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건 마지막 투쟁, 두려울 게 있겠어요?

[르포]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이재용 씨의 20여 년 복직투쟁 이야기

지난해 6월 10일, 삼성 본관 인근 강남역 사거리 철탑 위로 사람이 올랐다. 삼성에서 근무하다 해고돼 24년 간 복직투쟁을 해온 김용희 씨였다. 정년을 한 달 남겨두고, 그는 0.5평 가량 되는 20m CCTV 철탑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그는 삼성에서 노동조합을 만들다가 해고된 노동자의 복직과 삼성의 사과, 해고기간 임금 지급 등을 요구하고 있다. 12월 26일 고공농성 200일을 앞두고 많은 노동·사회단체와 시민들이 삼성 측에 문제 해결을 요구했지만, 삼성은 묵묵부답이었다.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이재용 씨가 삼성에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만들고자 했던 이유와 해고과정, 고공농성을 선택하게 된 이유와 바람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필자 주>

해결되지 않으면 살아서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삼성은 노동조합 인정하고 해고자 복직 이행하라”

“범죄자 이재용을 구속하라”


12월 11일 저녁 강남역 네거리. CCTV 철탑 위에서 빨간색 조끼를 입은 사람이 확성기를 들고 구호를 외친다. 24년 전 삼성에서 해고된 김용희 씨다. 이날은 김용희 씨가 삼성에 복직과 사과를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시작한 지 185일 되는 날이다. 단식농성 8일 차에 고공농성을 시작한 김용희 씨는 55일 고공 단식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출처: 김한주 기자]

이틀 간 위기경보까지 내려졌던 미세먼지가 걷히자 다시 추위가 시작된다. 용희 씨는 철탑 위에서 미세먼지와 자동차 매연, 그리고 추위를 견디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잠시 후 문화제가 시작되자 철탑 위에서 작은 불빛이 차가운 바람에 흔들린다.

“채 한 평도 되지 않는 공간에서 몸을 웅크리고 지내는 시간이 185일 정도가 되면 원래 움직여야할 만큼의 관절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해질 수 있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걱정되는 것 중 하나가 심혈관계 질환이라고 하는 것인데, 특히 지금 혼자 위에 계신 상황에서 심혈관계 질환은 굉장히 응급 상황이고 무서운 상황이잖아요. 혼자 계시다가 어떤 일이 나지 않을지 밑에서 계속 걱정하고 있습니다.”

문화제에 참석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김도연 씨는 잠깐 밑에 서있는 것도 이렇게 추운데, 김용희 씨는 그 긴 시간을 위에서 혼자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김도연 씨는 김용희 씨의 진료를 하지는 못하고 있다. 김용희 씨가 진료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4일 차가 되는 12월 20일, 김용희 씨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김용희 씨가 “고생이랄 게 있겠습니까. 마음 놓고 농성할 수 있는 게 감사할 따름입니다”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원래 ‘아나운서 목소리’인데 미세먼지 속에 하루 세 번 5시간 씩 선전전을 했더니 목이 쉬었다며 웃기도 한다.

“살은 많이 쪄서 단식 전 몸무게로 돌아왔습니다. 혈액순환이 안 되는 것 말고는 건강상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여름 단식농성 중에 나타났던 일시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증상이 나타났는데, 최근에는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은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종종 오른쪽 어깨에 마비 증상이 오곤 하는데, 여름에 비하면 오른쪽 반신마비도 꽤 호전됐다고 한다.

