다. 스무 살 무렵, 지인이 운하는 양복점에 재단사로 취업했지만 적성에 맞질 않았다. 반년이 채 되지 않아 양복점을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먼 친척이 운하던 을지로의 ‘광신사’라는 공장에 취업했다. 쇠를 조각하는 조그마한 가게다. 무슨 소질이 있어서인지, 그는 그저 쇠를 만지는 것이 좋았다. 일이 재밌으니 기술도 금방 익혔다. 특별히 기술력을 쌓아야겠다는 욕심을 부린 적이 없는데도, 기술을 터득하는 기간이 남들보다 월등히 빨랐다. 그래서 그는 14년 만에 친척으로부터 지금의 광신공업사를 물려받았다.

이건 사장이 기억하는 청계천·을지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일자리를 만들고 나누는 곳이었다. 혈혈단신 돈 한 푼 없이 상경해도, 손수레 하나만 있으면 이곳에서 먹고 살 수 있었다. 조그만 자투리 공간들을 찾아낸 사람들은 작은 공장을 열었다. 동대문 평화시장, 남대문시장, 종로 귀금속 거리, 을지로 인쇄거리 등이 들어서면서 청계천·을지로 일대의 공구상가들도 활기를 띠었다. 작은 기계 한 대면 만들지 못할 것이 없었다. 이건 사장 또한 기계부품과 철도 부품부터 회사 로고, 벨트나 가방에 들어가는 장식품까지 다종다양한 물건을 만들어냈다. 쇠로 만드는 것이라면 뭐든 가능했다. 만약 가능하지 않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완성품이 나오려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다. 골목에 늘어선 조그만 공장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특성과 전문성을 갖고 있었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은 옆집에서 맡았고, 제품 한 개를 만들려면 최소 대여섯 집의 분업이 필요했다.

청계천·을지로 공구 상인들은 수십 년간 협업하고 기술을 공유해 왔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찾아와 기술자들과 직접 소통하며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은 청계천·을지로 지역이 유일했다. 부수고 없애지 않아도 이 지역을 재생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하지만 지자체와 정부는 그저 이 지역을 지우려고만 했다. 이건 사장은 수십 년 전부터 이 지역이 재개발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동네가 너무 허름하고 낡고 더럽다는 것이었다. 재개발에 대한 기대가 커지니, 집 주인들은 굳이 낡은 건물들을 수리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부가 이 지역에 고도제한을 적용한 탓에, 물새는 지붕 하나 고치기도 쉽지 않았다. 동네는 점점 더 낡고 허름해져 갔다. 상인들이 이곳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삶을 꾸려왔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낡고 허름함에 대한 거부감은 그것들을 가장 먼저 지웠다.

이영건 사장은 이렇게 빠르게 재개발이 진행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입자 입장에서는 토지 소유가 시행사로 넘어갔는지 여부도 알 길이 없었다. 앞 동네 사람들도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단번에 내쫓겼다. 마지막 이사를 나가는 날, 그저 기계만 멀뚱히 쳐다보고 있던 상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이영건 사장의 공장에도 최근 감정평가사가 찾아왔다. 집 주인으로부터 11월 말에 계약이 만료되며, 이후 시행사로 소유주가 넘어간다는 전화도 받았다. 매일 한 번씩 이건 사장의 마음이 덜컥거린다. 철거와 이주, 파괴와 해제의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우선은 죽어라고 버텨 봐야지, 같이 모여 있지 못할 바엔 죽어라 싸워야지. 이건 사장은 이런 다짐을 하며 긴 겨울의 시작을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