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운동 사회 성폭력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가

[꿘 여성의 생존기]

운동 사회에서 활동가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활동 공간이 다른 곳보다 더 안전하고 평등한 공간이라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많은 운동단체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며 그중에는 끝내 잘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는 경우도 많다. 오래전부터 이런 문제들이 발생할 때마다 피해자에게 연대하고 함께 싸워온 이들이 많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운동 사회 성폭력이란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주제다. 이런 인식은 사람들이 피해자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들 속에서 논쟁과 갈등은 격화되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신뢰는 저하되며 피해자는 이 과정에서 또다시 상처를 받게 된다. 피해자가 공동체를 떠나거나 가해자가 징계를 받고 활동 정지 기간이 끝나 복귀할 때쯤, 즉 사건이 잠잠해질 때쯤엔 어딘가에서 또 새로운 사건이 터진다.

20년 전 ‘운동 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 위원회’ 등의 활동으로 운동 사회 내 성폭력, 성차별 등의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운동 사회 성폭력이 공동체의 문제라는 인식 속에 많은 단체들이 반성폭력, 인권 규약을 만들었고 성폭력 예방 교육, 인권 교육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왜 이런 일들이 자꾸만 반복되는 것일까. 필자가 여러 운동 사회 성폭력 사건들을 경험하고 지켜보며 느꼈던 것을 토대로 그 이유를 정리해봤다.



우리는 모두 동지이자 같은 피해자라는 관점

많은 활동가들은 사회적으로 권력이 적고, 경제적으로도 취약하며, 국가·사회에 의한 일상적인폭력과 차별을 받고 있다는 감각을 갖고 살아간다. 실제로 많은 운동권들은 자신이 일상적으로 폭력과 피해에 노출된 피해자이며 사회적 소수자라고 정체화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들은 자신이 ‘가해자’로 지목되고, 권력을 이용해 남을 괴롭히고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이것은 정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들은 자신의 상황을 국가와 사회에 맞서 싸우는 ‘전시상황’으로 인지한다. 자신의 잘못을 공표하는 것은 적들에게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고, 자신에게 더 큰 ‘피해’를 초래하는 일이 된다. 이들의 이러한 인지 구도가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운동 사회에서 성폭력이 벌어지고 그것이 기사화되면 주류 사회는 좌파들의 부도덕함을 비난하고 운동을 공격한다. 운동 사회 내부에서도 자신의 단체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이 알려지는 것에 정치적 위기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즉, 많은 운동 사회 성원들은 도덕성 논란으로 자신들의 정당한 운동의 가치가 훼손될까봐 매우 두려워한다. 이들은 운동을 이어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정당한 비판과 책임을 넘어서는 부당한 폭력·비난·의심 등에 노출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상황과 맥락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것이 바로 그동안 성폭력 사건이 터졌을 때 대부분의 운동단체 성원들이 가지고 있던 감정들이 아닐까. 실제로 과거의 많은 운동 사회 성폭력 피해자들이 반드시 조직의 강압이나 권유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성폭력 사건에 대해 알리지 않고 침묵했던 이유도 이와 관련돼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이런 정서와 인식은 성폭력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고 피해자를 이중삼중으로 고통스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고 은폐하기 때문에 반드시 바꿔야 한다. 하지만 운동 사회 성원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인지 도식과 정서가 가해자 교육이나 성폭력 예방 교육만으로 해결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결국 이것은 성폭력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운동에 대한 인식과 운동 방식, 조직문화까지 건드려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해자들 역시 운동 사회에서 살아가고 활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노력, 피해자들 역시 두려움을 공유하고 있다는 공감대를 가지려고 노력해본다면 어떨까? 피해자들도 자신이 공동체에서 신뢰받고 지지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뿐 아니라, 사건으로 인해 자신이 해왔던 운동이 부정당하고 폄훼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문제를 알리고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피해자들에게 해당 조직을 “저기는 원래 저래”, “그냥 그 단체에서 나오세요”와 같은 말들은 무의미하다. 이는 피해자의 투쟁과 문제의식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가해자의 명예 vs 피해자의 피해라는 구도

또 다른 문제는 운동 사회가 여전히 활동가 개인의 인맥과 명성에 의존해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많은 운동과 투쟁에는 그 운동을 대표하거나 상징하는 활동가들이 있다. 이 활동가의 명예가 훼손된다는 것은 활동가 개인의 활동 영역과 사회적 자원들이 축소되는 것뿐 아니라, 그 활동가의 명예에 의존하고 있던 운동들도 타격을 입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하는 순간, 가해자의 명예 및 운동의 미래를 피해자의 권리와 맞바꾸게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운동의 미래를 빌미로 피해자를 탓하기 전에,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애초에 개인의 명예에 의존한 운동이 과연 지속 가능한 운동일까?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바꾸고자 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사실 우리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사상누각을 세우고 지켜왔던 것은 아닐까.

운동 사회는 항상 노련한 인력창고가 부족하고 활동가 재생산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또 주요한 실무를 맡았던 가해자가 날아갈 경우 이를 대체할 사람이 없다는 어려움을 호소한다. 그러나 역으로 소수의 명예에 기대어 기존의 운동을 지켜왔던 것이 지금의 이러한 인력난을 초래해왔던 것이 아닐까. 그동안 우리가 운동의 앞날을 이야기하며 얼마나 많은 동지를 떠나보내야만 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이것은 폭력의 문제뿐 아니라 운동의 전망을 피해자의 권리와 충돌하는 구조로 만들어온 기존의 운동 구조와 문화를 전부 되짚고 변화시켜야 하는 문제다. 이런 점에서 운동 사회의 성폭력 피해호소, 고발은 그 자체로 운동의 구조와 문화를 바꾸는 ‘운동 안의 운동’이다.

그동안 성폭력을 말할 때 사람들은 주로 피해자와 가해자, 즉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왔다. 하지만 성폭력 사건 해결의 책임은 가해자와 피해자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 사회에서 살아가고 활동하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 우리는 제삼자의 위치에서 피해자가 완벽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돼 이 모든 문제에 대해 의연하고 강하게 싸울 것, 혹은 비도덕적인 가해자 개인을 비난하고 가해자가 도덕적인 사람으로 ‘갱생’해서 돌아오라고만 요구할 게 아니라 모두 함께 도덕적 책임을 나눠야 한다. 가해자가 가해자 교육을 받고 바뀌어야 한다는 관점도, 피해자가 치유돼야 한다는 관점도 결국 초점을 여전히 개인에게 맞추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성폭력 문제 해결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몫이 있듯이 공동체에도 공동체의 몫이 있다는 것이다. 성폭력 사건을 겪으며 피해자와 가해자만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도 변화하고 성장해나갈 수 있다.