용희 씨의 키는 1m 80cm다. 하지만 철탑 지름은 1m 20cm에 불과해 잠을 잘 때는 몸을 구부리거나 다리를 철탑에 걸쳐야 한다. 틈틈이 다리운동을 한다고 하는데, 쉽지 않아 보인다. 식사는 점심과 저녁 두 끼가 올라오는데, 점심을 조금 먹고 저녁은 남겼다가 다음날 아침에 먹는다. 움직임이 제한되니 소화도 안 되거니와 입맛도 없다고 했다. 선전전 하는 시간 외에 낮 시간에는 책을 보고 밤에는 라디오를 듣는다. 휴대폰은 용희 씨를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도구다. 용희 씨는 건강상 특이사항이 없다고 했지만, 필자에게는 모든 것이 특이사항으로 느껴졌다. 통증이나 불편함을 못 느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진료를 거부하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

“올라올 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살아서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아직 해결 되지 않았는데 의사 소견으로 ‘더 이상 철탑 위 농성이 무리다. 당장 치료 받아야 하니 내려오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죽는다 해도 모르고 죽는 게 나은 거죠. 내려가면 건강하게 살다 죽어야 하는데, 가족들 고생시킬까봐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추위를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물으니 겨울에 삼성 이건희 회장, 이재용 부회장 집 앞 등 더 추운 곳에서도 침낭 하나에 의지해 한 달 농성도 해봤다며 거기에 비하면 여기는 호텔이라고 한다.

“방법 있겠어요? 추위도 더위도 즐겨라. 걱정 없습니다.”

손가락이 절단되었는데 병원 가지 말라는 삼성

용희 씨가 삼성에 입사한 것은 25살이 되던 1985년이다. 비행기 엔진과 시계정밀 사업을 하던 창원 삼성항공에 입사하자 용희 씨의 아버지는 ‘삼성에 들어갔다’고 동네잔치를 했다. 용희 씨는 시계사업부에서 품질관리 업무를 했다. 입사할 때만 해도 평범한 직장 생활을 기대했던 용희 씨는 자신이 노동조합을 설립하다가 해고돼 60세까지 투쟁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삼성에서 일해 보니 밖에서 보는 것과 너무 달랐어요. 돈 많이 주는 게 공짜가 아닌 거예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죠. 현장에서는 화장실 가는 것도 반장한테 허락을 맡고 가야했어요. 두발 단속까지 하고 분위기가 군사문화에요. 공장장이 야간에도 기숙사 감시를 했습니다. 야간에 경비가 피곤해서 잠깐 잠을 잤다고 잘라요. 직장예비군 편성 카드 작성을 안했다고 부장이 저한테 ‘이 새끼’ 하면서 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인사과 등에서는 용희 씨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감시하고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 날, 용희 씨가 아침 일찍 출근을 한 날이었다.

[출처: 김한주 기자]

“과장 자리로 전화가 와서 받았어요. ‘삼성시계 생산1과냐?’고 우는 소리로 물어요. ‘우리 남편 손가락이 절단되었는데, 왜 집에 방치 하냐? 언제 치료를 받게 할 거냐?’ 야간에 손가락이 절단되었는데, 회사 안전 담당이 병원에 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했다는 겁니다. 수건을 감고 있는데 피가 철철 난다고 해요.”

너무 놀란 용희 씨는 곧바로 자신의 차로 그 노동자를 산재병원에 데려갔다. 의사는 어제 다쳤는데 왜 이제 왔냐고 했다. 그때 병원에서 들었던 산재를 당한 노동자의 고통스런 절규가 지금도 생생하다.

“회사에 가니 비상이 걸렸어요. 나는 잘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는데...인사과에서 나왔어요. 안전 담당이 따로 있는데, 니가 왜 병원에 데려갔냐고 해요. 무재해가 깨진 거잖아요.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삼성의 실체를 알고 처음에는 지옥과 같은 이곳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 계획이 실패하면서 죽을 생각을 할 만큼 절망을 하기도 했다. 바닥을 친 절망은 용희 씨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이때부터 잘못된 삼성 문화를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죽었다 살아난 목숨이에요. 하느님이 나에게 역할을 주기 위해 살게 하셨구나...”

1990년 용희 씨는 노사협의회 위원과 삼성그룹 경남지역 노조설립준비위원장을 맡아 노동조합 설립 준비를 시작 했다. 그리고 삼성의 집요한 회유와 감시, 테러도 시작됐다.

