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경제와 인간 생산

[페미코노미] 자본주의 경제를 바꾸기 위해 ‘생산’을 다시 생각하자


2020년 이제 페미니즘은 거리의 언어로까지 진전했다. 2015년 이후 한국 사회는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을 통해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진행되고 있다. 페미니즘은 모든 영역에서 그 가치와 세계관을 드러내며 더 다양한 영역으로 투쟁이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경제 영역에서는 최근에서야 페미니즘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은 경제와 경제학을 전체적으로 바꿔야 할 시점에 왔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본주의/신자유주의가 시장과 자유라는 이름으로 인간계와 동물을 포함한 자연계 전체를 억압과 착취와 수탈로 얼룩지게 만들고 있다. 새롭게 부상하는 페미니즘은 이러한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대안을 제시해야 할 위치에 있다. 비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할 페미니즘은 ‘경제’의 영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경제를 전환하고 대안 경제를 제안할 사상을 ‘페미니즘 경제’라 불러보자.

‘경제’의 정의는 재화와 용역의 생산·소비·분배를 뜻한다. ‘페미니즘 경제학’은 이 정의부터 잘못됐음을 지적해야 한다. 경제는 ‘재화와 용역’의 생산·소비·분배를 넘어서야 한다. 경제를 뜻하는 서양의 ‘오이코노미아’나 동양의 ‘경세제민’의 사상 또한 재화와 용역에만 머무는 말이 아니다. 경제는 삶의 전반적 영역, 살림의 영역을 포함한다. 지금까지의 정의를 의심해야만 우리 삶의 전환 또한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페미니즘 경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경제’ 영역과 그 너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경제학의 과제로 ‘생산’을 다시 불러내 보자. 특히 여성의 생산을 불러내고 그중에서도 ‘인간 생산’을 불러내자. 근대 자본주의 경제는 노동자계급에 의존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여성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로 자본주의를 정의하고 자본-노동의 관계를 ‘생산 관계’라 부르며 이 관계가 ‘착취적’임을 밝히고자 한다. 하지만 생산 관계를 이렇게 정의하는 한 자본주의 경제의 전환은 힘들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토대는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생산 관계를 자본과 여성의 관계로 봐야 자본주의 생산시스템을 바로 볼 수 있다. (자본과 동물의 생산 관계는 추후 다시 이야기하기로 한다.)

여자들의 시간은 자본과 다양하게 얽혀 있다. 그중에서 인간을 ‘생산’하는 ‘출산’ 또한 자본과 긴밀하게 얽혀있지만, 자본주의에 복무하는 경제학은 이 긴밀함을 은폐하거나 무시해 버린다. 부모들은 자식을 낳고 자식은 치열한 신자유주의적 교육 시장을 거치면서 자신들을 자본에 복속시킨다. 이를 우리는 취업이라 부른다. ‘정상적인’ 사회인이 됐다는 것을 축하하고, 인간으로서 성장했다고 받아들인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양육이 자본주의 경제와 맺는 관계를 살피는 일은 자본주의의 토대를 보는 일 중 하나다.

영국의 작가 앨도스 헉슬리는 1932년에 인간을 대량생산하고, 한 개의 난자가 한 번에 96개로 분열해 96명을 생산하는 ‘보카노프스키 공법’의 《멋진 신세계》를 그렸다. 이 세계의 기원은 예수가 아니라 포드다. 포디즘에 의한 상품의 대량생산이 자본주의의 한 양상이라면 헉슬리는 대량생산을 인간 생산에 적용한다. 헉슬리는 인간이 대량생산되는 컨베이어 벨트를 상상하고 10명의 총통으로 구성된 세계국가를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오래전 읽었을 때의 충격은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이 작품은 주로 철저한 계급사회인 미래세계의 암울함을 그렸다고 평가받는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이미 계급(알파부터 엡실론까지)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 세계의 ‘안전·공유·균등’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필자가 눈여겨보는 부분은 임신과 출산에 관한 것이다. 헉슬리가 대조 비교하는 두 세계인 ‘야만인 보호구역’과 ‘신세계’는 가부장체제적 인간 생산에 대해 생각할 단초를 제공한다. ‘야만인 보호구역’은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하고, 이성애적 섹스와 생물학적 어머니와 아버지가 존재하며 가족이 존재하는 사회다. 이와 달리 ‘신세계’는 여성이 출산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와 남자 간의 섹스는 존재하지만 연애, 결혼, 가족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이 출산을 하는 사회와 여성이 출산을 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생각은 페미니즘 경제의 관심사가 된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경제는 여성의 출산, ‘인간 생산’을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사랑의 영역으로 놓았다. 자연과 사랑의 영역으로 놓는다는 것은 그에 대한 물질적 보상이나 사회적 지불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한 여성혐오와 차별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 경제는 가부장적 경제가 된다.

최근 들어 인공 여성생식기가 개발되고, ‘출산주도성장론’이 제기됐다. 2017년 미국에서 인공자궁을 개발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도시락 크기의 이 인공자궁은 혈액공급까지 연결된 여성생식기다. 곧 남성생식기도 만든다고 한다. 또한 2018년 자유한국당 김성태 의원은 ‘출산주도성장론’을 제기하며 “출산장려금 2000만 원을 지급하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 이 두 상황은 모두 여성의 출산이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행위임을 반증한다. 민주당의 남인순 의원이 “여성을 출산과 성장의 도구로 인식하지 말라”라고 대응을 했지만, 역설적으로 여성은 출산의 도구이자, 국가생산력과 국가경제력의 도구로 활용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낙태를 국가 차원에서 금지해 온 것도 출산이 그만큼 국가 경제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페미니즘 경제학은 지금까지의 ‘경제’가 ‘상품경제’를 뜻하는 것이고, 생산이 ‘상품생산’을 뜻하며, 노동이 ‘상품생산 노동’을 뜻한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여성의 일을 ‘생산’과 ‘노동’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경제와 경제학의 범주를 다시 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누가 경제의 범주와 내용을 ‘상품경제’, ‘상품시장경제’에 국한시켰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왜 여성의 일인 출산을 경제의 영역에서 제외하고 배제했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배제가 ‘인간적인 것’과 ‘재화용역적인 것’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는 변명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구에게 이득이 갔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생산’과 ‘노동’이라고 하면 인간을 ‘상품화’한다고 비판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생산’과 ‘노동’이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이라는 사실을 돌아봐야 한다. 출산을 인간 생산으로 보고 인간 생산노동으로 보는 일은 ‘생산중심주의’에 물든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중심주의’를 바꾸는 일이다. ‘생산’과 ‘노동’을 자본주의 가부장체제로부터 구출해 내는 일이다. 다시 말해 ‘경제’를 다시 정의하는 일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 살해, 억압, 착취, 차별의 구조를 바꾸는 ‘페미니즘 경제’의 단초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