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사람들: 신진정밀, 한도공업사

[이슈_ 힙지로의 속사정]

[출처: 윤지연 기자]

# 신진정밀

신진정밀 김영남 사장은 종종 청계천·을지로 공구상가를 둘러본다. 김 사장은 그곳에서만 삼십여 년 넘게 공장을 운해 온 동네의 터줏대감이었다. 그 긴 세월동안, 매일 아침저녁으로 들락거렸던 좁은 골목길과, 낮은 건물들과, 그곳의 사람들과, 그리고 여덟 평 남짓한 신진정밀 공장은 어느새 마법처럼 사라져 있었다. 오래된 그들의 터전에는 펜스가 둘러쳐졌고, 매일 흙먼지가 날렸다. 사람들은 그곳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라고 했다.

김 사장은 청계천·을지로 재개발 사업으로 지난해 12월 세운3구역에서 쫓겨났다. 오랜 고심 끝에 그는 문래동에 신진정밀 간판을 달았다. 공장은 이전했어도 십 수 년 간 손발을 맞췄던 공구 상인들과 거래처는 아직 그곳에 남아있었다. 문래동 신진정밀에서 을지로 공구상가까지는 지하철과 도보로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김남 사장은 매번 그 아득해 보이는 거리를 오가곤 했다. 예전 같았으면 삼 분이면 해결할 수 있었던 업무들이 세 시간으로 훌쩍 늘어났다. 길에 버려지는 시간도 씁쓸했지만, 굴삭기가 파헤쳐놓은 허허벌판을 무기력하게 바라봐야 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김영남 사장은 청계천·을지로 공구상가에서 유명인으로 통했다. 신진정밀에서 한국 최초 우주비행사인 이소연 씨의 신체변화를 측정했던 ‘등고선 촬영기’가 제작됐기 때문이었다. 언론은 종종 취재를 나왔고, 그의 인터뷰가 실릴 때도 있었다. 중구청은 자신들이 운하는 ‘을지유람’의 게스트로 그를 초대하곤 했다.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골목들, 그곳에서 거미줄처럼 엮여 서로가 서로의 기술을 공유하고 협업하는 공구상인들의 모습은 꽤 특색 있는 관광 상품이었다. 중구청의 안내에 따라 많게는 수십 명의 관광객들이 청계천·을지로 공구상가의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한 달에 두 번, 그는 관광객들 앞에서 을지로의 역사와, 공구 상인들의 협업 과정과, 그렇기 때문에 더 없이 단단해진 기술력에 대해 떠들었다. 아무리 허름하고 보잘 것 없이 보여도, 이곳은 오래된 장인들이 서로의 기술력을 나누고 보태며 제조업의 토대를 만들어가는 곳이라고. 돈 한 푼 받지 않는 자원봉사지만, 김남 사장은 기꺼이 시간을 내 사람들 앞에 섰다. 백 번, 천 번을 이야기해도 입이 아프지 않을 만큼, 이곳은 평생의 자부심이었다.

실제로 을지로는 기술 개발의 시작점이자, 개발자들의 실험실이었다. 개발자들은 을지로 상인들을 찾아와 기술 개발을 의뢰했다. 기계 도면을 연필로 스케치해 온 사람도 있었고, 그냥 와서 말로 떠드는 사람도 있었다. 상인들은 어떤 개떡 같은 기술 의뢰도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뚝딱뚝딱 만들었다. 외국에서 수억 원에 들여와야 하는 기계들도, 이곳에선 일이백만 원이면 충분했다. 상인들은 새로운 기계들이 대량 생산 되기 전, 최초의 표본을 찍어내는 사람이었다. 김남 사장은 80년대 초반, 청계천에 흘러들어와 30여 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때만 해도 을지로의 좁은 골목길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조그만 쇠붙이 하나를 깎는 일도, 부품 하나를 사는 일도 이곳 공구상가들을 거쳐야 했다. 김 사장은 범용선반, 링과 CNC선반 등의 기계로 부품을 만들었다. 소방관이 입는 방호복 원단을 테스트하는 단열 센서부터, 대형 식당의 소독수 생성기 등을 제작했다. 여러 새로운 기술과 기계들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아무리 낡고 허름한 동네라고 해도, 아는 사람들은 알 것이라 생각했다. 상인들이 깎고 다져온 수많은 기술이 한국사회 제조업의 기틀이 돼 왔다는 것을.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부와 지자체는 이 사실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2017년 가을부터 세운3-1,4,5 지구가 강제 철거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감정평가사와 시행사 직원들이 골목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녔다. 재개발이라는 이름의 그 사업은 파괴와 철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김 사장을 비롯한 상인들은 중구청과 서울시를 바쁘게 오갔다. 이렇게 단번에 사람들을 쫓아내는 건 아니라고, 적어도 우리가 모여 작업할 수 있는 이주 공간은 만들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호소했다. 하지만 관광객들 앞에서 그에게 마이크까지 쥐어줬던 중구청의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구청은 시청으로 가라고 했고, 시청은 구청에 가서 따지라고 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퇴거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공장을 비우지 않으면 3억 대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고지서가 매주 날아왔다. 김 사장은 버티고 버텼다. 국토교통부 중앙토지수용위원회에 이의제기도 수차례 넣었다. 하지만 어떠한 정부 기관도 그들에게 버팀목이 되지 못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던 지난해 12월, 결국 김 사장은 세운3-4구역을 떠났다. 수십 년을 함께 일했던 상인들은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다. 더 열심히 싸워서,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모였다면 달라졌을까. 오래된 기억과 고민들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또 다시 강제 철거를 목전에 둔, 그곳에 남은 상인들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남는다.