“삼성시계에서는 광주에 대리점 차려준다, 집 사준다 하면서 회유했어요. 그래도 넘어가지 않으니까 새벽 4시 도로가에서 5명이 각목으로 머리를 쳤어요. 얼마나 다쳤는지 뼈를 발라내는 아픔이었어요.”

삼성시계는 용희 씨를 15일 간 납치해 노조 설립을 포기하라고 협박하고 가족들에게까지 회유와 협박을 했다. 그 과정에서 김용희 씨의 아버지는 유언장을 남기고 행방불명 됐고, 그의 아내는 삼성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경찰에게 큰 고통을 당했다. 삼성이 용희 씨의 가족에게 가한 고통은 20년이 넘어도 가슴에 큰 상처로 남아있다.

김용희 씨가 노조 설립 활동을 계속 하자 삼성은 1991년 성추행 사건을 조작해 징계해고 했다. 1993년에 진행된 해고무효확인소송 항소심 재판은 당시 문재인 변호사(현 대통령)가 성추행 사실이 없다는 공증서를 법원에 제출하지 않아 패소하게 된다. 1994년 해고무효확인소송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삼성 측은 상고 취하서 작성을 조건으로 김용희 씨와 계열사에 1년 근무 한 후에 원직복직 시키겠다는 합의를 한다. 그리고 용희 씨를 삼성건설(삼성물산 건설지부 러시아 스몰롄스키 지부)로 발령을 냈다. 하지만, 삼성은 계속해서 김용희 씨에게 노조포기를 강요하며 폭력과 복직합의서 갈취, 간첩 누명을 씌워 고발하는 등 온갖 방법으로 괴롭혔다.

용희 씨는 1995년 단식농성 등의 투쟁을 통해 어렵게 한국에 귀국했지만, 삼성 사측은 약속했던 원직복직을 이행하지 않았다. 김용희 씨는 해고통지서도 없이 해고를 당했다고 이야기한다. 그 후 용희 씨는 삼성 본관 앞에서 단식농성 등의 복직 투쟁을 하다가 두 차례 구속되기도 했다. 그리고 정년을 한 달 앞둔 지난 6월 10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용희 씨는 죽음을 각오한 마지막 싸움으로 선택한 고공농성인데, 두려울 게 뭐가 있겠냐고 했다.

삼성은 노동조합 없이는 노동자가 살 수 없는 데구나

“밑에서 쳐다보는 마음이 너무 답답해요.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이렇게 오랜 시간 투쟁 하고 있는데도 삼성에서는 별 반응이 없다는 게... 김용희 동지는 삼성의 진정한 사과와 명예복직이 없으면 죽어서 내려올지언정 못 내려온다는 마음을 굳히고 있습니다.”

철탑 밑에서 지난 반 년 동안 김용희 씨의 고공농성을 지원하며 삼성본관 앞에서 천막 농성을 하고 있는 이재용 씨는 날씨가 추워져 걱정이 많이 된다고 했다. 이재용 씨도 김용희 씨와 마찬가지로 삼성에서 노동조합 설립을 시도하다 해고를 당했다.

“복직을 해서 단 하루라도 작업복 입는 것이 내 목표였는데, 그게 자꾸 희미해져가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삼성 부회장 이재용 씨와 이름이 같은 해고노동자 이재용 씨는 22년 간 삼성 복직투쟁을 해오고 있다.

“삼성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 삼성은 월급도 세고 근무조건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1986년 발전소에 들어가는 발전용 보일러를 생산하는 삼성중공업 창원 1공장에 입사한 재용 씨의 경험도 용희 씨와 다르지 않았다. 일하다 사람이 죽어도 무재해 달성을 위해 은폐하고, 비인간적인 직무직능급제를 도입해 노동자들 간에 경쟁을 부추겨 살인적인 노동강도를 유지하는 것이 삼성의 실체였다.

