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 위의 간호사, 민주노총 첫 여성 부위원장

[이슈_여성은 노조위원장 하면 안 돼요?]박문진 영남대의료원 해고노동자 인터뷰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지난 12월 23일. 항암 투병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긴 발걸음을 시작했다. 김 지도위원은 자신의 SNS에 “내 친구 박문진이, 내 오랜 친구 박문진이 영남대의료원 옥상에서 176일째 매달려 있으니 앓는 것도 사치라 걸어서 박문진에게로 갑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부산 호포에서 대구 영남대의료원까지, 100km가 훌쩍 넘는 길을 걸어 박문진을 만나러 간다는 것이었다.

그의 오랜 친구 박문진은 영남대의료원 해고노동자다. 지난 2019년 7월 1일, 노조탄압 진상조사와 해고자 복직 등을 요구하며 영남대의료원 옥상에 올랐다. 70m높이의 병원 옥상에서 텐트를 치고 그해 여름과 겨울을 났다. 12월 23일은 그가 고공농성에 돌입한 지 176일째를 맞은 날이었다.

[출처: 김한주 기자]

입바른 간호사, 입사 2년 만에 노조 위원장으로

“그럭저럭 견디고 있어요. 겨울이 되니 어깨와 허리가 조금 아픈 정도랄까요.” 반년이 넘은 고공농성에 몸이 꽤 상했을법한데도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은 대수롭지 않은 듯 괜찮다고만 했다. 드문드문 끊기는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쾌활하다. 올해 노동운동 31년차의 여성노동자 박문진은 변함없이 뜨겁고, 견고했다.

나이팅게일의 전기를 읽고 간호사를 꿈꿨던 청년 박문진은 1988년 대구 영남대의료원 간호사가 됐다. 아프리카로 봉사활동을 떠날 생각에 매일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20대 후반의 그가 맞닥뜨린 병원 현장은 생각 보다 훨씬 혹독했고, 부당했다. 33년 전에도 병원 내에 존재했던 ‘태움’ 문화, 선후배 간의 군대식 위계질서와 의사 및 관리자들의 횡포, 그 모든 것들이 견디기 힘들었다. 선배들의 말은 법이자 진리였고, 후배 간호사들은 언제나 주눅 들어 있었다. 간호사 박문진은 굳이 참지도, 주눅 들지도 않았다. 언제나 입바른 소리를 했고, 일찌감치 ‘건방진 후배’로 찍혔다. 선배들에게는 ‘건방진’ 존재였지만, 동기와 동생들에게는 ‘노조 위원장’ 감이었다. 그래서 노조 위원장으로 추대를 받았고, 1990년 덜컥 영남대의료원 노조 위원장이 됐다. 입사한 지 고작 2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때만 해도 박문진 씨는 알지 못했다. 아프리카로 의료 봉사활동을 훌쩍 떠나려던 그의 꿈이, 무려 30년 넘게 유예될 줄은.

‘악법은 어겨서 깨뜨린다’

1995년, 노조는 병원노련(현 보건의료노조)의 공동교섭 요구안을 갖고 병원과 임금 및 단체협약 교섭에 나섰다. 인력 충원과 의료민주화, 임금인상, 나이트(밤 근무) 제한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교섭은 번번이 파행됐고, 결국 노조는 파업에 돌입했다. 병원은 노동 위원회에 직권중재를 요청하며 맞섰다. 당시만 해도 노사 중 한쪽이 직권중재를 요청하면 쟁의행위가 금지 됐다. 또한 노동위원회가 내놓은 중재안은 단체협약과 같은 수준의 효력을 발휘했다. 직권중재제도는 노동자의 파업을 가로막는 정부와 자본의 거대한 무기였다. 하지만 노동위의 중재안은 사측 편향적이었고, 노조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이었다. 박문진 위원장은 중재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막 뜨겁게 끓고 있는 파업에 찬 물을 끼얹을 순 없는 일이었다. 특히 그에게는 ‘악법은 어겨서 깨뜨린다’는 패기와 고집이 있었다. 중재안이 나온 이상 파업은 더 이상 ‘합법’일 수 없었지만, 이들은 ‘정당한 파업’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파업은 무려 50일간 이어졌다.