[출처: 윤지연 기자]

# 한도공업사

청계천 한도공업사라고 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시절이 있었다. 한도공업사는 청계천 일대의 헤라시보리 가공 업체 1호점으로 이름을 알린 곳이다. 그곳의 곽한득 사장은 스무 살 나이에 청계천 헤라시보리 공장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이 손에 익기도 전에 입대를 했고, 전역 후에는 청계천에 있는 한 인쇄소 공장에 취업했다. 하지만 월급 9만 원으로는 살기가 팍팍했다. 배운 것도 부족하고,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던 나이었다. 결국 그는 다시 헤라시보리 공장으로 돌아가 기술을 배웠다. 결혼을 앞두고 가게도 열어봤지만 녹록치 않았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봐도, 결국 그는 헤라시보리 공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다 1990년 한도공업사로부터 입 제안을 받았다. 꼬박 13년간 그곳에서 종업원으로 일을 하다, 2003년에 공장을 인수했다. 그가 한도공업사와 같이 한 세월만 29년이었다.

스마트폰과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한도공업사는 도로교통표지판 부속품을 생산하는 일을 도맡아했다. 직접 현장에 나가 도로 중앙분리대를 용접해 설치하는 작업도 했다. 프레스와 헤라시보리만 있으면 못 만들 물건이 없었다. 각종 기계 부품을 비롯해, 커피 머신, 촛대, 냄비, 성당에서 사용하는 향로 걸이 등 다종다양한 물건을 다뤘다. 단골 거래처와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손님들로 공장은 늘 북적였다. 적어도 지난해 세운 정비구역에서 쫓겨나기 전만 해도 그랬다.

곽한득 사장은 지난해 10월, 29년간의 터전이었던 세운3구역을 떠났다. 물론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서울시와 시행사는 해당 부지에 고층 아파트가 지어질 것이라 했다. 일 년 넘게 버텨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곽 사장은 그 당시 세운3구역에서 쫓겨나온 과정을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지난해 2월부터 세운3구역에 재개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5월부터는 감정평가사가 골목을 돌아다니며 곧 재개발에 들어갈 것이며, 7월 말부터 1차 이주가 시작될 것이라고 떠벌렸다. 시행사는 골목 상인들 중 몇 명에게만 정보를 흘렸다. 시행사와 접촉했던 몇몇 상인들은 매일 아침 골목에 나와 다른 상인들에게 알음알음 정보를 건넸다. 보상금이 얼마라더라, 빨리 도장을 찍지 않으면 보상금조차 받지 못한 채 쫓겨난다더라,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골목을 떠다니는 소문들은 불안감을 키웠다. 심리전은 꽤 유용하게 먹혔다. 불안에 떨던 상인들이 한두 명씩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곽 사장은 매일 아침 속닥이는 소리들을 견디기 힘들었다. 십 수 년 간 매일 얼굴을 맞대고, 기술을 공유하며 살아온 상인들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골목길의 흉흉한 소문을 따라 장사꾼들도 꼬다.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는 상인들 어깨너머로 동네 법률사무소 직원들이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변호사 선임을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떠들어댔다. 강제 철거를 처음 겪게 된 상인들 수백 명이 우후죽순처럼 변호사 사무실과 계약을 맺었다. 별도의 계약금과 함께, 보상금의 15~20%를 변호사에게 지급한다는 계약이었다. 상인들은 법과 제도에 있어서 아무런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변호사 선임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상인들은 계약해지를 요구했다. 일인당 수십 만 원에 달하는 계약금만 날린 셈이었다.

지난해 11월에서 올해 1월까지, 이 구역에서 업을 했던 350개의 공장이 강제철거를 당했다. 그들 중 약 11%는 폐업을 결정했다. 이주를 준비할 시간조차 촉박했다. 곽한득 사장은 이주할 공간을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임대료를 줄여보고자 경기도 외곽 쪽으로 눈을 돌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지역에 덜 남겨질 생각을 하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었다. 결국 세운3구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림동의 빈 공간을 찾아냈다. 10년 넘게 방치된 그 공간을 쓸고 닦고 수리하는 데만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가장 큰 문제는 기계를 옮기는 것이었다. 프레스와 각종 금형들, 무수한 짐들은 도비꾼을 고용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헤라시보리를 옮기는 작업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았다. 헤라시보리는 기본적으로 땅속에 묻어야 하는 기계다. 예전에는 콘크리트를 둘러 기계를 묻었지만, 그나마 요즘에는 볼트를 땅에 박아 고정시키는 방법이 일반적이었다. 그럼에도 사람 혼자 땅을 파내고, 볼트를 박고, 기계를 고정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헤라시보리를 설치하는 데만 꼬박 3개월이 걸렸다. 이주할 때 보상받았던 영업비용과 이사비용은 자리를 채 잡기도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곽한득 사장은 그 때 같이 강제 이주 된 상인들의 소식을 종종 듣곤 한다. 모두 자신처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 쉬울 리 없었다. 갑작스런 이주로 기존 거래처들과의 거래도 끊겼고, 이주 사실을 모르는 단골들도 꽤 있을 터다. 이러다 굶어 죽겠다, 싶은 나날들만 지겹도록 이어지고 있었다. 어떤 대책도 없이, 그저 낙후된 지역을 부수고 죽이기만 하는 중구청과 서울시가 참을 수 없이 미웠다. 수십 년 쌓아 온 제조업의 기초와 기반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셈이었다.

곽 사장은 요즘도 세운3구역을 종종 드나든다. 그 때마다 속이 쓰린 것은, 그나마 자신이 살았던 동네 사진 몇 장 정도는 찍어둘 걸 하는 후회 때문이었다. 그 때 그 전경과 추억, 풍경, 그리고 무수한 사람들이 다져놓은 기술들은 기록되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 터다.

[출처: 윤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