“저는 노동조합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여기는 노동조합 없이는 노동자가 살 수 없는 데구나. 그 필요성을 느끼고 주변 사람들하고 노동조합을 같이 만들려고 계속 해오다가 해고가 됐습니다.”

1992년 이재용 씨는 회사 노동자협의회에 출마해 위원장으로 당선됐다. 당시 노동자 직선제로 진행된 선거에서 노동자협의회를 노조로 전환하겠다는 한 가지 공약을 내걸고 출마한 재용 씨는 상당히 많은 표를 받고 당선됐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어요. 삼성에 이렇게 노조를 갈망하는 사람이 많았구나.”

지리산 계곡에 다녀 왔다고 간첩, 대공분실 11번 끌려가

그 후 삼성은 재용 씨가 노동조합 설립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 집요한 회유와 협박, 테러를 했다. 재용 씨는 삼성이 노동조합 설립을 막기 위해 쓰는 3단계의 전략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면담을 하면서 ‘좋은 부서로 보내주겠다. 특혜를 주겠다. 해외로 발령 내주겠다. 돈을 얼마 주겠다’고 회유하는 것이다.

“돈을 10억 줄 테니 회사 그만두고 나가라고 회유했어요. 현찰로 5억을 주고 가족들 전부 다 베트남에 가서 살도록 해주겠다고도 했고요.”

두 번째는 납치, 감금, 테러 전략이다. 납치를 해서 가두어놓고 “노조포기 각서를 써야 내보내주겠다. 안 쓰면 해고를 하겠다”고 협박을 하거나 테러를 하는 것이다. 재용 씨도 본인의 차 안에서 유리창을 깨고 들어온 각목에 맞아 중상을 입는 테러를 당했다. 재용 씨는 삼성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는데, 운이 좋아 살았다고 했다.

“마산 지역에 당구장이 하나 있었는데, 그 당구장 벽면에 당시 김정일 생일 축하 플랜카드가 걸린 거예요. 그게 지리산 쪽에서 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삼성이 노동자 탄압하려고 일부러 걸었을 수 있겠죠.”

재용 씨는 지인이 있는 지리산 계곡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그 플랜카드를 제작한 간첩 혐의를 받고 대공분실에 11번 끌려갔다 왔다. 상황판으로 머리를 맞고 전기고문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회유와 협박은 가족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딸이 초등학교 4학년 때 갑자기 학교를 안 가려고 해요. 왜 그러냐니까 학교에 가면 애들이 너희 아빠 빨갱이라고 다 놀린다는 거예요. 그때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어요. 아이들이 상처받으니까. 그런 부분 때문에 노조와 복직싸움을 포기하는 사람이 참 많아요.”

그런가하면 삼성은 수년 간 재용 씨에게 일을 주지 않는 방법으로 괴롭히기도 했다. 과장 책상 옆에 책상 한 개를 갖다 놓고 자리만 지키고 앉아있으라고 했고, 청소 노동자 한 명을 관리하라고 하기도 했다.

“너무 과다한 업무도 고통스럽지만, 아무 일도 안줘서 하루 종일 있는 것도 시간이 너무 안가기 때문에 그 고통이 심해요.”

어느 누구도 해고무효소송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도 노동조합 설립을 포기하지 않자 삼성은 마지막 3단계 전략을 실시했다. 그것은 해고였다.

“삼성은 법무팀이 굉장히 탄탄하게 꾸려져 있습니다. 해고 이후 법무팀에서 다 알아서 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해고무효소송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한사람 해고시키려면 1년 전부터 준비를 해서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게 있으면 다 기록을 해서 해고 준비를 합니다.”

[출처: 김한주 기자]

삼성은 성폭력 사건을 조작해 재용 씨를 해고하려고 했으나 삼성이 회유하려고 했던 여성노동자가 이를 거부하면서 실패했다. 그러자 삼성은 갑자기 재용 씨를 수원으로 발령을 냈다.