그해 8월 18일 새벽, 경찰 공권력이 투입됐다. 병원에서 파업 농성을 이어가던 300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공권력 투입을 막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들은 자신만만했고, 또 투철했다. 경찰은 이들의 머리채를 잡았고 옷을 찢었고 내동댕이를 쳤으며, 담뱃불로 지지기도 했다. 무자비한 진압에도 이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공권력 투입 이후 재파업을 조직했고, 실제 20일간의 재파업을 성사시켰다.

민주노총 첫 여성부위원장

1995년 파업 당시, 박문진 씨는 영남대의료원 노조 위원장과 병원노련 위원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병원노련은 현 보건의료노조의 전신으로, 90여 개의 병원 사업장 노동자들이 소속돼 있는 노동단체였다. 영남대의료원에 노조를 결성한 지 고작 5년 만에, 병원노련 임원과 중앙집행위원들은 박문진 씨를 병원노련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서른다섯의 나이였다.

그리고 서른다섯의 나이에 그는 감옥에 갇혔다. 파업 진압 당시 경찰에 연행된 후 곧바로 구속이 됐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는 감옥 안에서 민주노총이 출범했다는 사실과 그가 민주노총 초대 부위원장으로 선출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민주노총의 첫 여성부위원장이었다.

그가 석방된 해인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가 7분 만에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부터 다음해인 97년 1월 18일까지. 민주노총은 24일간 노개투(노동법개정투쟁) 파업을 벌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50년 만의 첫 정치 총파업이었다.

박문진 부위원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당시 총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검찰은 박문진 부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노총 지도부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수배 상태가 된 박문진 부위원장은 두 달 넘게 명동성당 농성장을 떠나지 못했다. 홀로 여성이었던 그가, 남성 간부들과 좁은 텐트에서 함께 농성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춥고 불편한 생활들이 또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꿈같은 시간들이었다. 총파업 기간 동안 민주노총 조합원 81%가 한 번 이상 파업에 참여했다. 하루 평균 5만 명이 시위를 벌였고, 약 30일 동안 150만 명이 집회에 참여했다. 박문진 지도위원은 그 시절을 “아주 생명력 있고, 탄력적이고,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

고공농성, 그리고 마지막 헌신

90년대, 병원의 여성노동자들은 노조를 결성해 많은 것을 바꿔냈다. 당시만 해도 간호사의 정년은 스물여덟 살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일터를 떠나야 하는 ‘결혼퇴직제’는 간호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비밀리에 결혼을 하는 간호사도 있었다. 노조는 결혼퇴직제를 비롯한 정년 문제를 해결했고, 생리휴가제 쟁취를 위해서도 투쟁했다. 간호사들을 ‘미스박’, ‘미스김’으로 부르곤 했던 호칭을 바꾸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지금은 간호사뿐 아니라 병원 내 모든 노동자들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

의료공공성 쟁취를 위한 싸움에도 열성적이었다. 조합원들은 돈이 없어서 환자들이 병원을 가지 못하는 사회가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의료 제도 개혁 투쟁을 비롯해 과잉진료를 금지하고 환자 인권을 보호하는 여러 조치들을 쟁취해 냈다. 보호자 침대와 샤워실까지도 사실 노조가 얻어낸 것들이었다.

박문진 지도위원이 올해 7월, 또 다시 고공농성에 오른 이유는 30년 청춘을 바쳤던 노조가 깨지고 파괴됐기 때문이었다. 2006년, 영남대의료원은 노조파괴 전문 노무법인인 ‘창조컨설팅’과 계약을 맺었다. 당시 창조 컨설팅의 노조파괴 시나리오로 950명이던 조합원이 70명으로 줄었다. 박문진 지도위원을 비롯한 송영숙, 곽순복 등 세 명의 노동자는 해고가 됐다. 햇수로 15년 째. 노조파괴를 둘러싼 지난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노조 활동을 하려면 폭력과 해고, 구속을 감수해야 해요. 이것만큼은 정말 사라져야 합니다. 해고로 노동자의 삶이 파탄 나는 세상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년 2년을 앞두고 고공에 오른 그는 30년 노동운동의 마지막 헌신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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