“나는 가정도 여기에 있고 그때 당시 치매로 오래 고생 하고 있는 어머니를 제가 모시고 있는 상태였어요. 제가 발령지로 갈 수 없다는 사유를 댔는데도 발령 날부터 15일간 무단결근 처리를 했어요. 그리고 딱 15일 되는 날 징계위원회에 회부했습니다. 그날 오후에 해고장을 받았어요.”

재용 씨가 수령을 하지는 않았지만, 삼성이 공탁 걸어놓은 재용 씨의 퇴직금은 15일 무단결근 해고로 절반만 지급돼 있었다.

노조 설립신고서를 들고 가면 3시간 전에 들어왔다고

그렇게 노조 설립을 위해 참고 견뎠건만, 이재용 씨도, 김용희 씨도 끝내 삼성에서 노동조합 깃발을 들지 못했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이랑 삼성중공업 1공장 2공장 노조 설립신고서를 같이 모아서 도청에 신고하러 가면 이미 설립 신고가 돼 있는 거예요. 3시간 전에 들어왔다, 어제 들어왔다고 해요.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도청에 이미 유령노조 조합원 명단하고 서류를 미리 준비해뒀다가 우리가 들어가는 순간에 도장을 찍고 보여주는 거예요.” (이재용)

복수노조가 허용되지 않던 1사 1노조 시절의 일이었다.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하고 해고가 됐기에 조직적인 연대투쟁 지원을 제대로 받을 수 없어 더 외롭고 힘들었던 지난 20여 년 간의 투쟁이었다.

재용 씨는 2013년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해당 위원회에서는 삼성중공업에 원직 복직을 권고하였으나 삼성중공업은 경영난을 이유로 아직도 복직 이행을 하지 않고 있다. 역시 올해 정년이 되는 재용 씨는 올해 해결이 안 된다 해도 삼성에게 사과를 받고 명예복직을 위해 투쟁을 계속 할 것이라 했다.

“후회는 하지 않아요. 해결되기 전까지 안내려갈 겁니다. 내가 죽으면 그건 삼성의 타살이죠. 우리 요구조건 관철시키고 내려가서 삼성이 무노조 경영 폐기하고 헌법에도 보장된 노동조합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삼성 계열사에 뿌리를 내리고 노동자들이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게 하는 일에 도움이 되고 싶어요. 삼성 7개 계열사 노동조합 조직률이 1%도 되지 않아요. 삼성의 범죄는 사회적 비용입니다. 시민들도 삼성의 범죄를 새롭게 받아들이고, 삼성 감시자가 되어 잘못된 부분에 대해 야단을 쳤으면 좋겠어요. 이재용 부회장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이 진행되고 있는데, 삼성은 해고노동자와 피해자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재판에 임해야 합니다.” (김용희)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만큼 삼성과 싸우는 게 힘들다는 얘기죠. 그렇다고 아무도 대응을 안 하면 삼성이 이런 나쁜 짓을 계속 하게 부추기는 것 밖에 안 됩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있어서 삼성의 만행을 일정정도 알려내는 효과가 있었다고 봐요. 처음에는 삼성에서 설마 그렇게 했을까 했던 사람들도 우리가 근거 자료도 내놓고 언론에도 나가고 하니까 이제는 ‘아, 정말이구나. 삼성이 잘못했다’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삼성 앞에서 농성하는 팀이 7~8팀 정도 돼요. 다 삼성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 이예요. 심지어 암 환자 분들도 와서 싸우고 있습니다. 삼성은 이런 걸 먼저 해결 하고 선처를 바래야 하는데, 그거보다는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까 하는 생각 밖에 안하고 있습니다. 삼성이 바뀔 때까지 제가 능력이 되는 한 싸울 겁니다. 김용희 동지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연대하는 분들이 걱정하는 마음을 생각해서 본인의 몸을 좀 더 생각하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삼성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들이 하루 빨리 다 해결 돼서 삼성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해요. 저도 다 해결되면 시골 가서 농사 지으면서 좀 쉬고 싶습니다.” (이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